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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 23일 (화) 15:47 기준 최신판
목차
개요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는 일제강점기 서울에 설립되었던 사립 여자 중등 교육기관이다. 1908년 설립된 동덕여자의숙을 모체로 하며, 한국인의 자본과 교육 열망으로 세워진 대표적인 민족 사학이다. 오늘날 동덕여자대학교, 동덕여자고등학교, 동덕여자중학교를 운영하는 학교법인 동덕학원의 뿌리가 되는 학교이다.
설립과 발전 과정
태동기 (1908년~1910년대)
1908년 4월, 조동식(趙東植) 선생은 '여성을 교육하여 덕을 함께 닦아야 국가가 바로 선다'는 신념 아래 서울 창신동에서 동덕여자의숙을 개숙하였다. 초기에는 재정적 어려움이 컸으나, 1910년 중등과를 설치하며 본격적인 여성 중등 교육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911년 사립동덕여자보통학교로 개편되었으며, 당시 한국 여성들에게 근대적 지식과 예절을 가르치는 중심지가 되었다.
고등보통학교 승격과 도약 (1919년~1930년대)
1919년 3·1 운동 이후 높아진 교육 열기에 부응하여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로 승격되었다. 이 시기 학교의 비약적인 발전에는 춘강(春江) 이석구(李錫九) 선생의 공헌이 절대적이었다. 이석구 선생은 1926년 자신의 전 재산인 논밭 약 120만 평을 학교법인에 기부하였는데, 이는 당시 교육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거액의 기탁이었다. 이 자본을 바탕으로 1930년대 동덕은 교사를 신축하고 교육 설비를 확충하며 명실상부한 명문 사학으로 자리 잡았다.
전시 체제와 학제 개편 (1938년~1945년)
1938년 제3차 조선교육령에 따라 교명이 '동덕여자중학교'로 변경되었다.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황국신민화 교육의 압박을 받았으나, 교사진과 학생들은 암암리에 민족의식을 유지하려 노력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6년제 중학교로 개편되었다가, 현대의 학제에 맞춰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분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교육내용 및 학풍
교육 과정
수신, 국어(조선어), 일본어, 한문, 수학, 역사, 지리, 박물, 물리, 화학, 가사, 자수, 도화, 창가, 체육 등의 과목을 가르쳤다. 특히 여성의 실천적 미덕을 강조하면서도 독립적인 사회 구성원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신학문 보급에 주력하였다.
민족 정신 교육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는 단순한 지식 전달을 넘어 항일 정신의 요람 역할을 하였다. 1919년 3·1 운동 당시 학생들은 비밀리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거나 시위에 참여하였다.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 당시에도 서울 지역 여학생 시위를 주도하며 민족의 수난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
주요 설립 및 기여자
- 조동식 (趙東植, 1873~1973): 동덕여자의숙 설립자이자 동덕학원의 기틀을 닦은 인물이다. 평생을 여성 교육에 헌신하여 '한국 여성 교육의 아버지'로 불린다.
- 이석구 (李錫九, 1880~1956): 호는 춘강(春江). 학교 재단법인의 이사장을 역임하며 거액의 토지를 기부하여 동덕이 재정적 자립을 이룰 수 있게 도왔다. 그의 숭고한 기부 정신은 현재도 동덕학원의 핵심 가치로 기억되고 있다.
역사적 가치와 의의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는 외세의 원조나 관립(정부 설립) 기관이 아닌, 순수하게 한국인의 의지와 자본으로 세워진 학교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 속에서도 한국 여성들에게 근대적 사고를 심어주었으며, 여성 사회 진출의 문을 넓히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 |
|---|---|
| 개교 | 1926년 4월 27일 |
| 후신 | 동덕여자고등학교 |
| 주소 | 서울특별시 관훈동 (현재의 안국동과 인사동 경계 부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