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성(춘성)"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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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성 (189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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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성 (春性, 1891~1977) =
대한민국 근현대 불교사에서 독특한 수행 양식과 파격적 언어 사용으로 널리 알려진 승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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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성은 20세기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선승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설악산 백담사에서 만해 한용운의 제자가 되어 출가한 이후  
법명은 춘성, 법호는 춘성이며 속성은 이씨이다.   
+
간화선 수행, 화엄 교학 연구, 사찰 운영, 대중 포교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였다.   
특히 만해 한용운의 상좌로 출가하여 평생 그의 사상적 영향을 깊이 받은 인물로 평가된다.
+
특히 3·1운동 당시 옥중의 한용운이 집필한 「조선독립의 서」를 비밀리에 전달한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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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화된 승려상에서 벗어난 무애도인의 삶을 실천한 것으로 평가된다.
  
본항은 춘성의 출생, 수행, 사상, 문화적 영향 등을 종합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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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항목은 춘성의 생애, 수행, 사상, 사회사적 의미를 포괄적으로 다루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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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불교사 속에서 그의 위치와 역할을 분석적으로 정리한다.
  
== 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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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 정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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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분 !!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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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목 !!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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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명 || 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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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명 || 춘성
 
| 법명 || 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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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명 || 이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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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별 || 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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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1891년 3월 30일,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원통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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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연도 || 189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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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적 || 1977년 8월 22일, 경기도 의정부시 망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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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망 연도 || 197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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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파 || 대한불교 조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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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관 || 평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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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지 || 강원도 인제군 원통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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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성 || 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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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사 || 한용운
 
| 은사 || 한용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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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족계 || 1911년 금강산 유점사 동선 스님 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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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맥 || 한용운 계통의 선·교 겸비 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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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활동 || 신흥사, 석왕사, 망월사 주지, 간화선 수행, 유심 잡지 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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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 직책 || 신흥사 주지, 석왕사 주지, 선학원 평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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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징 || 무소유 실천, 화엄법사, 파격적 언어, 대중적 선풍 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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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행 성격 || 간화선, 무소유 실천, 화엄경 연구, 강도 높은 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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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성은 한용운, 백용성, 만공 등 근대 한국 불교의 핵심 인물들과 교유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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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 개요 ==
독립운동 시기와 해방 이후까지 광범위한 영향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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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성은 강원도 인제 출신으로, 13세 무렵 설악산 백담사에서 만해 한용운을 찾아가 제자가 되면서 승려의 길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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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유점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석왕사 불교전문강원을 졸업하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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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시기에는 은사 한용운을 도우며 독립운동의 주변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 생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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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사찰에 정착하기보다 떠돌아다니며 수행을 지속한 운수납자로서의 면모가 강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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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유와 무애행으로 대표되는 독특한 수행자상은 한국 현대불교 문화에서 길이 회자되고 있다.
  
=== 출생과 어린 시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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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적 사항 ==
춘성은 1891년 강원도 인제군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기억력이 뛰어났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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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 무렵 설악산 신흥사에서 불상을 본 뒤 출가를 결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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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목 !! 상세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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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계 || 부친 이인오, 모친 박씨 사이 3형제 중 둘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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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 || 총명하고 암기력이 뛰어났다는 전승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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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기 종교 경험 || 설악산 신흥사·백담사 주변에서 불교 문화를 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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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가 계기 || 13세에 설악산 백담사에서 한용운에게 출가 청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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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반대가 있었으나 여러 해를 설득한 끝에 190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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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와 주요 활동 ==
13세의 나이로 인제 백담사에서 한용운을 찾아가 사문이 되기를 청하였다.
 
  
한용운은 처음에 그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망설였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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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출가 이전과 한용운 제자 입문 ===
며칠간 비를 맞아가며 정좌한 채 떠나지 않는 모습을 보고 제자로 받아들였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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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성은 1891년 강원도 인제에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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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부터 총명하여 시문과 암기에 능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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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세가 되던 해 그는 설악산 백담사를 찾아가 “한용운에게 출가하겠다”는 소망을 밝히며 며칠간 비를 맞아가며 정좌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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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본 한용운이 마침내 제자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 시기의 사승 관계 형성은 후일 춘성의 사상과 실천 전반에 깊은 뿌리를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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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의 사승 관계 형성은 춘성의 불교관, 사회의식, 수행 방식 전반에 깊은 기반이 되었다.
  
=== 출가와 초기 수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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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구족계 수지와 교학 교육 ===
1903년 백담사에서 삭발·사미계를 받고 춘성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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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성은 유점사에서 김동선 율사로부터 구족계를 받았고,   
1911년 금강산 유점사에서 동선 스님으로부터 구족계를 받고 정식 비구가 되었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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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석왕사 불교전문강원의 대교과를 수료하였다. 
1915년 안변군 석왕사 전문강원 대교과를 수료하여 경학에 능통한 강백으로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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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표는 초기 교육 및 수행 과정을 정리한 것이다.
  
특히 화엄경 연구에 깊이 몰두하여 후일 ‘화엄법사’로 불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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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lass="wiki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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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기 !! 장소 !! 활동 및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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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3년경 || 백담사 || 한용운 문하 입문, 사미계 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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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1년 || 금강산 유점사 || 김동선 율사에게 구족계 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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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0년대 초 || 석왕사 || 불교전문강원 대교과 수료, 경학에서 높은 역량 획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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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용운과의 사승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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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에서 그는 화엄경에 깊이 몰두하였고, 후일 ‘화엄법사’로 불릴 만큼 교학적 역량을 쌓았다.
춘성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는 은사인 만해 한용운이다.
 
  
* 1903년 백담사에서 제자로 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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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3·1운동과 한용운 지원 활동 ===
* 한용운의 집필 활동 시 시봉 역할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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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1운동 당시 은사 한용운은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하였고, 곧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 한용운이 3.1 운동으로 투옥되자 옥바라지를 전담
+
춘성은 도봉산 망월사에 머물며 그의 생활을 돌보았고, 
* 옥중의 한용운 서신을 임시정부에 전달했다는 전승 존재
+
한용운이 옥중에서 집필한 「조선독립의 서」를 비밀리에 받아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했다는 전승이 전한다.
* 1918년 유심 창간 시 필진으로 참여
 
* 선·교 겸비한 수행 방식과 무소유의 실천은 한용운의 사상과 긴밀한 연관성을 가짐
 
  
춘성의 독립운동 지원과 비타협적 태도는 사실상 한용운의 영향 아래 형성된 것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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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비록 공식 기록으로 입증되지는 않았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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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성과 한용운의 강한 사승 결연, 그리고 춘성이 갖고 있던 민족적 감수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 선 수행의 심화 ===
+
=== 4. 사찰 운영과 수행 ===
1920년 신흥사 주지로 부임하여 사찰 운영을 맡았으며,   
+
춘성은 신흥사, 석왕사 등의 주지를 역임하면서도 장기간 한 사찰에 머물지 않았다.  
이후 수덕사 정혜선원으로 내려가 만공 선사 문하에서 강도 높은 간화선 수행을 전개하였다.
+
그는 아래와 같은 특징적 수행 경로를 보였다.
  
덧붙여, 금강산 유점사에서 겨울마다 장좌불와와 냉수 수행을 반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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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음을 항복시켰다”라는 말로 정진의 절정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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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기 !! 활동 !!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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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대 || 신흥사 주지 || 사찰 운영과 대중 교화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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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대 후반 || 수덕사 정혜선원 수행 || 만공 선사 문하에서 간화선 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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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년대 || 선리참구원 평의원 || 조선불교 선종 활동에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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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년대~1940년대 || 선학원 안거 수행 || 수도 중심의 강도 높은 정진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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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중 포교와 주지 생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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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수덕사에서의 수행은 춘성의 선적 정체성을 확립한 중요한 시기였다.
1930년대 이후 석왕사, 신흥사, 망월사 등 여러 사찰의 주지로 활동하였다. 
 
무소유의 생활로 유명하며, 방문을 잠그지 않고 모든 것을 공개한 채 살았다.
 
  
망월사에서는 혹독한 수행 규율을 통해 많은 수좌를 배출하였고,   
+
=== 5. 해방 이후 활동 ===
해방 이후에는 한국 전쟁 와중에도 홀로 사찰을 지키며 선풍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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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에도 춘성은 정치나 종단 갈등에 개입하지 않고 수행 중심의 삶을 유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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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에는 선학원에서 개최된 전국비구승대표자대회에 참여하였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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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한국 불교계 최대 이슈였던 정화운동에는 일절 나서지 않았다.
  
=== 최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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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행과 사상 ==
1977년 8월 22일 망월사에서 입적하였다. 
 
생전 유언에 따라 사리는 찾지 말고 비석이나 부도를 세우지 말라고 하였으며, 
 
다비 후 재는 황해에 뿌려졌다.
 
  
== 수행과 사상 ==
+
=== 1. 무소유의 실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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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성의 대표적 수행 방식은 철저한 무소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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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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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요한 물건을 가지려 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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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을 받으면 곧바로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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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위에 떠는 이를 보면 입고 있던 옷을 벗어 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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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을 잠그지 않고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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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치를 철저히 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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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에서는 이러한 태도를 두고 **무애도인(無碍道人)**이라 불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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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국 불교에서 ‘무소유’의 상징적 모델로 회자된다.
  
=== 무소유의 실천 ===
+
=== 2. 화엄경 중심 교학 이해 ===
춘성의 대표적 특징은 평생에 걸친 무소유였다.
+
춘성은 화엄경에 대한 이해가 깊어 당대 고승들 사이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
화엄 사상을 대중에게 설하는 데 능했으며, 
 +
한용운·백용성과 함께 화엄의 세계관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인물로도 평가된다.
  
* 양복을 받으면 곧 노숙자에게 벗어 줌 
+
=== 3. 간화선 수행과 정진 방식 ===
* 돈을 모으지 않고, 손에 잡히는 대로 필요한 사람에게 줌 
+
수덕사 정혜선원에서의 정진으로 대표되며 다음과 같은 수행을 지속하였다.
* 방문이나 서랍을 잠그지 않음 
 
* 이불을 덮지 않고 생활 
 
* 수행자에게 사치품을 허용하지 않음
 
  
이는 한용운의 생애 후반 ‘무아·무소유’의 사상과도 긴밀하게 대응한다.
+
* 장좌불와 
 +
* 혹독한 냉수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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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 도량석을 평생 포기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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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행과 실천을 결합한 선 수행 
  
=== 화엄경 이해와 교학 연구 ===
+
이는 단순한 고행이 아니라 마음의 집착을 제거하는 간화선적 실천으로 이해된다.
화엄경을 거꾸로 외울 정도로 경학에 통달하였으며, 
 
당대 최고의 화엄법사로 불렸다. 
 
이는 백용성·한용운·만공 등의 교학·선학적 전통을 이어받은 결과로 평가된다.
 
  
=== 파격적 언어 사용 ===
+
== 인물적 평가 ==
일상적 언어에서 직설적 표현과 속어를 자주 사용했으나,   
+
춘성은 해학적 언어와 직설적인 화법으로 “욕쟁이 스님”이라는 별칭을 얻었지만,   
이는 상대의 집착을 깨뜨리고 선적 직관을 일으키기 위한 방편으로 해석되었다.
+
이는 상대의 집착을 끊고 본성을 직관하도록 하는 방편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 평생 수행 태도 ===
+
한편으로 그는 
* 장좌불와 고집  
+
* 한용운의 직계 제자  
* 찬물 수행  
+
* 화엄법사  
* 항아리 속 수행  
+
* 간화선 수행자  
* 새벽 도량석을 평생 지속  
+
* 무애 실천가 
* 늙어서도 수좌들과 동일한 강도의 수행 유지
+
로서 다양한 층위의 정체성을 갖고 있으며,  
 +
이 복합적 성격은 근현대 한국 불교사 연구에서 중요한 사례로 다뤄진다.
  
이러한 엄격한 수행 방식은 그의 사상적 근간이 평생 유지되었음을 보여준다.
+
== 입적과 사리 ==
 +
춘성은 1977년 경기도 성남 봉국사에서 입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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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 후 자신의 사리를 바다에 뿌릴 것을 유언하였고, 
 +
제자들은 그 뜻에 따라 모두 서해에 사리를 흩뿌렸다고 전한다. 
 +
봉국사에는 그의 비석과 부도탑이 남아 있다.
  
== 주요 사건 타임라인 ==
+
== 연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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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도 !! 사건 !!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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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도 !! 사건 !!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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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1 || 출생 || 강원도 인제에서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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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3 || 출가 || 백담사에서 한용운에게 사사, 사문 생활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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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1 || 강원도 인제 출생 || 평창 이씨 가문에서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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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1 || 구족계 || 금강산 유점사에서 구족계 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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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3 || 백담사에서 한용운 제자가 됨 || 사승 관계 형성, 사상적 기반 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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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5 || 전문강원 수료 || 석왕사 대교과 과정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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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1 || 유점사에서 구족계 수지 || 정식 비구로서 수행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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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8 || 유심 참여 || 한용운 창간 잡지 유심의 필진으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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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0년대 || 석왕사 강원 수료 || 교학적 학력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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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 || 독립운동 지원 || 옥중 한용운의 서신 전달 전승 존재
+
| 1919 || 한용운 옥중 지원, 「조선독립의 서」 전달 전승 존재 || 민족운동과 연결
 
|-
 
|-
| 1920 || 신흥사 주지 || 사찰 운영과 선풍 강화
+
| 1920년대 || 신흥사·석왕사 주지 || 사찰 운영과 대중 교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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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s || 정혜선원 수행 || 만공 문하에서 간화선 수행 정진
+
| 1920~1930년대 || 수덕사 정혜선원 정진 || 간화선 수행의 본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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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6 || 망월사 주지 || 해방 후 망월사 선풍 재건
+
| 1930년대 || 선리참구원 활동, 선학원 안거 || 조선불교 선종의 부흥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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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 || 한국전쟁 || 사찰을 떠나지 않고 망월사 수호
+
| 1977 || 봉국사에서 입적 || 한 시대를 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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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7 || 입적 || 망월사에서 열반
 
 
|}
 
|}
  
== 문화적 영향 ==
+
== 맺음말 ==
* 걸승 이미지와 해학적 풍자가 현대 불교 문화에서 상징적으로 회자됨 
+
춘성은 근현대 한국 불교사에서 ‘정형을 거부한 수행자’, ‘무애도인’, ‘만해의 상좌’로 기억된다.  
* EBS 강의에서 김용옥이 소개하면서 대중적 관심이 재점화됨  
+
그의 생애는 수행과 삶이 일치하는 실천적 불교의 한 전형을 보여 주며,  
* 무소유 수행 방식은 법정 등 후대 승려에게도 간접적 영향을 미침  
+
한용운을 중심으로 형성된 사상적 계열이 어떻게 20세기 한국 불교 안에서 계승되고 변형되었는지를 
* 한국 현대 선불교의 대중화 과정에서 독특한 역할 수행
+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사례를 제공한다.
 
 
== 함께 보기 ==
 
* 한용운
 
* 백용성
 
* 만공
 
* 백담사
 
* 망월사
 
* 한국 근현대 불교
 
* 간화선
 

2025년 12월 10일 (수) 15:15 판

춘성 (春性, 1891~1977)

춘성은 20세기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선승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설악산 백담사에서 만해 한용운의 제자가 되어 출가한 이후 간화선 수행, 화엄 교학 연구, 사찰 운영, 대중 포교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였다. 특히 3·1운동 당시 옥중의 한용운이 집필한 「조선독립의 서」를 비밀리에 전달한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정형화된 승려상에서 벗어난 무애도인의 삶을 실천한 것으로 평가된다.

본 항목은 춘성의 생애, 수행, 사상, 사회사적 의미를 포괄적으로 다루며, 근현대 불교사 속에서 그의 위치와 역할을 분석적으로 정리한다.

기본 정보

구분 내용
본명 창림
법명 춘성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91년
사망 연도 1977년
본관 평창
출생지 강원도 인제군 원통리
속성 이씨
은사 한용운
법맥 한용운 계통의 선·교 겸비 전통
주요 직책 신흥사 주지, 석왕사 주지, 선학원 평의원
수행 성격 간화선, 무소유 실천, 화엄경 연구, 강도 높은 정진

인물 개요

춘성은 강원도 인제 출신으로, 13세 무렵 설악산 백담사에서 만해 한용운을 찾아가 제자가 되면서 승려의 길을 걸었다. 이후 유점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석왕사 불교전문강원을 졸업하였으며, 3·1운동 시기에는 은사 한용운을 도우며 독립운동의 주변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평생 사찰에 정착하기보다 떠돌아다니며 수행을 지속한 운수납자로서의 면모가 강했고, 무소유와 무애행으로 대표되는 독특한 수행자상은 한국 현대불교 문화에서 길이 회자되고 있다.

인적 사항

항목 상세 내용
가계 부친 이인오, 모친 박씨 사이 3형제 중 둘째
어린 시절 총명하고 암기력이 뛰어났다는 전승 존재
초기 종교 경험 설악산 신흥사·백담사 주변에서 불교 문화를 접함
출가 계기 13세에 설악산 백담사에서 한용운에게 출가 청함

생애와 주요 활동

1. 출가 이전과 한용운 제자 입문

춘성은 1891년 강원도 인제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여 시문과 암기에 능했다고 전한다. 13세가 되던 해 그는 설악산 백담사를 찾아가 “한용운에게 출가하겠다”는 소망을 밝히며 며칠간 비를 맞아가며 정좌했고, 이를 본 한용운이 마침내 제자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 시기의 사승 관계 형성은 춘성의 불교관, 사회의식, 수행 방식 전반에 깊은 기반이 되었다.

2. 구족계 수지와 교학 교육

춘성은 유점사에서 김동선 율사로부터 구족계를 받았고, 이후 석왕사 불교전문강원의 대교과를 수료하였다. 아래 표는 초기 교육 및 수행 과정을 정리한 것이다.

시기 장소 활동 및 의미
1903년경 백담사 한용운 문하 입문, 사미계 수지
1911년 금강산 유점사 김동선 율사에게 구족계 수지
1910년대 초 석왕사 불교전문강원 대교과 수료, 경학에서 높은 역량 획득

이 과정에서 그는 화엄경에 깊이 몰두하였고, 후일 ‘화엄법사’로 불릴 만큼 교학적 역량을 쌓았다.

3. 3·1운동과 한용운 지원 활동

1919년 3·1운동 당시 은사 한용운은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하였고, 곧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춘성은 도봉산 망월사에 머물며 그의 생활을 돌보았고, 한용운이 옥중에서 집필한 「조선독립의 서」를 비밀리에 받아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했다는 전승이 전한다.

이는 비록 공식 기록으로 입증되지는 않았으나, 춘성과 한용운의 강한 사승 결연, 그리고 춘성이 갖고 있던 민족적 감수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4. 사찰 운영과 선 수행

춘성은 신흥사, 석왕사 등의 주지를 역임하면서도 장기간 한 사찰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아래와 같은 특징적 수행 경로를 보였다.

시기 활동 설명
1920년대 신흥사 주지 사찰 운영과 대중 교화 담당
1920년대 후반 수덕사 정혜선원 수행 만공 선사 문하에서 간화선 정진
1930년대 선리참구원 평의원 조선불교 선종 활동에 참여
1930년대~1940년대 선학원 안거 수행 수도 중심의 강도 높은 정진 지속

특히 수덕사에서의 수행은 춘성의 선적 정체성을 확립한 중요한 시기였다.

5. 해방 이후 활동

해방 이후에도 춘성은 정치나 종단 갈등에 개입하지 않고 수행 중심의 삶을 유지하였다. 1954년에는 선학원에서 개최된 전국비구승대표자대회에 참여하였으나, 당시 한국 불교계 최대 이슈였던 정화운동에는 일절 나서지 않았다.

수행과 사상

1. 무소유의 실천

춘성의 대표적 수행 방식은 철저한 무소유였다.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 필요한 물건을 가지려 하지 않음
  • 돈을 받으면 곧바로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줌
  • 추위에 떠는 이를 보면 입고 있던 옷을 벗어 줌
  • 방을 잠그지 않고 생활
  • 사치를 철저히 배제

불가에서는 이러한 태도를 두고 **무애도인(無碍道人)**이라 불렀으며, 현대 한국 불교에서 ‘무소유’의 상징적 모델로 회자된다.

2. 화엄경 중심 교학 이해

춘성은 화엄경에 대한 이해가 깊어 당대 고승들 사이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화엄 사상을 대중에게 설하는 데 능했으며, 한용운·백용성과 함께 화엄의 세계관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인물로도 평가된다.

3. 간화선 수행과 정진 방식

수덕사 정혜선원에서의 정진으로 대표되며 다음과 같은 수행을 지속하였다.

  • 장좌불와
  • 혹독한 냉수 수행
  • 새벽 도량석을 평생 포기하지 않음
  • 고행과 실천을 결합한 선 수행

이는 단순한 고행이 아니라 마음의 집착을 제거하는 간화선적 실천으로 이해된다.

인물적 평가

춘성은 해학적 언어와 직설적인 화법으로 “욕쟁이 스님”이라는 별칭을 얻었지만, 이는 상대의 집착을 끊고 본성을 직관하도록 하는 방편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한편으로 그는

  • 한용운의 직계 제자
  • 화엄법사
  • 간화선 수행자
  • 무애 실천가

로서 다양한 층위의 정체성을 갖고 있으며, 이 복합적 성격은 근현대 한국 불교사 연구에서 중요한 사례로 다뤄진다.

입적과 사리

춘성은 1977년 경기도 성남 봉국사에서 입적하였다. 다비 후 자신의 사리를 바다에 뿌릴 것을 유언하였고, 제자들은 그 뜻에 따라 모두 서해에 사리를 흩뿌렸다고 전한다. 봉국사에는 그의 비석과 부도탑이 남아 있다.

연표

연도 사건 의미
1891 강원도 인제 출생 평창 이씨 가문에서 출생
1903 백담사에서 한용운 제자가 됨 사승 관계 형성, 사상적 기반 확립
1911 유점사에서 구족계 수지 정식 비구로서 수행 시작
1910년대 석왕사 강원 수료 교학적 학력 완성
1919 한용운 옥중 지원, 「조선독립의 서」 전달 전승 존재 민족운동과 연결
1920년대 신흥사·석왕사 주지 사찰 운영과 대중 교화
1920~1930년대 수덕사 정혜선원 정진 간화선 수행의 본격화
1930년대 선리참구원 활동, 선학원 안거 조선불교 선종의 부흥 참여
1977 봉국사에서 입적 한 시대를 마감

맺음말

춘성은 근현대 한국 불교사에서 ‘정형을 거부한 수행자’, ‘무애도인’, ‘만해의 상좌’로 기억된다. 그의 생애는 수행과 삶이 일치하는 실천적 불교의 한 전형을 보여 주며, 한용운을 중심으로 형성된 사상적 계열이 어떻게 20세기 한국 불교 안에서 계승되고 변형되었는지를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사례를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