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육사의 기자 생활"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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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34년 무렵 조선일보로 다시 합류했고, 이후에도 꾸준히 조선일보 지면에 글을 남겼다. 1930년대 후반에서 신문이 폐간되기 직전인 1940년까지 발표된 글들은 다양했다. 5회 연재된 「노신 추도문」(1936년 10월 23~29일자), 「문외한의 수첩」(1937년 8월 3~6일자, 3회), 「황엽전」(1937년 10월 31일~11월 5일자, 4회), 「전조기」(1938년 3월 2일자), 그리고 1940년 발표된 「계절의 오행」 등이 대표적이다.
 
그는 1934년 무렵 조선일보로 다시 합류했고, 이후에도 꾸준히 조선일보 지면에 글을 남겼다. 1930년대 후반에서 신문이 폐간되기 직전인 1940년까지 발표된 글들은 다양했다. 5회 연재된 「노신 추도문」(1936년 10월 23~29일자), 「문외한의 수첩」(1937년 8월 3~6일자, 3회), 「황엽전」(1937년 10월 31일~11월 5일자, 4회), 「전조기」(1938년 3월 2일자), 그리고 1940년 발표된 「계절의 오행」 등이 대표적이다.
  
[[파일:이육기사.jpg|500픽셀|섬네일|center| 이육사가 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근무하면서 쓴 1932년 1월 14일 자 ‘대구의 자랑 약령시의 유래’ 기사. ‘육사생’이란 필명 사용.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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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이육사기사.jpg|500픽셀|섬네일|center| 이육사가 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근무하면서 쓴 1932년 1월 14일 자 ‘대구의 자랑 약령시의 유래’ 기사. ‘육사생’이란 필명 사용. ⓒ 조선일보]]

2025년 12월 5일 (금) 22:38 판

출소한 뒤에는 중외일보와 조선일보 대구지국에서 기자로 일했고, 1930년에는 ‘이활’이라는 이름으로 첫 시 <말>을 조선일보에 발표했다. 이 시기는 훗날 교보생명을 세우는 신용호에게도 영향을 주어 독립운동 자금 지원과 교육 사업 구상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알려져 있다.

1930년, 이육사는 조선일보 지면을 통해 생애 첫 시 「말」을 발표하며 문단에 모습을 드러냈다. 1월 3일자 조선일보 7면 하단에 실린 이 짧은 작품에서 그는 매질에 지쳐 쓰러질 것 같은 말이지만 새해에는 다시 우렁차게 질주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이 작품이 바로 그와 조선일보의 첫 연결고리였다.

시 발표 후 그는 중외일보 대구지국에서 기자 일을 시작했고, 1931년 8월에는 조선일보 대구지국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지국은 지방 취재의 중심이었고, 이육사가 조선일보에서 처음으로 이름을 걸고 쓴 기사도 이곳에서 나왔다. 바로 1932년 1월 14일부터 네 차례 연재된 「대구의 자랑 약령시의 유래」라는 글이었다. 당시 그는 ‘육사생(肉瀉生)’이라는 독특한 필명을 썼다.

그는 스포츠 기사에서도 민족적 정서를 드러냈다. 1932년 3월 6일과 9일자 스포츠란에서 「대구 ‘장’ 연구회 창립을 보고서」라는 글을 연속으로 기고하며 이번에는 ‘이활(李活)’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여기서 그는 조상 대대로 이어오던 우리 겨레의 전통 놀이 ‘장치기’를 소개하며 경기 방식뿐 아니라 점수 계산 용어까지 온전히 우리말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더 나아가 이 놀이를 세계 농민 사회에까지 널리 보급하자고 주장했다.

그는 1934년 무렵 조선일보로 다시 합류했고, 이후에도 꾸준히 조선일보 지면에 글을 남겼다. 1930년대 후반에서 신문이 폐간되기 직전인 1940년까지 발표된 글들은 다양했다. 5회 연재된 「노신 추도문」(1936년 10월 23~29일자), 「문외한의 수첩」(1937년 8월 3~6일자, 3회), 「황엽전」(1937년 10월 31일~11월 5일자, 4회), 「전조기」(1938년 3월 2일자), 그리고 1940년 발표된 「계절의 오행」 등이 대표적이다.

이육사가 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근무하면서 쓴 1932년 1월 14일 자 ‘대구의 자랑 약령시의 유래’ 기사. ‘육사생’이란 필명 사용. ⓒ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