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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gCcfvA4fGKY 광복 79주년 특별영상 : 행동하는 지성, 저항시인 이육사 이야기] | [https://www.youtube.com/watch?v=gCcfvA4fGKY 광복 79주년 특별영상 : 행동하는 지성, 저항시인 이육사 이야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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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의 기자 생활]]== | ==[[이육사의 기자 생활]]== | ||
2025년 12월 5일 (금) 21:19 판
기본 정보
| 항목 | 내용 |
|---|---|
| 본명 | 이원록 |
| 출생 | 1904년 5월 18일 |
| 출생지 | 경상북도 예안군 의동면 원촌동 원촌마을 |
| 사망 | 1944년 1월 16일 |
생애
이육사는 1904년 5월 18일, 지금의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인 옛 예안군 일대에서 태어났다. 퇴계 이황의 후손인 아버지 이가호와 어머니 허길 사이에서 여섯 형제 중 둘째였다. 훗날 그는 영천 화북면 오동리 출신인 안일양과 결혼하게 된다.
어린 시절 그는 조부 이중직에게서 소학을 배우며 한학을 익혔다. 조부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진성이씨 문중에서 운영하던 보문의숙(훗날 도산공립보통학교)에서 공부했고, 이때 배운 한학의 영향은 그의 문학 세계에도 묻어난다. 졸업 후 가족이 대구로 이주했고, 그는 열아홉에 영천의 백학학원에서 교원으로 잠시 일했다. 1924년에는 일본 도쿄에서 예비학교 과정을 수학했으나 중도에 그만두고, 다음 해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가 사회학을 공부했지만 역시 2학년 때 학업을 접었다.
1927년 그는 장진홍_1895이 일으킨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과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대구형무소에서 약 1년 반을 지냈다. 이때의 수인번호 ‘264’를 따서 훗날 자신의 호를 ‘육사’라 짓는다.
1932년 그는 만주 펑톈으로 건너가 윤세주_1901를 만나 의열단 입단 권유를 받았고, 난징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으로 들어가 폭탄 제조와 투척, 변장, 무기 운반, 피신 기술 등 다양한 실전 교육을 받았다. 사격 실력은 특히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1933년 귀국 후에는 신문·잡지를 오가며 시와 논문, 시나리오 등 여러 글을 썼고, 루쉰의 소설 《고향》을 번역하기도 했다. 하지만 1934년 의열단 출신이라는 이유로 다시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을 당했고, 몇 달 뒤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1943년 베이징으로 건너갔다가 어머니와 큰형의 소상을 위해 5월에 귀국했다. 그러 이 해 6월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고, 결국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교도소에서 옥사하였다.
광복 79주년 특별영상 : 행동하는 지성, 저항시인 이육사 이야기
이육사의 기자 생활
많은 사람들이 이육사의 문학 작품만을 알고 기자 생활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위 페이지에서는 이육사의 기자 생활에 대해 더 자세히 서술한다.
'청포도'에 스민 가족에 대한 향수와 해방의 염원
이육사의 '청포도'는 이육사가 일제강점기에 경험한 상실과 분리를 바탕으로,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해방에 대한 염원을 동시에 그려낸 시이다. 시에서 드러난 익어가는 청포도의 모습과 돌아올 이를 기다리는 마음은 개인의 정서와 민족적인 바람이 자연스럽게 중첩되는 지점을 보여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