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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 3일 (수) 18:02 판

김성일

김성일(金時敏)
김시민.jpg
성명 김성일
출생 1554년 9월 23일
사망 1592년 11월 21일, 경상남도 진주시 진주
지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진주목사
훈련원판관
봉호 상락부원군

개요

김시민(申砬, 1554~1592)은 조선 중기의 무신이자 임진왜란의 영웅으로, 특히 제1차 진주성 전투의 승리를 이끈 지휘관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재임하던 중 1592년 10월, 약 3만 명에 달하는 일본군의 공격을 불과 3800여명의 병력으로 막아내어 조선의 사기를 크게 끌어올렸다. 이 전투에서 그는 중상을 입고도 끝까지 지휘를 이어가며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전투 직후 부상으로 순국하였다. 김시민은 냉정한 판단력과 탁월한 방어 전략으로 평가받으며, 임진왜란 최대의 방어전 승리 중 하나를 만든 장수로 기억된다.

생애

김시민은 충청남도 천안시 백전촌에서 고려의 김방경 가문을 계승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1578년 무과에 급제한 뒤 군기시에서 병기 관리와 군제 정비 업무를 담당하며 초기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583년 여진 세력의 침입 사건인 니탕개의난에 참여하여 실전 경험을 쌓았다. 1591년 진주판관으로 부임한 그는 지역 치안과 방어 태세를 정비하여 민심을 안정시켰으며, 이후 진주목사로 승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그는 진주성 방어 준비를 주도하고 병력과 의병을 모집하였다. 같은 해 10월 일본군의 대규모 공격이 시작되자 약 3,800명의 병력으로 성을 방어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전투 중 중상을 입고도 지휘를 계속했으며, 전투 직후 부상 악화로 사망하였다. 사후 그는 선무공신 2등에 책록되었고, 충무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김시민은 조선의 대표적인 방어전 영웅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