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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요 ==
 
== 개요 ==
김관오(金冠五, 1901년 3월 4일~1965년 1월 31일)는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군인, 정치인이다. 호는 우당(愚堂)이며, 서울 출신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을 지냈고, 한국광복군 소속 군인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일제강점기에는 한국독립당 충칭지구당부위원장,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위대 대장 등을 역임하며 무장 독립운동과 임시정부의 치안, 경호 업무를 담당하였다. 이러한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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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덕(崔用德, 1898년 9월 19일 ∼ 1969년 8월 15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군인, 정치인, 외교관이다. 본관은 경주. 아호는 창석.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제2대 공군참모총장, 1960년 6월 2일부터 1960년 8월 22일까지 체신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 생애 ==
 
== 생애 ==
김관오(金冠五, 1901년 3월 4일~1965년 1월 31일)는 한성부(現 서울특별시)에서 김현철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이 일찍 사망하고 형제들 또한 요절하여 할아버지 슬하에서 독자로 성장하였다.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선전물을 비밀리에 배포하였고, 같은 해 3월 23일 종로경찰서에 체포되어 고문을 당한 뒤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이송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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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부에서 태어나 중국으로 건너가 1916년 중국 육군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1920년 서왈보의 추천으로 중국 보정항공학교에 들어가 비행사가 되어 중국공군군관학교 교관, 수상비행대장, 공군기지사령관 등을 역임했다.1922년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하여 김상옥, 김시현 등의 의거를 지원하였다.1940년 중국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9월 광복군총사령부 총무처장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광복군 고급참모를 거쳐 1945년 광복 때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항공건설위원회 주임, 광복군 총사령부 참모장 등으로 활약하였다<br>
  
석방 후 평강의 친척집에 피신하였고, 1921년 10월 중화민국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이듬해인 1922년 윈난육군강무학교(雲南陸軍講武學校)에 입학해 군사 교육을 받았으며, 1924년 졸업 후 광동성 광저우 주둔 국민혁명군 제43군에서 장교로 복무하였다. 이후 국민혁명군 중앙훈련단 및 중국보병학교 고등군사반을 수료하며 군사 전문성을 쌓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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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22일 만주군 출신 귀순자인 박정희 등을 받아들였다. 1946년 귀국하여 항공건설협회 회장에 추대되었으며, 김정렬, 장덕창등과 함께 공군 창설을 위하여 노력하였다.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미군정은 최용덕과 조종사들의 중국군 복무 경력을 인정하지 않고 군에 입문하려면 미국식으로 다시 군사교육을 받고 소위로 임관하도록 요구하였다. 이에 조종사들은 크게 반발하지만 최용덕 장군은 오히려 그들을 설득하고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입교했다고 한다. <br>
  
1941년 한국독립당 충칭지구당 간부로 선임되었고, 같은 해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창립에 참여하여 고급 부관으로 활동하였다. 이어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위대를 조직하고 초대 경위대장에 취임하여 임시정부 청사와 요인들의 경호 업무를 담당하였다. 1942년에는 임시정부 선전위원 및 임시의정원 강원도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으며, 중국군사위원회의 ‘한국광복군 9개 행동 준승’ 취소를 요구하는 제의안 제출에도 참여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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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4월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입교하여 49세에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으며, 이후 초고속으로 승진하여 4개월만에 대위로 진급하고, 육군 항공기지부대의 제 2대 사령관으로 보임 되었다.<br>
  
이후 임시정부 내무부 경무과장(1943년)으로 임명되어 재외 동포 사회의 치안과 경찰 행정을 총괄하였고, 광복군 총사령부 고급참모 및 참모처 제2과장을 역임하는 등 광복군의 핵심 지휘부에서 활동하였다. 해방 직전에는 광복군 주항지대장으로서 항저우 일대에 있던 조선인 병사들을 광복군에 편입시켜 훈련을 담당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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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초대 국방부 차관에 임명되었다.그 뒤 공군 항공기지사령관, 공군사관학교 교장, 공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을 거쳐 1950년 6.25전쟁에 참전하였다<br>
  
광복 후인 1946년 4월 광복군 제2지대원들과 함께 귀국하였으며, 이후 백범 김구 산하에서 애국단을 조직하여 비밀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7년 국민의회 문교위원으로 활동하였고, 같은 해 대한의열당 창당에 참여해 부위원장 및 중앙상무위원을 역임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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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 이후 1952년 12월 1일부터 1954년 11월 19일까지 제2대 공군참모총장, 1960년 6월 2일부터 1960년 8월 22일까지는 체신부 장관을 지냈다.<br>
  
1948년 육군사관학교 특7기로 입교한 뒤 대한민국 국군에 정식 편입되어 군 복무를 계속하였고, 제21보병연대 연대장, 유격사령관, 노무사단장 등을 역임하며 한국전쟁 기간 공비 토벌 및 군수 지원 업무를 수행하였다. 1953년 준장으로 진급, 1954년 미8군 지원 공적을 인정받아 미국 자유훈장을 수훈하였으며, 1957년 예비역 소장으로 예편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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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가〉의 작사자이기도 하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br>
  
퇴역 후인 1963년, 일제강점기와 임시정부 및 광복군에서의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훈하였고, 독립동지회 상무위원장을 지냈다. 1965년 1월 31일 서울 자택에서 서거하였으며, 묘소는 이후 2002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2025년 12월 3일 (수) 17:29 판

김관오
金冠五

김관오.png

출생 1901년 3월 4일
한성부(現 서울특별시)
사망 1965년 1월 31일(향년 63세)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1가 35-9번지 자택
국적 대한민국
본관 삼척 김씨(三陟 金氏)
가족 아버지 김현철
배우자 방순희
학력 보성중학교
윈난강무학교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988호

개요

최용덕(崔用德, 1898년 9월 19일 ∼ 1969년 8월 15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군인, 정치인, 외교관이다. 본관은 경주. 아호는 창석.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제2대 공군참모총장, 1960년 6월 2일부터 1960년 8월 22일까지 체신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생애

한성부에서 태어나 중국으로 건너가 1916년 중국 육군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1920년 서왈보의 추천으로 중국 보정항공학교에 들어가 비행사가 되어 중국공군군관학교 교관, 수상비행대장, 공군기지사령관 등을 역임했다.1922년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하여 김상옥, 김시현 등의 의거를 지원하였다.1940년 중국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9월 광복군총사령부 총무처장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광복군 고급참모를 거쳐 1945년 광복 때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항공건설위원회 주임, 광복군 총사령부 참모장 등으로 활약하였다

1945년 8월 22일 만주군 출신 귀순자인 박정희 등을 받아들였다. 1946년 귀국하여 항공건설협회 회장에 추대되었으며, 김정렬, 장덕창등과 함께 공군 창설을 위하여 노력하였다.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미군정은 최용덕과 조종사들의 중국군 복무 경력을 인정하지 않고 군에 입문하려면 미국식으로 다시 군사교육을 받고 소위로 임관하도록 요구하였다. 이에 조종사들은 크게 반발하지만 최용덕 장군은 오히려 그들을 설득하고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입교했다고 한다.

1947년 4월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입교하여 49세에 육군 소위로 임관하였으며, 이후 초고속으로 승진하여 4개월만에 대위로 진급하고, 육군 항공기지부대의 제 2대 사령관으로 보임 되었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초대 국방부 차관에 임명되었다.그 뒤 공군 항공기지사령관, 공군사관학교 교장, 공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을 거쳐 1950년 6.25전쟁에 참전하였다

휴전 이후 1952년 12월 1일부터 1954년 11월 19일까지 제2대 공군참모총장, 1960년 6월 2일부터 1960년 8월 22일까지는 체신부 장관을 지냈다.

〈공군가〉의 작사자이기도 하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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