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육사(25-2)"의 두 판 사이의 차이

dh_edu
이동: 둘러보기, 검색
 
8번째 줄: 8번째 줄:
 
|본관 = 진성 이씨  
 
|본관 = 진성 이씨  
 
}}
 
}}
 +
 +
'''이육사'''(李陸史, 1904년 5월 18일 ~ 1944년 1월 16일)는 [[일제강점기]]의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이다. 본명은 '''이원록'''(李源祿)이며, '육사(陸史)'라는 필명은 대구형무소 수감 당시의 수인 번호 '''264번'''에서 유래하였다.
 +
 +
[[윤동주]]와 함께 일제강점기 말기를 대표하는 '''민족 저항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윤동주가 내면의 성찰과 부끄러움을 노래했다면, 이육사는 남성적이고 강인한 의지로 조국 광복에 대한 염원을 노래했다.
 +
 +
== 생애 ==
 +
=== 성장 배경 ===
 +
1904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퇴계 이황]]의 14대 손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보문의숙에서 신학문을 배웠고, 1925년 형과 함께 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
 +
=== 독립운동과 수감 생활 ===
 +
이육사는 생애 동안 총 17번이나 옥살이를 했다.
 +
* '''장진홍 의거''':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되어 첫 옥고를 치렀다. 이때 수인 번호 264번을 받아 호를 '육사'로 짓게 되었다.
 +
* '''군사 훈련''': 1932년 중국으로 건너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으로 입교하여 군사 훈련을 받았다. 이는 그가 단순한 문학인이 아니라 무장 투쟁을 꿈꾼 혁명가였음을 보여준다.
 +
 +
=== 문학 활동 ===
 +
1930년 조선일보에 시 〈말〉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이후 신문사 기자로 활동하며 《[[청포도]]》, 《[[광야]]》, 《[[절정]]》, 《교목》 등 주옥같은 시를 남겼다. 그의 시는 일제의 탄압이 극에 달한 시기에도 굴하지 않는 지조와 매운 절개를 상징한다.
 +
 +
== 최후 ==
 +
1943년 가을, 잠시 귀국했다가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다. 광복을 1년여 앞둔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일본 총영사관 감옥에서 40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
 +
== 작품 세계 ==
 +
그의 시는 강렬한 상징어와 남성적인 어조가 특징이다.
 +
* '''기다림과 희망''': 시 〈[[청포도]]〉에서는 '손님'이 오기를 기다리는 평화로운 조국의 모습을 그렸다.
 +
* '''강철 같은 의지''': 시 〈[[절정]]〉에서는 극한의 상황(겨울, 강철로 된 무지개)에서도 굴복하지 않는 정신을 역설적으로 표현했다.
 +
* '''미래에 대한 확신''': 시 〈[[광야]]〉에서는 까마득한 날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을 것이라며 조국 광복의 필연성을 노래했다.
 +
 +
== 주요 작품 ==
 +
* 《[[청포도]]》
 +
* 《[[광야]]》
 +
* 《[[절정]]》
 +
* 《교목》
 +
* 《꽃》

2025년 12월 2일 (화) 16:05 기준 최신판


이육사(李陸史, 1904년 5월 18일 ~ 1944년 1월 16일)는 일제강점기의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이다. 본명은 이원록(李源祿)이며, '육사(陸史)'라는 필명은 대구형무소 수감 당시의 수인 번호 264번에서 유래하였다.

윤동주와 함께 일제강점기 말기를 대표하는 민족 저항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윤동주가 내면의 성찰과 부끄러움을 노래했다면, 이육사는 남성적이고 강인한 의지로 조국 광복에 대한 염원을 노래했다.

생애

성장 배경

1904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퇴계 이황의 14대 손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보문의숙에서 신학문을 배웠고, 1925년 형과 함께 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독립운동과 수감 생활

이육사는 생애 동안 총 17번이나 옥살이를 했다.

  • 장진홍 의거: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되어 첫 옥고를 치렀다. 이때 수인 번호 264번을 받아 호를 '육사'로 짓게 되었다.
  • 군사 훈련: 1932년 중국으로 건너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으로 입교하여 군사 훈련을 받았다. 이는 그가 단순한 문학인이 아니라 무장 투쟁을 꿈꾼 혁명가였음을 보여준다.

문학 활동

1930년 조선일보에 시 〈말〉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이후 신문사 기자로 활동하며 《청포도》, 《광야》, 《절정》, 《교목》 등 주옥같은 시를 남겼다. 그의 시는 일제의 탄압이 극에 달한 시기에도 굴하지 않는 지조와 매운 절개를 상징한다.

최후

1943년 가을, 잠시 귀국했다가 동대문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다. 광복을 1년여 앞둔 1944년 1월 16일, 베이징 일본 총영사관 감옥에서 40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작품 세계

그의 시는 강렬한 상징어와 남성적인 어조가 특징이다.

  • 기다림과 희망: 시 〈청포도〉에서는 '손님'이 오기를 기다리는 평화로운 조국의 모습을 그렸다.
  • 강철 같은 의지: 시 〈절정〉에서는 극한의 상황(겨울, 강철로 된 무지개)에서도 굴복하지 않는 정신을 역설적으로 표현했다.
  • 미래에 대한 확신: 시 〈광야〉에서는 까마득한 날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을 것이라며 조국 광복의 필연성을 노래했다.

주요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