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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편찬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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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각방당상) : 박건, 최유원, 정광적, 신식, 이수광, 박이장, 박진원, 정사호, 구의강, 이성, 김시헌, 김상준, 김권, 최관, 이경함, 남근, 이시발, 한덕원, 이필영, 유공량, 이정신, 강홍립, 강첨, 유인길 등 24인<br/>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각방당상) : 박건, 최유원, 정광적, 신식, 이수광, 박이장, 박진원, 정사호, 구의강, 이성, 김시헌, 김상준, 김권, 최관, 이경함, 남근, 이시발, 한덕원, 이필영, 유공량, 이정신, 강홍립, 강첨, 유인길 등 24인<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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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수관(編修官) : 윤효전 등 48인<br/>
 
편수관(編修官) : 윤효전 등 48인<br/>
 
기주관(記注官) : 김유 등 52인<br/>
 
기주관(記注官) : 김유 등 52인<br/>

2025년 12월 2일 (화) 15:00 판

목차

선조실록

조선 전기 제14대 왕 선조의 재위 기간 동안의 국정 전반에 관한 역사를 다룬 실록

서지사항

『선조실록』은 1567년(선조 즉위) 7월부터 1608년(선조 41) 1월까지, 약 40년 7개월 동안의 국정 전반을 기록한 역사서이다. 총 221권 116책으로 구성된 인본(印本)이며, 1609년(광해군 1) 7월에 편찬 작업이 시작되어 1617년(광해군 9)에 완성되었다.

편찬 초기에는 이항복(李恒福)이 총재관(摠裁官)을 맡아 실록 편찬을 총괄하였으나, 계축옥사 전후의 정치 상황 변화로 인해 이후에는 이이첨(李爾瞻), 기자헌(奇自獻) 등이 편찬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사론(史論)에 정치적 왜곡이 다수 포함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고, 이후 실록은 여러 차례의 수정 과정을 거쳐 정비되었다.

『선조실록』 편찬의 지체 배경

『선조실록』은 1609년(광해군 1) 7월 편찬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1617년(광해군 9)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완성되었다. 전체 편찬 기간이 8년에 달한 것은 단순한 사업 규모 때문이 아니라, 임진왜란으로 인한 사료의 대대적 소실과 광해군대 정치 상황의 불안정이라는 두 가지 요인이 중첩되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으로 인한 사료 소실과 1차 자료 수습의 어려움

편찬이 늦어진 가장 큰 원인은, 선조대의 실록 편찬을 위한 기반자료 즉, 사초(史草)와 각종 사책(史冊)—이 임진왜란 과정에서 거의 전부 소실되었다는 데 있었다. 정사 편찬의 기초가 되는 사관(史官)의 사초는 물론이고, 역대 홍문관(弘文館)에 보관하던 여러 서적과 춘추관에 비치된 각조실록(各朝實錄)까지도 전란 속에서 불에 타 없어졌다. 특히 전조(前朝) 사초, 즉 『고려사』 편찬 과정에서 작성된 초고(草稿)까지 소실된 사실은 사료 상황의 심각성을 보여준다.

더불어 『승정원일기』는 한 권도 남지 않고 모두 불타버렸으며, 내외 창고나 각 관서(各官署)에서 관리하던 문서들도 전란 중 도난과 화재로 전부 손실되었다. 이는 곧 실록 편찬의 가장 핵심적인 1차 사료가 사실상 ‘0’ 상태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1595년(선조 28) 2월 15일, 경연관 정경세(鄭經世)의 건의로 춘추관은 전란 이전의 사관들에게 기억을 기록하여 제출하도록 명했고, 동시에 당시까지 남아 있던 조보(朝報), 정목(政目), 개인의 일기, 야사(野史) 등을 수집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가 얼마나 실효성 있게 이루어졌는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실제로 이후에도 조정은 꾸준히 자료 수집을 시도해야 했다.

1609년에도 조정은 유희춘의 『미암일기』, 유조인의 『행조일기』 등 개인이 소장한 일록(家藏日錄)부터, 배삼익.이기.이수준 등의 집에 흩어져 있던 조보의 단간(斷簡), 그리고 사대부 문집 속에 포함된 소(疏), 차(箚), 비명(碑銘) 등 각종 기록을 적극적으로 모아야 했다. 즉, 『선조실록』 편찬은 기존 정사 편찬과 달리 전란으로 파괴된 사료의 ‘복원’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광해군대의 정치적 불안정과 무옥(誣獄)에 따른 편찬 주체의 잦은 교체

편찬 지체의 두 번째 원인은 광해군대의 불안한 정국 운영과 잇따른 무옥(誣獄) 때문이다. 실록 편찬을 주도하던 중심 인물들이 정치 사건에 휘말려 좌천·파직·유배되는 일이 반복되면서, 편찬 과정 전체가 지속적으로 흔들렸다.

초기 편찬 체제에서 총재관(摠裁官)은 이항복(李恒福)이었고, 이정귀(李廷龜)가 1611년 대제학에 오르면서 신흠(申欽)도 합류하여 편찬의 주축을 이루었다. 즉, 편찬의 1차 진용은 이항복–이정귀–신흠의 삼각 구도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광해군 5년, 김제남의 옥사가 발생하면서 이항복은 인재를 잘못 천거했다는 책임을 지고 중추부로 좌천되었다. 이어 광해군 9년 인목대비의 서궁(西宮) 유폐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함경도 북청에 유배되었고, 광해군 10년에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이정귀와 신흠 역시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박응서 사건과 김제남 옥사에 잇따라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주요 편찬 인력이 모두 탈락하면서, 편찬 책임은 이후 이이첨(李爾瞻)과 기자헌(奇自獻) 등의 손으로 넘어갔다. 이는 실록 편찬의 연속성이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는 구조적 요인이었다.

『선조실록』편찬인원

정국이 요동치는 상황 속에서도 실록청은 방대한 인력을 투입해 편찬을 지속하였다. 편찬 인원 구성은 다음과 같다.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 총재관) : 기자헌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총재관) : 이항복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도청당상) : 이호민, 유근, 이이첨, 이정구, 박홍구, 조정, 민몽룡, 정창연, 이상의, 윤방, 윤승길, 김신원, 박승종, 이시언, 김상용, 오억령, 송순 등 17인

또한 보조적·집필적 역할을 맡은 직원도 광범위했다.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각방당상) : 박건, 최유원, 정광적, 신식, 이수광, 박이장, 박진원, 정사호, 구의강, 이성, 김시헌, 김상준, 김권, 최관, 이경함, 남근, 이시발, 한덕원, 이필영, 유공량, 이정신, 강홍립, 강첨, 유인길 등 24인
편수관(編修官) : 윤효전 등 48인
기주관(記注官) : 김유 등 52인
기사관(記事官) : 송일 등 81인

이처럼 편찬관·주석관.기사관 등으로 구성된 방대한 조직은, 소실된 사료를 복원해야 했던 특성상 필요했던 것이며, 동시에 광해군대의 빈번한 인사 개편 속에서도 편찬을 지속하기 위한 체제였다.

내용

실록의 정식 명칭은 선조소경대왕실록(宣祖昭敬大王實錄)이다.

1567년 7월부터 1608년 1월까지 선조 재위 40년 7개월간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조선왕조실록으로, 1609년(광해군 1년) 7월부터 편찬하기 시작하여 다음 해 11월에 완성하였다.

총 221권 116책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나,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이후의 기록이 대부분이고 그전의 기록은 25권 12책에 불과하다. 즉, 1567년부터 1591년까지 약 25년간의 재위 기록이 임진왜란 이후 선조 사망까지 16년간의 재위 기록의 1/10 수준이다. 이는 임진왜란 이전에 작성된 사초들과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등이 왜란의 전화에 홀랑 날아갔기 때문이다. 그래도 선조 재위 초기의 자료들을 어떻게든 기록하려고 사대부들의 일기와 지방에 보관되어있던 조보(朝報)들을 악착같이 뒤져서 겨우겨우 기록한 것이 이 수준이다.

단적으로, 선조 재위 기간에 관측된 두 초신성인 SN 1572와 SN 1604의 기록을 비교해 볼 때 SN 1572는 기록이 아예 없지만(선조수정실록에는 딱 한 줄 기록되어 있다.) 케플러의 초신성이라고도 불리는 SN 1604는 매우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요하네스 케플러가 남긴 기록보다도 더 상세할 정도이다. SN 1604를 관측한 기록이 130회가량 남아 있으며 이 기록은 이 초신성이 Ia형 초신성임을 알아내는 데 상당한 공헌을 했다. 당시 조선에서는 이 초신성 폭발을 하늘의 경고라고 여겨 몹시 불길하게 여겼다. SN 1604의 최초 관측 기록은 10월 9일 이탈리아에서의 관측이며, 이튿날인 10월 10일에는 명나라에서 관측되었고, 그로부터 사흘 후인 10월 13일에는 조선에서 관측되었으며, 10월 17일에는 프라하에서 케플러에 의해 관측이 이루어졌다.

이에 대해 선조실록에서는 일본군의 방화로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선조수정실록에서는 당시 사관 네 명이 사초를 불에 태우고 튀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관 조존세, 김선여, 임취정, 박정현 등이 도망하였다. 존세 등은 좌우 사관으로서 처음부터 호종하면서 침문을 떠나지 않았으므로 상이 자제처럼 대우하였다. 이날 밤 네 사람은 상이 요동으로 건너갈 것을 의논하여 결정하자 도망칠 것을 몰래 의논하고는 먼저 사초책을 구덩이에 넣고 불을 지른 뒤 어둠을 타고 도망하였다. 상이 길에서 자주 돌아보며 사관은 어디 있느냐고 물었는데 모두 보지 못하였다고 대답하자, 상이 이르기를, "김선여가 탄 말이 허약한데 걸어서 오느라 뒤에 처졌는가" 하였다. 새벽이 되어서야 그들이 도망한 것을 알고는 사색이 참담하였다. 따르는 자들이 모두 격분하며 매도하기를 '뒷날 상이 환국하시면 이 무리들이 어떻게 살아나겠는가' 하였다. 네 사람이 각각 영남과 호남 사이에서 가족을 찾았는데 주현에서 먹을 것을 구하며 핑계대기를 '상이 물러가라고 허락하였기 때문에 왔다'고 하였다.
<<선조수정실록>> 25년 6월 1일[1]

훗날 1641년(인조 19년)에 기존의 선조실록이 잘못된 점이 많다고[2] 하여 인조가 이식에게 명하여 선조실록을 개수하게 하였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흐지부지되다가 1657년(효종 8년)에 선조수정실록과 선조대왕실록수정청의궤를 최종 완성하였다. 선조수정실록은 기존에 편찬된 실록을 개수한 최초의 사례이다.

역사적 의의

『선조실록』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이후 16년간의 기록이 대부분이고 그 이전은 소략하다. 즉, 『선조실록』 전체 221권 중에 선조 즉위년 7월부터 선조 25년 3월까지의 기사는 26권에 불과한 반면, 임진왜란 이후 16년간의 기사는 195권이다.

『선조실록』은 기사가 조잡하고 당파 관계로 공정한 입장을 견지하지 못한 부분이 많다. 따라서 역대 실록 가운데 가장 질이 떨어진다는 평을 면치 못한다. 특히 서인 이이(李珥) · 성혼(成渾) · 박순(朴淳) · 정철(鄭澈) 및 남인 유성룡(柳成龍) 등에 대해 없는 사실을 꾸며 비방하는가 하면, 이산해(李山海) · 이이첨 등 북인 일파에 대해서는 지나친 칭찬을 하여 시비 및 선악이 많이 전도되었다. 따라서 인조반정 후 『선조실록』을 수정하자는 의견이 대두되어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을 편찬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