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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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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71173&cid=46622&categoryId=46622 황중윤]은 조선 후기에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5702 사서],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o300420 사헌부지평],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6522 동부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그의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도광(道光). 황연(黃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황응징(黃應澄)이고, 아버지는 공조참의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5242 황여일(黃汝一)]이다. 어머니는 김수일(金守一)의 딸이며, 부인은 박성(朴惺)의 딸이다.<br/>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71173&cid=46622&categoryId=46622 황중윤]은 조선 후기에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5702 사서],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o300420 사헌부지평],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6522 동부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그의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도광(道光). 황연(黃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황응징(黃應澄)이고, 아버지는 공조참의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65242 황여일(黃汝一)]이다. 어머니는 김수일(金守一)의 딸이며, 부인은 박성(朴惺)의 딸이다.<br/>
생원으로 1612년([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5335 광해군] 4)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정언 · 헌납 · 낭청 · 사서 등의 관직을 지냈다. 1616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2639 신경희(申景禧)]의 옥사에 연루되어 추고당하였고, 1618년 다시 사서에 기용되었다. 이 해 명나라에서 요동순무를 위해 병마 7,000을 요청해 왔고, 조정에서 징병에 관한 의논이 있을 때 징병에 반대하는 의견을 개진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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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중윤은 1577년 5월 7일 유시(酉時) 안동 천전리(川前里)에 있던 외가에서 부친 황여일(黃汝一, 1556∼1622)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평해 황씨는 황락(黃洛)을 시조로 하는데, 후한 때 강하(江夏)에 살다가 우리나라로 건너와 평해현에 정착하였다. 고려시대 황유중(黃裕中)은 문하시중을 지냈고, 그의 아들 황서(黃瑞)는 첨의평리(僉議評理)를 지냈다. 이로부터 7대를 내려와 생원시에 합격한 황보곤(黃輔坤)이 황중윤의 고조이다. 증조 황우(黃瑀)는 성주 목사를 지냈고, 조부 황응징(黃應澄)은 효성으로 장례원 판결사에 추증되었다. 부친 황여일은 1576년 진사가 되고, 1585년 문과에 급제하여 길주 목사 등을 지냈다. 모친은 김수일(金守一)의 딸이자 김성일(金誠一)의 질녀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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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중윤은 7세 때부터 조부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한 번 들으면 잊지 않아, 조부가 “우리 집안의 글을 끊어지지 않게 할 사람은 반드시 이 아이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황중윤은 부지런히 독서하여 12∼13세 때 사서삼경을 모두 읽고 문장이 크게 진취하였다. 황중윤은 23세 때인 1599년 사마시에 응시했다가 낙방하였는데, 모친상을 마친 뒤 1604년 사마시 초시에 합격하였고, 1605년 봄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여 문명을 떨쳤다. 황중윤은 1612년([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5335 광해군] 4) 9월 증광시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정언 · 헌납 · 낭청 · 사서 등의 관직을 지냈다. 이때 계암(溪巖) 김령(金坽), 동주(東洲) 이민구(李敏求)도 함께 급제하였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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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6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2639 신경희(申景禧)]의 옥사에 연루되어 추고당하였고, 1618년 다시 사서에 기용되었다. 이 해 명나라에서 요동순무를 위해 병마 7,000을 요청해 왔고, 조정에서 징병에 관한 의논이 있을 때 징병에 반대하는 의견을 개진하였다.<br/>
 
이어 병조좌랑에 올랐으나 입직하다가 교대를 기다리지 않고 나간 것이 문제가 되어 체직되었으며, 이듬해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어 무과시험시 관원들이 뇌물을 받은 것을 고발하였다. 1620년 주문사(奏聞使)로 임명되어 표문(表文)을 가지고 연경에 다녀온 뒤 동부승지 · 우부승지 · 좌부승지를 거쳐 승지에 올라 왕의 측근에서 업무를 수행하였다.<br/>
 
이어 병조좌랑에 올랐으나 입직하다가 교대를 기다리지 않고 나간 것이 문제가 되어 체직되었으며, 이듬해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어 무과시험시 관원들이 뇌물을 받은 것을 고발하였다. 1620년 주문사(奏聞使)로 임명되어 표문(表文)을 가지고 연경에 다녀온 뒤 동부승지 · 우부승지 · 좌부승지를 거쳐 승지에 올라 왕의 측근에서 업무를 수행하였다.<br/>
1623 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정권이 교체되자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5559 이이첨(李爾瞻)]의 복심이 되어 광해군의 뜻에 영합하였고, 중국과의 외교를 단절하고 오랑캐와의 통호를 주장하였다는 죄목으로 양사의 탄핵을 받아 변방에 위리안치되었다. 이어 이듬해 내지로 양이(量移)되었고, 1633년 유배에서 풀려나 시골로 돌아갔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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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황중윤은 광해군 조정에 봉사하면서도 대북정권의 핵심 세력과 뜻이 맞지 않았는데, 1623년 3월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정권이 교체되자 황중윤이[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5559 이이첨(李爾瞻)]의 복심이 되어 광해군의 뜻에 영합해 명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여진족과 화친하자는 주장을 했다(중국과의 외교를 단절하고 오랑캐와의 통호를 주장하였다)는 이유로 양사의 탄핵을 받아 변방에 안치되었다. 이어 이듬해 내지로 양이(量移)되었고, 해남과 서산에서 오랜 유배 생활 끝에 1633년 특명으로 풀려나서 부친의 유지(遺志)를 따라 월야동(月夜洞)으로 들어가 수월당(水月堂)을 짓고 은거하였다. 1637년에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서쪽을 향해 통곡하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거처를 정하지 않고 산사를 돌아다니기도 하고 두메산골 마을을 돌아다니기도 하며 살았다. 이후로 황중윤은 산속에서 세상사를 잊고 지내다가 1648년 3월 29일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72세였다.
  
 
==참고문헌==
 
==참고문헌==

2025년 11월 27일 (목) 19:51 판

소개

황중윤은 조선 후기에 사서, 사헌부지평, 동부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그의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도광(道光). 황연(黃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황응징(黃應澄)이고, 아버지는 공조참의 황여일(黃汝一)이다. 어머니는 김수일(金守一)의 딸이며, 부인은 박성(朴惺)의 딸이다.
황중윤은 1577년 5월 7일 유시(酉時) 안동 천전리(川前里)에 있던 외가에서 부친 황여일(黃汝一, 1556∼1622)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평해 황씨는 황락(黃洛)을 시조로 하는데, 후한 때 강하(江夏)에 살다가 우리나라로 건너와 평해현에 정착하였다. 고려시대 황유중(黃裕中)은 문하시중을 지냈고, 그의 아들 황서(黃瑞)는 첨의평리(僉議評理)를 지냈다. 이로부터 7대를 내려와 생원시에 합격한 황보곤(黃輔坤)이 황중윤의 고조이다. 증조 황우(黃瑀)는 성주 목사를 지냈고, 조부 황응징(黃應澄)은 효성으로 장례원 판결사에 추증되었다. 부친 황여일은 1576년 진사가 되고, 1585년 문과에 급제하여 길주 목사 등을 지냈다. 모친은 김수일(金守一)의 딸이자 김성일(金誠一)의 질녀이다.
황중윤은 7세 때부터 조부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한 번 들으면 잊지 않아, 조부가 “우리 집안의 글을 끊어지지 않게 할 사람은 반드시 이 아이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황중윤은 부지런히 독서하여 12∼13세 때 사서삼경을 모두 읽고 문장이 크게 진취하였다. 황중윤은 23세 때인 1599년 사마시에 응시했다가 낙방하였는데, 모친상을 마친 뒤 1604년 사마시 초시에 합격하였고, 1605년 봄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여 문명을 떨쳤다. 황중윤은 1612년(광해군 4) 9월 증광시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정언 · 헌납 · 낭청 · 사서 등의 관직을 지냈다. 이때 계암(溪巖) 김령(金坽), 동주(東洲) 이민구(李敏求)도 함께 급제하였다.
1616년 신경희(申景禧)의 옥사에 연루되어 추고당하였고, 1618년 다시 사서에 기용되었다. 이 해 명나라에서 요동순무를 위해 병마 7,000을 요청해 왔고, 조정에서 징병에 관한 의논이 있을 때 징병에 반대하는 의견을 개진하였다.
이어 병조좌랑에 올랐으나 입직하다가 교대를 기다리지 않고 나간 것이 문제가 되어 체직되었으며, 이듬해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어 무과시험시 관원들이 뇌물을 받은 것을 고발하였다. 1620년 주문사(奏聞使)로 임명되어 표문(表文)을 가지고 연경에 다녀온 뒤 동부승지 · 우부승지 · 좌부승지를 거쳐 승지에 올라 왕의 측근에서 업무를 수행하였다.
이후 황중윤은 광해군 조정에 봉사하면서도 대북정권의 핵심 세력과 뜻이 맞지 않았는데, 1623년 3월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정권이 교체되자 황중윤이이이첨(李爾瞻)의 복심이 되어 광해군의 뜻에 영합해 명나라와의 관계를 끊고 여진족과 화친하자는 주장을 했다(중국과의 외교를 단절하고 오랑캐와의 통호를 주장하였다)는 이유로 양사의 탄핵을 받아 변방에 안치되었다. 이어 이듬해 내지로 양이(量移)되었고, 해남과 서산에서 오랜 유배 생활 끝에 1633년 특명으로 풀려나서 부친의 유지(遺志)를 따라 월야동(月夜洞)으로 들어가 수월당(水月堂)을 짓고 은거하였다. 1637년에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서쪽을 향해 통곡하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거처를 정하지 않고 산사를 돌아다니기도 하고 두메산골 마을을 돌아다니기도 하며 살았다. 이후로 황중윤은 산속에서 세상사를 잊고 지내다가 1648년 3월 29일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72세였다.

참고문헌

1)<동명선생문집>
2)<서정일록>
3)스토리테마파크
4)네이버 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