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좌도 병마절도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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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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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선조 25) <ins>'''임진왜란'''</ins>이 발발하자 병마절도사 이각(李珏)은 '''울산군수''' 이언함(李彦諴)을 좌위장으로 삼고 동래를 구원하러 갔으나 왜적의 세력을 보고는 도망가고 말았다. 좌병영으로 돌아온 이각은 도망을 거듭하다가 임진강 변에서 체포되어 군율에 따라 주살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1599년(선조 32) 병마절도사 겸 '''울산도호부사''' '''곽재우(郭再祐)'''는 왜군이 축조한 '''도산성(島山城)'''을 활용하자는 장계를 올려 거부되자 사직서를 올리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1862년(철종 13) 병마절도사 정주응(鄭周應)은 미(米)와 두(豆) 각 2,000석(石)을 자본으로 하여 환곡(還穀)을 운영하다가 농민 항쟁을 유발하였다. 정주응은 농민들이 병영으로 몰려오자 무력 진압하여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이후 처벌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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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선조 25) <ins>'''임진왜란'''</ins>이 발발하자 병마절도사 이각(李珏)은 <ins>'''울산군수'''</ins> 이언함(李彦諴)을 좌위장으로 삼고 동래를 구원하러 갔으나 왜적의 세력을 보고는 도망가고 말았다. 좌병영으로 돌아온 이각은 도망을 거듭하다가 임진강 변에서 체포되어 군율에 따라 주살되었다. <ins>'''임진왜란'''</ins>이 끝난 후 1599년(선조 32) 병마절도사 겸 <ins>'''울산도호부사'''</ins> <ins>'''곽재우(郭再祐)'''</ins>는 왜군이 축조한 <ins>'''도산성(島山城)'''</ins>을 활용하자는 장계를 올려 거부되자 사직서를 올리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1862년(철종 13) 병마절도사 정주응(鄭周應)은 미(米)와 두(豆) 각 2,000석(石)을 자본으로 하여 환곡(還穀)을 운영하다가 농민 항쟁을 유발하였다. 정주응은 농민들이 병영으로 몰려오자 무력 진압하여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이후 처벌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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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정 경위 및 목적 <br/>
 
2. 제정 경위 및 목적 <br/>
1417년(태종 17) 경주에 있던 경상좌도병마도절제사의 본영인 '''경상좌병영'''이 울산으로 옮겨 오면서 울산에 경상좌도병마절제사가 부임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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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7년(태종 17) 경주에 있던 경상좌도병마도절제사의 본영인 <ins>'''경상좌병영'''</ins>이 울산으로 옮겨 오면서 울산에 경상좌도병마절제사가 부임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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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담당직무 <br/>
 
3. 담당직무 <br/>
ㄱ. 종2품으로 종3품 우후(虞侯)를 거느리고, 병마절도사는 예하에 경주.안동.대구 등 '''거진(巨鎭) 3개소'''와 거진 아래의 '''진(鎭) 22개소'''를 관할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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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종2품으로 종3품 우후(虞侯)를 거느리고, 병마절도사는 예하에 경주.안동.대구 등 <ins>'''거진(巨鎭) 3개소'''</ins>와 거진 아래의 <ins>'''진(鎭) 22개소'''</ins>를 관할 <br/>
ㄴ. 1437년(세종 19) 정월에 울산이 군에서 도호부로 승격하였을 때 경상좌도병마절제사가 '''울산도호부사'''를 겸함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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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1437년(세종 19) 정월에 울산이 군에서 도호부로 승격하였을 때 경상좌도병마절제사가 <ins>'''울산도호부사'''</ins>를 겸함 <br/>
ㄷ. 울산도호부가 울산군으로 환원되면서 군수가 파견되어 병마도절제사는 '''경상좌도병마도절제사영'''의 업무를 전담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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ㄷ. 울산도호부가 울산군으로 환원되면서 군수가 파견되어 병마도절제사는 <ins>'''경상좌도병마도절제사영'''</ins>의 업무를 전담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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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변천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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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1월 26일 (수) 17:18 판

경상좌도 병마절도사는 조선시대 울산 지역에 설치된 경상좌도의 육군을 통솔한 종2품의 무관 벼슬에 해당

목차

  1. 개설
  2. 제정 경위 및 목적
  3. 담당 직무
  4. 변천
  5. 의의와 평가


1. 개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병마절도사 이각(李珏)은 울산군수 이언함(李彦諴)을 좌위장으로 삼고 동래를 구원하러 갔으나 왜적의 세력을 보고는 도망가고 말았다. 좌병영으로 돌아온 이각은 도망을 거듭하다가 임진강 변에서 체포되어 군율에 따라 주살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1599년(선조 32) 병마절도사 겸 울산도호부사 곽재우(郭再祐)는 왜군이 축조한 도산성(島山城)을 활용하자는 장계를 올려 거부되자 사직서를 올리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1862년(철종 13) 병마절도사 정주응(鄭周應)은 미(米)와 두(豆) 각 2,000석(石)을 자본으로 하여 환곡(還穀)을 운영하다가 농민 항쟁을 유발하였다. 정주응은 농민들이 병영으로 몰려오자 무력 진압하여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이후 처벌되었다.

2. 제정 경위 및 목적
1417년(태종 17) 경주에 있던 경상좌도병마도절제사의 본영인 경상좌병영이 울산으로 옮겨 오면서 울산에 경상좌도병마절제사가 부임

3. 담당직무
ㄱ. 종2품으로 종3품 우후(虞侯)를 거느리고, 병마절도사는 예하에 경주.안동.대구 등 거진(巨鎭) 3개소와 거진 아래의 진(鎭) 22개소를 관할
ㄴ. 1437년(세종 19) 정월에 울산이 군에서 도호부로 승격하였을 때 경상좌도병마절제사가 울산도호부사를 겸함
ㄷ. 울산도호부가 울산군으로 환원되면서 군수가 파견되어 병마도절제사는 경상좌도병마도절제사영의 업무를 전담

4. 변천
1416년(태종 16): 경주 안동도 병마도절제사 권만(權蔓)이 경상좌도병마절제사로 처음 임명
1417년(태종 17): 경상좌도병마사의 본영을 경주에서 울산으로 옮김
1466년(세조 12): 관제 개혁으로 병마도절제사는 병마절도사로 변경되어 경상좌도병마절도사라는 명칭이 정착
1894년(갑오개혁): 병마절도사영이 폐지됨에 따라 경상좌도병마절도사도 폐지

5. 의의와 평가
경상좌도병마절도사는 조선 시대 경상좌도 방어를 책임지는 육군 지휘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