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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중국에서 | + | 중국에서 파견된 사신은 일반적으로 칙사(勅使)라 불렸으며, 이들은 황제의 조서(詔書)나 칙서(勅書), 또는 예부 자문(禮部咨文)이나 요동도사 자문(遼東都司咨文) 등을 지참하고 조선을 방문하였다. |
| − | 중국 | + | 이러한 중국 사신들의 주요 임무는 우선 중국 황실의 중대한 변동 사항을 통보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황제가 붕어하거나, 새 황제가 즉위하거나, 혹은 어린 황제가 성년이 되어 친정을 시작할 때,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 사신이 조선에 파견되었다. 또한 황태자나 황태후를 책봉하는 경우에도 황제의 조서를 전달하기 위해 조선에 사신을 보냈다. |
| − | 명나라 | + | 이와 더불어 조선과 관련된 사무를 수행하기 위한 방문도 있었다. 즉, 조선 국왕의 즉위를 승인하거나 왕세자와 왕후의 책봉을 인준하기 위한 황제의 명을 전달하기 위해 파견되었으며, 또한 조선 왕실 구성원에 대한 시호(諡號)나 고명(誥命)을 하달하기 위한 경우도 있었다. |
| + | 그 밖에도 표류인(漂流人)·도래인(渡來人)·월경인(越境人) 등의 송환 문제, 처녀 진헌, 물품 청구 등 다양한 사안으로 여러 형태의 사신이 조선을 방문하였다. | ||
| + | 중국 사신의 일행은 주로 상사(上使)와 부사(副使)를 중심으로, 그 아래에 서반(序班), 두목(頭目), 군관(軍官), 의원(醫員), 사자관(寫字官), 주자(廚子)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 중 서반은 통역을 담당하였고, 두목은 물품 운반 및 관리를 맡았는데, 두목들은 대부분 북경이나 요동 지역의 상인들이었다. | ||
| + | 이들은 조선에 입국하면 조선 상인들과 활발히 교역하였으며, 이러한 비공식적인 무역 활동은 조선의 산업과 상업 발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 ||
| + | 명나라 시기에는 임진왜란 이전까지 사신의 방문이 빈번하였으나, 인조반정과 정묘호란 이후로는 그 횟수가 점차 줄어들었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명나라 대신 청나라 사신들이 조선을 방문하게 되어, 조청 관계가 새로운 외교 질서를 형성하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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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자료에 따르면 칙사가 파견된다는 통보를 받으면, 조정에서는 원접사(遠接使) 일행을 의주(義州)로 보[https://ko.wikipedia.org/wiki/index.php 구황작물]내어 칙사의 입국을 환영하였다. 또한 의주에서 한양으로 향하는 길목의 다섯 곳에는 미리 선위사(宣慰使)를 파견하여 잔치를 베풀고 위로하는 예를 행하였다. | |
| + | 칙사가 벽제관(碧蹄館)에 도착하면 영접사(迎接使) 등이 나아가 맞이하였으며, 왕은 왕세자를 비롯한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모화루(慕華樓)에 거둥하여 ‘영칙의(迎勅儀)’의 절차에 따라 칙사를 영접하였다. | ||
| + | 이후 칙사를 경복궁으로 인도하여 황제의 칙서를 전달받고 다례(茶禮)를 행한 뒤, 태평관(太平館)에 머물게 하였다. 그 자리에서 하마연(下馬宴)을 베풀어 정중히 대접하였으며, 다음 날에는 왕세자, 종친부(宗親府), 의정부 및 육조(六曹) 등 각 기관에서 차례로 연회를 마련하였다. | ||
| + | 칙사가 귀국할 때에도 조정에서는 예에 따라 여러 차례 전연(餞宴)을 열어 후하게 전송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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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지는 남미 안데스 지역인 페루와 북부 볼리비아로 알려져 있으며, 예로부터 든든한 한 끼로도 손색이 없는 주식(主食)이며, 부식으로도 다양하게 이용되어 왔다. | 원산지는 남미 안데스 지역인 페루와 북부 볼리비아로 알려져 있으며, 예로부터 든든한 한 끼로도 손색이 없는 주식(主食)이며, 부식으로도 다양하게 이용되어 왔다. | ||
2025년 11월 21일 (금) 18:54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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칙사 접대 절차
중국에서 파견된 사신은 일반적으로 칙사(勅使)라 불렸으며, 이들은 황제의 조서(詔書)나 칙서(勅書), 또는 예부 자문(禮部咨文)이나 요동도사 자문(遼東都司咨文) 등을 지참하고 조선을 방문하였다. 이러한 중국 사신들의 주요 임무는 우선 중국 황실의 중대한 변동 사항을 통보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황제가 붕어하거나, 새 황제가 즉위하거나, 혹은 어린 황제가 성년이 되어 친정을 시작할 때,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 사신이 조선에 파견되었다. 또한 황태자나 황태후를 책봉하는 경우에도 황제의 조서를 전달하기 위해 조선에 사신을 보냈다. 이와 더불어 조선과 관련된 사무를 수행하기 위한 방문도 있었다. 즉, 조선 국왕의 즉위를 승인하거나 왕세자와 왕후의 책봉을 인준하기 위한 황제의 명을 전달하기 위해 파견되었으며, 또한 조선 왕실 구성원에 대한 시호(諡號)나 고명(誥命)을 하달하기 위한 경우도 있었다. 그 밖에도 표류인(漂流人)·도래인(渡來人)·월경인(越境人) 등의 송환 문제, 처녀 진헌, 물품 청구 등 다양한 사안으로 여러 형태의 사신이 조선을 방문하였다. 중국 사신의 일행은 주로 상사(上使)와 부사(副使)를 중심으로, 그 아래에 서반(序班), 두목(頭目), 군관(軍官), 의원(醫員), 사자관(寫字官), 주자(廚子)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 중 서반은 통역을 담당하였고, 두목은 물품 운반 및 관리를 맡았는데, 두목들은 대부분 북경이나 요동 지역의 상인들이었다. 이들은 조선에 입국하면 조선 상인들과 활발히 교역하였으며, 이러한 비공식적인 무역 활동은 조선의 산업과 상업 발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명나라 시기에는 임진왜란 이전까지 사신의 방문이 빈번하였으나, 인조반정과 정묘호란 이후로는 그 횟수가 점차 줄어들었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명나라 대신 청나라 사신들이 조선을 방문하게 되어, 조청 관계가 새로운 외교 질서를 형성하게 되었다.
자료에 따르면 칙사가 파견된다는 통보를 받으면, 조정에서는 원접사(遠接使) 일행을 의주(義州)로 보구황작물내어 칙사의 입국을 환영하였다. 또한 의주에서 한양으로 향하는 길목의 다섯 곳에는 미리 선위사(宣慰使)를 파견하여 잔치를 베풀고 위로하는 예를 행하였다. 칙사가 벽제관(碧蹄館)에 도착하면 영접사(迎接使) 등이 나아가 맞이하였으며, 왕은 왕세자를 비롯한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모화루(慕華樓)에 거둥하여 ‘영칙의(迎勅儀)’의 절차에 따라 칙사를 영접하였다. 이후 칙사를 경복궁으로 인도하여 황제의 칙서를 전달받고 다례(茶禮)를 행한 뒤, 태평관(太平館)에 머물게 하였다. 그 자리에서 하마연(下馬宴)을 베풀어 정중히 대접하였으며, 다음 날에는 왕세자, 종친부(宗親府), 의정부 및 육조(六曹) 등 각 기관에서 차례로 연회를 마련하였다. 칙사가 귀국할 때에도 조정에서는 예에 따라 여러 차례 전연(餞宴)을 열어 후하게 전송하였다.
원산지는 남미 안데스 지역인 페루와 북부 볼리비아로 알려져 있으며, 예로부터 든든한 한 끼로도 손색이 없는 주식(主食)이며, 부식으로도 다양하게 이용되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