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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1월 6일 (목) 02:52 판
목차
기획 의도
본 연구는 주요하게 황중윤을 중심으로 그와 관련된 인물들을 알아봄으로써 조선과 명의 관계에 대해 더욱 깊이 있게 분석하려고 한다.
조선과 명의 관계
배경
경제
조선은 명을 국제체계 내에 정치권위에 변동에 관한 결재권자로 인정함으로써 그로부터 군주권을 확정 받는 절차를 취하였다. 그렇게 책봉된 군주는 질서화 된 세계를 지향하는 천(天)의 의지의 대행자이며 의인화된 천(天)으로서의 중책을 부여받는다. 따라서 반정이라는 정치변혁을 통해 왕위에 오른 중종으로서는 명에게 책봉(冊封) 받는 일이 더욱 민감한 외교 사안이었다. 세자도 명나라 황제에게 책봉을 받아야했기 때문에 주청사를 연경에 보낸 것이었다.
한편, 세자 책봉이 조정에서 처음 논의 된 것은 1518년이다. 중종과 장경왕후의 장자였던 이호(李岵)는 1515년 2월 25일 생이었다. 그의 나이 4살 때부터 세자 책봉이 거론 되었던 것이다. 세자 책봉을 아뢴 것은 당시 동지사였던 남곤이었다. 남곤은 세자가 어린 나이지만 능히 세자의 자격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세자가 되면 시선(視膳, 왕세자가 아침저녁으로 임금의 수라상을 몸소 돌보는 것)·문안(問安)·입학(入學)의 예(禮)를 다해야 했다. 인종은 3살 때부터 글을 읽기 시작했고 시선과 문안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것이 남곤이 주장이었다. 하지만 임금은 책봉하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이고 정해진 법에 따라야 한다고 답한다.
이후 1520년 1월 17일, 세자 책봉 문제가 다시 거론된다. 당시 6살이던 이호를 세자로 책봉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중종은 선대왕들의 예처럼 8살, 적어도 7살에 책봉하는 것이 좋으며, 흉년이 들어 중국에 공을 바칠 수 없다는 이유까지 들면서 책봉을 꺼린다. 하지만 계속 된 대신들이 강경하게 세자 책봉을 간하여 중종은 결국 4월에 세자 책봉을 하기로 결정하게 된다.
1520년 4월 22일 중종과 장경왕후의 장자 이호(李岵)가 세자로 책봉되었다. 5월 4일은 세자 책봉 사실을 명나라에 추인받기 위하여 주청사를 보낸 날이었다. 조선시대 중국(명나라)과의 사이에 이루어진 주청의 내용을 보면, 중국 측의 항의에 의한 해명, 정치적 중대사건에 대한 보고, 고명(誥命)·인신(印信)의 수령 등과 같이 요청할 일이 주가 되고, 이 밖에 연호 사용, 내정간섭에 대한 항의, 왜정(倭情) 등의 보고, 인질(人質)·숙위(宿衛) 등의 파송, 혹은 궁정 간의 통혼문제 등에도 주청사가 파견되었다. 또한, 군사적인 면에 있어서도 청병·원병·파병 등에 관하여 양국 사이에 논의의 여지가 있을 때 주청사·진주사 등이 파견되었다. 사신의 구성원은 대개 정사·부사·서장관(書狀官, 종사관)·통사(通事)·의원(醫員)·사자관(寫字官, 서자관)·화원(畵員) 등을 중심으로 노자(奴子)까지 합쳐 40명이었으나, 후기 대청 사절로는 30명 내외가 되기도 하였다. 이들 사신이 중국에 머무를 수 있는 기간은 40일 정도였으며 뒤에는 약 60일이었다. 사행로는 초기에는 수로(水路)로 간 때도 있었으나 대개 육로로 서울-평양-의주-압록강-구련성(九連城, 진강성)-봉황성(鳳凰城)-성경(盛京, 심양)-산해관(山海關)-북경(北京)의 2,049리의 길을 택했다. 갔다가 돌아오는 데는 대개 28일이 소요되었다. 수로로는 육로 1,900리, 수로 3,760리로 총 5,660리였다.
인물
황중윤
정의
황중윤은 조선 후기에 사서, 사헌부지평, 동부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그의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도광(道光). 황연(黃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황응징(黃應澄)이고, 아버지는 공조참의 황여일(黃汝一)이다. 어머니는 김수일(金守一)의 딸이며, 부인은 박성(朴惺)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생원으로 1612년(광해군 4)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정언 · 헌납 · 낭청 · 사서 등의 관직을 지냈다. 1616년 신경희(申景禧)의 옥사에 연루되어 추고당하였고, 1618년 다시 사서에 기용되었다. 이 해 명나라에서 요동순무를 위해 병마 7,000을 요청해 왔고, 조정에서 징병에 관한 의논이 있을 때 징병에 반대하는 의견을 개진하였다.
이어 병조좌랑에 올랐으나 입직하다가 교대를 기다리지 않고 나간 것이 문제가 되어 체직되었으며, 이듬해 사헌부지평에 임명되어 무과시험시 관원들이 뇌물을 받은 것을 고발하였다. 1620년 주문사(奏聞使)로 임명되어 표문(表文)을 가지고 연경에 다녀온 뒤 동부승지 · 우부승지 · 좌부승지를 거쳐 승지에 올라 왕의 측근에서 업무를 수행하였다.
1623 년(인조 1) 인조반정으로 정권이 교체되자 이이첨(李爾瞻)의 복심이 되어 광해군의 뜻에 영합하였고, 중국과의 외교를 단절하고 오랑캐와의 통호를 주장하였다는 죄목으로 양사의 탄핵을 받아 변방에 위리안치되었다. 이어 이듬해 내지로 양이(量移)되었고, 1633년 유배에서 풀려나 시골로 돌아갔다.
⌜서정일록⌟
⌜서정일록(西征日錄)⌟은 황중윤(黃中允, 1577∼1648)의 문집인 ⌜동명문집(東溟文集)⌟에 수록된 일기이다. ⌜동명문집(東溟文集)⌟은 목판본 8권 5책으로, 1905년 황중윤의 8대손 황수보(黃洙甫) 등이 집안에 대대로 수장되어 온 유고 등을 수습하고 편차하였으며, 이중철(李中轍)의 발문을 받아 간행한 문집이다. ⌜서정일록⌟은 ⌜동명문집⌟권6 '잡저(雜著)' 부분에 총 132면으로 수록되어 있으며, 이 판본은 '한국역대문집총서' 등 많은 곳에 영인되어 실려있다.
⌜서정일록⌟은 황중윤이 1620년(광해군 12) 3월 26일 명나라 주문사(奏聞使)로 파견되어 도성을 출발할 때부터 8월 17일 귀환할 때까지 약 5개월간의 체험을 기록한 사신일기이다.
1612년(광해군 4) 황중윤은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 성균관 직강, 승지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1619년 조선이 후금을 공격하는 원병을 보냈다가 '심하(深河) 전투'에서 패하고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이 항복하여 조선과 명의 관계가 어려워졌던 시기에 황윤중이 연위사(延慰使) 등으로 임명되어 연이어 북경을 왕래하면서 외교적 현안을 해결하는 데 기여하였다.
황중윤은 광해군, 인조대의 정치적 격동기를 몸소 체험하였으며, 특히 외교술에 능했던 만큼 이 ⌜서정일록⌟은 17세기 초,중반 조선의 정치사와 국제관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왕소훈
정의
사르후 전투(萨尔浒之战) 기록 중 “都司王绍勋总管运输粮草辎重。”에서 알 수 있다싶이 “도사 왕소훈이 보급·군수 운송과 병참 물자 관리 책임자였다”
관계
-인삼이 없다고 예단을 받지 않은 요동 도사
1620년 5월 10일, 황중윤은 아침 일찍부터 요동을 떠날 준비를 하면서 도사 왕소훈(王紹勳)에게 인정으로 바칠 예단을 챙겼다.
쌀 3가마, 흰 명주 4필, 황모필(黃毛筆) 10자루, 먹을 받치는 그릇 10접시, 비옷 5벌, 활 2자루, 기름 먹인 부채 10자루, 흰 부채 10자루, 초도(鞘刀=칼집이 있는 작은 칼) 10자루, 평양에서 생산되는 은현도(隱現刀) 5자루, 꽃모양이 새겨진 벼루 2개, 화문석(花文席) 3장, 백지(白紙) 5묶음, 말린 노루 포 1마리로 예단을 챙겨 바쳤다. 그런데 왕 도사가 받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인삼이 없어서 서운해하는 듯하였다.
그렇게 시간을 지체하고 황중윤은 사하포를 향해 길을 나서는데, 군사들이 사청(射廳)에서 전차로 진법을 익히는 모습을 보았다. 진의 형세가 원형이나 방형을 만들어 철통과 흡사하였다. 창과 조총을 든 병사를 전차 안에 흩어서 세우니, 비록 철기병이 치고 들어오더라도 쉽지 않아서, 적을 막는 데 상책인 듯하다. 지난날 우리나라도 전차 십여 대를 처음 만들어 모화관(慕華館)에서 진법을 익혔는데, 제도가 맞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진법을 익히는 모습이 참으로 어린애 장난 같았다.
-배경
중국인들은 조선의 인삼을 가장 선호하였다.
인삼은 5~6세기부터 고구려와 백제의 주요 수출품이었고, 고려시대에는 송나라에 사신이 방문할 때 가져간 인삼이 1,000근이나 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더욱 중요한 수출품이 되었다. 명나라 초기에 조선은 금과 은 등을 조공으로 바쳐야 했으나, 세종대에 금과 은의 조공을 중단하고 그 대신 인삼을 조공하기도 했다. 명 말기부터 중국인들의 인삼수요는 더욱 커졌다. 조선은 사신단의 조공품목 뿐만 아니라 무역품목으로도 인삼을 가지고 갔는데, 경비가 떨어지면 인삼을 팔아서 비용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만큼 당시 조선의 인삼은 귀한 물품이었고, 명나라 사행단이 지나가는 곳의 중국 관리들은 의례히 예단을 받았는데 요동 도사 왕소훈이 예단을 돌려보낸 이유를 인삼이 없어서 서운해 한 것이라고 짐작할 만큼 중국에선 조선의 인삼을 선호했다.
중국에서 인삼의 수요가 또 다시 급증한 것은 청조 말기인데, 당시 아편중독에 인삼이 효과가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1841년 조선에서 수입하는 홍삼의 수출량은 2만 근이었는데, 1847년엔 2배인 4만 근까지 급증하기도 했다.
박지원
정의
박지원은 조선후기 한성부판관, 면천군수, 양양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이다. 그의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미중(美仲) 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 또는 연상(煙湘) · 열상외사(洌上外史). 할아버지는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박필균(朴弼均)이고, 아버지는 박사유(朴師愈)이며, 어머니는 함평이씨(咸平李氏) 이창원(李昌遠)의 딸이다.
관계
-박지원의 <호질>과 옥전현
황중윤이 남긴 서정일록엔 옥전현에 대한 서술이 마을의 유래 뿐이다. 그러나 그 이후 옥전을 거쳐간 연행사들의 연행록에는 이런 내용은 눈에 띠지 않는다. 박지원은 유명한 문학작품인 〈호질〉을 남겼다.
호질[虎叱]은 ≪연암집 燕巖集≫ 권12 별집(別集) ≪열하일기 熱河日記≫의 「관내정사(關內程史)」에 실려 있다. 「관내정사」에 의하면, 이 글은 연암이 북경으로 가는 도중 하룻밤 묵었던 옥전현(玉田縣)의 심유붕(沈由朋)의 점포 벽상에 걸려 있는 격자(格子)의 기문을 동행한 정진사와 함께 베껴온 글로서, 그 베낀 동기는 국내에 돌아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읽혀 배를 웅켜잡고 한바탕 웃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이 작품에는 원래 작자 성명과 제목이 없었으나, 근세 중국인이 비분하여 지은 작품인 것 같고, 글 중의 ‘虎叱’ 두 글자를 뽑아 제목으로 삼았다고 했다.
-배경
옥전현은 돌을 심어 옥을 얻었다는 전설이 있다.
1620년 5월 24일, 황중윤은 풍윤 다음의 역참인 옥전(玉田)에서 아침을 맞았다. 옥전 지현(玉田知縣) 이춘영(李春英)은 하남(河南) 장갈(長葛) 출신이다.
옥전이라는 지명은 이름만큼이나 아름다운 유래를 갖고 있다. 예전에 어떤 선인(仙人)이 이 현에 들렀다가 지독하게 가난한 한 객점의 주인을 만나게 되었다. 선인은 안타까워하며 돌 한 말을 주고 심으라고 하였다. 돌을 주면서 심으라고 하는 일이 의아하긴 했지만, 객점의 주인은 선인의 말대로 그 돌 한 말을 심었다. 그런데, 과연 심었던 돌에서 흰 구슬이 무수히 열려 객점의 주인은 드디어 부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 밭의 이름을 ‘종옥전(種玉田)’이라고 하고, 현의 이름으로도 삼았다고 한다. 지금도 옥을 심은 자리가 있다고 한다.
옥전을 지나 별산점(別山店)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 무렵 방균점(邦均店)에 도착했다.
홍명원
정의
홍명원(洪命元, 1573년~1623년)은 조선의 문신으로, 자는 낙부(樂夫), 호는 해봉(海峰).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관계
-사행날짜가 촉박하여 왕이 날을 미뤄주다.
1620년 3월 26일, 홍명원이 주청사로 명에 가자 명나라 만력제는 칙서와 함께 수만 냥의 백금(白金)을 하사하고, 사신을 보내도록 하였다. 그러나 홍명원은 혹여 중국 사신들이 조선의 내정을 살필 것을 우려해 사신을 막고자 조선의 사정이 좋지 않아 중국 사신을 맞이할 여력이 부족하다고 핑계를 대며 사신 행차를 정지해 달라고 청하였다. 이에 만력제는 홍명원의 말을 믿고 사신의 파견을 중지하고, 칙서와 하사금만 홍명원 편에 보냈다.
이 소식이 조정에 전해지자 3월 26일 사헌부와 비변사는 왕에게 명의 칙사를 막은 홍명원의 행동을 비난하며 급히 사신을 보내 홍명원의 말은 우리나라의 입장이 아니며 조선 조정에서도 이 기별을 듣고 놀라움에 허둥대며 실망하고 있으므로 다시 칙사를 보내 달라는 청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아뢰었다.
경신년(1620) 3월 29일 왕은 홍명원이 명을 벗어나기 전에 도착할 수 있게 사신을 보낼 것을 결정하고 비변사와 승문원으로 하여금 수일 안에 사신을 발송할 길일을 급히 택일하라 했다.
4월 1일 명나라로 가는 주문사(奏聞使)에 황중윤이 차출되었는데, 비변사는 황중윤이 명으로 출발할 날짜를 7일로 정하고 재촉했다. 그러나 왕은 날이 너무 촉박하니 연행(燕行) 가는 날짜를 미루라 하여 11일로 정하였다.
황중윤은 11일에 입궐하여 연경으로 가는 것을 고하며 하직(下直)하였다. 그러나 담당관청에서 인정(人情)과 여비 등의 물자를 지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15일로 날을 미루었다.
-배경
광해군 연간은 국제관계에 있어 조선을 끌어들여 후금공략에 활용하려는 명의 이이 제이 정책(以夷制夷政策)으로 광해군대 조선의 대명관계는 국왕 광해군의 책봉문제와 정치적 갈등, 국경무역을 비롯한 경제적 갈등 등으로 분석할 수 있으며, 명의 대후금 출병을 둘러싸고 명과의 갈등, 심하(深河)전투의 패전과 그 여파, 명의 재징병 요구와 조·명간 긴장관계 등 갈등과 긴장의 연속이었다. 심하전투에서 후금에 투항했던 조선 병사들이 1620년(광해군 12) 모두 석방되어 조선으로 돌아오자 명나라는 조선이 후금과 내통하였다고 의심하였다. 명나라의 보복을 근심한 광해군은 임기응변에 능한 홍명원을 주청사(奏請使)에 임명하였다. 그는 명나라에 가서 자칭 ‘고급사(告急使)’라 하며 오히려 임박한 조선에 대한 후금 침략의 다급함을 고하고, 구원을 주청하였다.
명나라는 파병에 대한 사례로 유시준(劉時俊)을 보내어 내탕금(內帑金)을 우리나라의 군신(君臣)들에게 나누어 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는 조선의 실정을 탐색하려는 것이었기에 홍명원은 명나라 조정 인사들을 만나 조선이 중국 사신을 접대하기조차 어려운 형편임을 설명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황제에게 조선에 사신을 보내지 말도록 주청하고, 그 내탕금을 홍명원 편에 보내도록 하였다. 광해군이 그 말을 듣고 기뻐하였으나 이이첨은 황중윤(黃中允)을 명나라에 주청사로 보내 사신과 내탕금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응천일록(凝川日錄)』 권2) 홍명원은 귀국 길에 황중윤의 사신 파견 소식을 듣고 명나라 황제의 명령을 기다리며 중강(中江)에 머물렀다. 그러나 명나라 조정 인사의 거절로 황중윤이 황제에게 주청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자 조선으로 돌아와 명나라에서 받은 조서(詔書)와 내탕금을 광해군에게 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