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팔관회"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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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 1년''' | '''현종 1년''' | ||
| − | 여러 가지 현실적인 | + | 최항의 청으로 여러 가지 현실적인 필요성이 강조되며 다시 복원되었다. 군신의례가 더욱 강화되고, 이전의 백희가무에서 볼 수 있었던 종교적 성격이 접차 희석되어 보다 유희적인 연희행사로 변모되었다. 또한 외국인들의 행사 참여가 확대되면서 국제적 성격까지 갖추개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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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종 이후''' | '''원종 이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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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 일정== | ==행사 일정== | ||
2025년 6월 11일 (수) 10:44 판
연혁
태조 1년
건국의 정통성을 드러내고 호족세력을 장악하기 위해 신라의 전례를 답습하여 11월에 '위봉루'에서 팔관회를 개설하였다. 이후, 매년 개최되는 국가의 정기 의례로 자리 잡았다. 특히 태조는 훈요십조를 통해 후세에 간신들이 연등회와 팔관회의 가감을 건의하는 행위를 절대 금지하라며 팔관회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훈요6조: 나의 소원은 연등[燃燈會]과 팔관[八關會]에 있는 바, 연등은 부처를 제사하고, 팔관은 하늘과 5악(岳)·명산·대천·용신(龍神) 등을 봉사하는 것이니, 후세의 간신이 신위(神位)와 의식절차의 가감(加減)을 건의하지 못하게 하라. 나도 마음속에 행여 회일(會日)이 국기(國忌: 황실의 祭日)와 서로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고 있으니, 군신이 동락하면서 제사를 경건히 행하라.
즉, 하늘과 땅의 모든 신들에게 지내는 제사로 확대되거나 축소됨이 없이 모든 후손들도 정성껏 지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단순한 불교행사 성격보다 범신론적으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또 다양한 오락, 문화 행사로 왕에서부터 관리, 천민까지 한 마음으로 행사를 거행했다.
문종 1년
팔관회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팔관보를 설치했다. 관원으로는 4품 이상의 사(使) 1인과 5품 이상의 부사(副使) 2인, 판관(判官) 4인, 이속(吏屬)으로 기사(記事) 2인, 기관(記官) 1인, 산사(算士) 1인을 두었다.
성종 1년
최승로가 겨울의 팔관에 사람을 많이 동원하고 노역이 번다하고, 한 번 사용하고 부수는 우인 등에 공비가 많이 들고, 또 중국에서는 우인을 흉사에만 사용한다는 이유로 시정을 요구하였다. 이에 성종은 팔관회가 잡되고 도리에 맞지 않으며 번거롭다 하여 모두 폐지하였다. [1]
현종 1년
최항의 청으로 여러 가지 현실적인 필요성이 강조되며 다시 복원되었다. 군신의례가 더욱 강화되고, 이전의 백희가무에서 볼 수 있었던 종교적 성격이 접차 희석되어 보다 유희적인 연희행사로 변모되었다. 또한 외국인들의 행사 참여가 확대되면서 국제적 성격까지 갖추개 된다.
고종 19년
몽고 침략으로 인한 강화천도 중에도 팔관회를 개최할 정도였다.
원종 이후
원나라의 간섭이 본격화되고 팔관회를 비판적으로 신진사대부층의 등장에 따라 점차 쇠퇴하였다. 이후 조선 건국과 함꼐 단절되었다. [2]
행사 일정
개경과 서경에서 주로 행해졌는데 국왕은 개경의 행사에 참석했고 가끔 서경의 행사에도 참석했다. 서경에서는 10월 14일과 15일, 개경에서는 11월 14일과 15일에 개최되었다.
소회일
서경에서는 10월 14일, 개경에서는 11월 14일.
왕이 법왕사에 행차하여 불전에 공양하고 선왕의 위패에 예를 올렸다. 이는 성종 이후부터 정착되었다. 서경에서는 왕이 직접 참석하지 않고 재상 또는 3품관을 파견하여 재제를 올리게 하였다. [3]
고려중기의 문인인 '이규보'는 「법왕사팔관설경문(法王寺八關說經文)」을 지어, 법왕사에서 경전을 강설하는 모습을 설명하기도 하였다.
대회일
서경에서는 10월 15일, 개경에서는 11월 15일.
구정에서 군신과 외국 사신의 하례 의식 등이 진행되었다. 송나라 상인들, 거란, 여진, 일본의 상인들이 귀한 물건들을 가지고 와 왕에게 인사를 드리곤 했다.
의례
주요 행사는 제례 의식, 문화 행사, 그리고 오락 등으로 진행됐다.
절차
① 왕이 법왕사로 행차한다[法王寺幸香].
② 왕이 의봉루에 이른다[鑾駕出宮].
③ 의봉루에 오른 왕이 태조에게 제를 올린다[太祖眞酌獻].
④ 왕이 자리를 잡은 뒤 군신 간에 하례 의식을 진행한다[坐殿受賀].
⑤ 지방의 관리들이 팔관회를 경축하는 봉표를 왕에게 올린다[封表朝賀].
⑥ 외국인들이 왕에게 하례를 올린다[外國人朝賀].
⑦ 문장가들이 팔관회와 왕을 칭송하는 팔관치어를 올린다[八關致語朝賀].
⑧ 술과 음식을 나누며 가무백희를 즐긴다[歌舞百戱].
왕과 신하 간의 의례
군신 간에 하례를 행하는 좌전수하(坐殿受賀) 등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의식이었다. 개설 목적 및 취지와 관련되어, 왕의 권위를 강화하려는 호국 의례로서, 왕권을 신성화하고 계급 사회의 위계와 질서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가무백희
가무백희, 혹은 백희가무는 곡예, 우희, 가면희 등이 중심이 되는 백희와 음악 및 춤이 수반된 가무희를 포함한다. 불교적 요소와 예술 및 놀이의 성격이 융합된 문화 축제라 할 수 있으며, 팔관회를 대표할 수 있는 주요 행사였다. 고려시대 전 시기에 걸쳐 시행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따라서 백희가무는 팔관회가 국가의 공식 의례이자 백성이 함께 참여하는 축제로서의 성격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요소이다.
| 이름 | 내용 | 복식 |
|---|---|---|
| 곡예 | 고려 후기의 학자, 이색의 시가와 산문을 엮은『목은집(牧隱集)』에 실려 있는 <산대잡극(山臺雜劇)>에는 곡예인 솟대타기가 언급된다. 또한 <구나행(驅儺行)>에서는 불토해내기, 칼삼키기와 같은 환술과 줄타기 등의 곡예가 묘사되었다. | '단의'는 짧은 웃옷으로 당시 하류계층에 속하여 풍족하지 않은 삶을 살았던 연희자 계층의 보편적 복식이으므로, 이런 단의를 곡예복식으로 입었을 개연성이 높다. 바지 또한 '독비곤'과 같은 길이가 짧고 활동성이 가미된 복식을
입었을 것이다. |
| 우희 | 익살그럽고 웃음을 자아내는 연희로, 전문적 연행집단을 통해 다양한 레퍼토리 및 웃음으로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난장이와 같이 우스꽝스러운 모습이나, 관료가 술에 취해 보여주는 해학적 또는 풍자적인 모습은 팔관회에 함께하는 백성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역할을 하였다. | 우희복식은 연극적 고증을 위해 고려시대 보편적 상류계층의 복식을 착용하였을 것이다. |
| 인형놀이 | 나무 등으로 허수아비를 만들어 인형을 움직이며 춤을 추게 하는 놀이로, 주로 역대 공신들을 닮게 만들었다. 한편,『고려사』에서 '최승로'는 팔관회에서 인형을 만드는 노력과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를 들어 팔관회 폐지를 건의하기도 하였다. | 팔관회의 위령제적 성격을 감안한다면 인형놀이에 적용된 인물들은 실존인물이며 대부분 나라를 위해 공훈을 남긴 공신으로 각각의 신분에 따라 복식이 고증되었을 것다. |
| 가면희 | 가면을 쓰고 역신을 몰아내기 위한 춤을 추는 무용이다. 인도에서 사자가 석가모니를 수호하는 신수로 사용된 이후 사자무가 천축국을 통해 중국으로 전래되었음을 통해 사자와 불교의 연관성을 고려할 수 있다. 즉, 팔관회에서 벽사의 의미로 길을 여는 역할을 하는 사자무가 가면희로 연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 사자무의 경우, 역귀를 물리치는 사자의 용맹성이부각된 사자가면이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맹수로서의 사자의 모습을 가급적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형태의 복식이었을 것이다. |
중요성
*# 왕권 강화의 기능
고려왕조는 후삼국을 통일한 뒤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분열된 민심을 하나로 모아 이끌어나갈 강력한 왕권이 필요하였다. 따라서 불교 및 토속신앙을 기반으로 한 팔관회를 열어 범국가적 종합축제를 벌이게 된다.
팔관회를 중히 여긴 것은 지리풍수도참 내지 오행사상에 기원하는데, 동방은 목위(木位)요, 목위의 색은 청이며, 이것을 수로 돌리면 8이 된다고 하였다. 이 "8수의 사상"은 이미 있었던 팔관회의 8이라는 수에 관심을 기울이게 하였다. 이러한 8수사상은 인종때 묘청(妙淸)이 팔성당(八聖堂)을 설치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여기의 8성은 국내 명산을 뽑아 8산이라 하고 그 8산에 살고 있는 선불(仙佛)이 나라를 비보(裨補) 하여 준다고 강조한 팔관회의 방계적인 발전을 보인 것이다.
고려 시대 팔관회는 대체적으로 국민들의 대 단합이 목적이었다. 큰 행사를 통해 백성들의 마음을 모으고 지방 호족들의 단합을 도모하려는 것이다.
- ↑ 구미래, 팔관회, 한국민속대백과사전, https://folkency.nfm.go.kr/topic/detail/1427
- ↑ 구미래, 팔관회의 국가축제적 성격, 역사민속학, 2003.
- ↑ 구미래, 팔관회의 국가축제적 성격, 역사민속학, 2003.
- ↑ 임린, 고려시대 팔관회에 나타난 연희복식, 전남대학교 생활과학연구소,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