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임시정부(25-2)"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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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신한민보와 무형국가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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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가 발행한 신문인 『 신한민보』가 먼저 임시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 한일병합조약 체결 직전인 1910년 7월 6일 자 사설에서 “현 정부가 일본에 투항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은즉, 우리는 인민의 정신을 대표하여 우리의 복리를 도모할 만한 정부를 세울” 것임을 천명하였고, 체결 직후인 1910년 9월 21일 "우리 손으로 자치하는 법률을 제정하며, 공법에 상당하는 임시정부를 설치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연이어 10월 5일 자에는 "대한인의 자치기관"이란 논설을 실어 대한인국민회가 자치 능력을 길러 장차 임시정부의 역할을 하고자 한다는 구상을 밝혔다. |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가 발행한 신문인 『 신한민보』가 먼저 임시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 한일병합조약 체결 직전인 1910년 7월 6일 자 사설에서 “현 정부가 일본에 투항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은즉, 우리는 인민의 정신을 대표하여 우리의 복리를 도모할 만한 정부를 세울” 것임을 천명하였고, 체결 직후인 1910년 9월 21일 "우리 손으로 자치하는 법률을 제정하며, 공법에 상당하는 임시정부를 설치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연이어 10월 5일 자에는 "대한인의 자치기관"이란 논설을 실어 대한인국민회가 자치 능력을 길러 장차 임시정부의 역할을 하고자 한다는 구상을 밝혔다. | ||
1911년에 들어와 『신한민보』의 주필인 박용만은 무형국가론을 주장하였다. | 1911년에 들어와 『신한민보』의 주필인 박용만은 무형국가론을 주장하였다. | ||
| − | ===대동단결선언=== | + | ====대동단결선언==== |
1910년대 초반 우리나라의 독립운동 세력은 국내외에 걸쳐 독자적으로 활동하였기에 세력들 간의 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고 효과적인 연합활동 또한 기대할 수 없었다. 따라서 유기적이고 효율적인 독립운동을 벌이기 위해 1917년 박은식·신채호·윤세복·조소앙·신석우·한진교·박용만 등이 참가한‘대동단결선언’이 있었다. 대동단결선언문에서는 순종의 주권 포기 행위를 국민에게 양도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이 타당함을 밝혔다. 또한 일제의 국권 침탈로 인해 해외에서의 주권 행사가 필수불가결한 선택임을 덧붙였다. 대동단결선언문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의지가 반영된 최초 문건이었던 셈이다. | 1910년대 초반 우리나라의 독립운동 세력은 국내외에 걸쳐 독자적으로 활동하였기에 세력들 간의 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고 효과적인 연합활동 또한 기대할 수 없었다. 따라서 유기적이고 효율적인 독립운동을 벌이기 위해 1917년 박은식·신채호·윤세복·조소앙·신석우·한진교·박용만 등이 참가한‘대동단결선언’이 있었다. 대동단결선언문에서는 순종의 주권 포기 행위를 국민에게 양도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이 타당함을 밝혔다. 또한 일제의 국권 침탈로 인해 해외에서의 주권 행사가 필수불가결한 선택임을 덧붙였다. 대동단결선언문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의지가 반영된 최초 문건이었던 셈이다. | ||
| − | ===3.1운동=== | + | ====[[3.1운동]]==== |
하지만 이는 곧바로 임시정부의 수립으로 이이지지 못했는데, 1919년 3.1운동을 기점으로 해외 언론은 한국의 독립운동에 주목하게 되었고, 해외에서 활동하던 독립투사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박차를 가했다. | 하지만 이는 곧바로 임시정부의 수립으로 이이지지 못했는데, 1919년 3.1운동을 기점으로 해외 언론은 한국의 독립운동에 주목하게 되었고, 해외에서 활동하던 독립투사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박차를 가했다. | ||
| − | ===3개 임시정부의 통합으로 탄생한 '대한민국임시정부'=== | + | ====3개 임시정부의 통합으로 탄생한 '대한민국임시정부'==== |
대한민국임시정부 탄생은 한성임시정부·상하이임시정부·노령임시정부의 통합에서 비롯되었다. 3·1운동 이후 여러 개의 임시정부가 동시다발적으로 만들어지자 이를 하나로 결합하려는 노력이 이뤄졌다. | 대한민국임시정부 탄생은 한성임시정부·상하이임시정부·노령임시정부의 통합에서 비롯되었다. 3·1운동 이후 여러 개의 임시정부가 동시다발적으로 만들어지자 이를 하나로 결합하려는 노력이 이뤄졌다. | ||
2025년 12월 23일 (화) 17:08 판
목차
개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27년간 중국에서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던 임시정부이다.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된 이후 1945년 11월 김구 등이 환국할 때까지 민주공화제의 독립 국가를 건설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주권 자치를 실현하였다. 임시정부 수립일은 기념일 제정 시에는 4월 13일이라고 여겨 왔으나 근거 자료의 확대와 이에 대한 역사학적 분석에 따라 2019년부터 4월 11일로 바로잡게 되었다.
수립배경
신한민보와 무형국가론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가 발행한 신문인 『 신한민보』가 먼저 임시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 한일병합조약 체결 직전인 1910년 7월 6일 자 사설에서 “현 정부가 일본에 투항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은즉, 우리는 인민의 정신을 대표하여 우리의 복리를 도모할 만한 정부를 세울” 것임을 천명하였고, 체결 직후인 1910년 9월 21일 "우리 손으로 자치하는 법률을 제정하며, 공법에 상당하는 임시정부를 설치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연이어 10월 5일 자에는 "대한인의 자치기관"이란 논설을 실어 대한인국민회가 자치 능력을 길러 장차 임시정부의 역할을 하고자 한다는 구상을 밝혔다. 1911년에 들어와 『신한민보』의 주필인 박용만은 무형국가론을 주장하였다.
대동단결선언
1910년대 초반 우리나라의 독립운동 세력은 국내외에 걸쳐 독자적으로 활동하였기에 세력들 간의 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고 효과적인 연합활동 또한 기대할 수 없었다. 따라서 유기적이고 효율적인 독립운동을 벌이기 위해 1917년 박은식·신채호·윤세복·조소앙·신석우·한진교·박용만 등이 참가한‘대동단결선언’이 있었다. 대동단결선언문에서는 순종의 주권 포기 행위를 국민에게 양도하는 것으로 해석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이 타당함을 밝혔다. 또한 일제의 국권 침탈로 인해 해외에서의 주권 행사가 필수불가결한 선택임을 덧붙였다. 대동단결선언문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의지가 반영된 최초 문건이었던 셈이다.
3.1운동
하지만 이는 곧바로 임시정부의 수립으로 이이지지 못했는데, 1919년 3.1운동을 기점으로 해외 언론은 한국의 독립운동에 주목하게 되었고, 해외에서 활동하던 독립투사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박차를 가했다.
3개 임시정부의 통합으로 탄생한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한민국임시정부 탄생은 한성임시정부·상하이임시정부·노령임시정부의 통합에서 비롯되었다. 3·1운동 이후 여러 개의 임시정부가 동시다발적으로 만들어지자 이를 하나로 결합하려는 노력이 이뤄졌다.
의의 및 평가
참고문헌
- 한국학중앙연구원. 「대한민국 임시정부 (大韓民國 臨時政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
- 독립기념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탄생」, *월간 독립기념관* (15호). [2]
- 국사편찬위원회. 「1919년 - 대한민국 임시 정부」, *우리역사넷*. [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