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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정갈래 | + | '''''서정갈래'''''<p>김억<ref>시인 김소월의 스승으로 알려져있다. </ref> 을 중심으로 상징주의 시가 등장하였다. 상징주의는 19세기 후반 프랑스의 사실주의, 자연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등장한 문예사조이다. 낭만주의와 같이 현실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문학적으로 표현하려 했고, 이를 위해 상징적 표현을 사용하였다. 한국에서는 1918년에 김억이 최초의 문예 주간지인 태서문예신보에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와 시론을 번역하여 소개하였다. 김억은 내적 리듬, 즉 내재율만을 가진 자유시는 자칫 산문과 구별되기 어려울 수 있다며 엄격한 외재율, 그 중에서도 중국 한시에 나타나는 압운<ref> 여러 행을 걸쳐 발현되는 규칙이다. 비슷한 개념으로 rhyme을 떠올릴 수 있다. </ref>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김억의 이러한 주장은 크게 주목받지 못하였다. <p> |
2025년 5월 21일 (수) 11:11 판
역사적 관점 : 19세기 후반 개항, 갑신정변, 갑오개혁 전후 ~ 1945년 광복까지
문학사적 관점 : 1900년대 초반[1] ~ 1945년 광복까지
근대문학의 흐름
| 시기 | 서정갈래 | 서사갈래 |
|---|---|---|
| 1910년대 | 상징주의 시, 현대적 자유시 | 신소설 |
| 1920년대 | 낭만주의 시 | 낭만주의 소설, 현실주의 소설 |
| 1930년대 | 모더니즘 시 | 모더니즘 소설, 농촌 소설 |
| 1940년대 | 청록파, 저항시 |
1910년대
서정갈래
김억[2] 을 중심으로 상징주의 시가 등장하였다. 상징주의는 19세기 후반 프랑스의 사실주의, 자연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등장한 문예사조이다. 낭만주의와 같이 현실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문학적으로 표현하려 했고, 이를 위해 상징적 표현을 사용하였다. 한국에서는 1918년에 김억이 최초의 문예 주간지인 태서문예신보에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와 시론을 번역하여 소개하였다. 김억은 내적 리듬, 즉 내재율만을 가진 자유시는 자칫 산문과 구별되기 어려울 수 있다며 엄격한 외재율, 그 중에서도 중국 한시에 나타나는 압운[3]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김억의 이러한 주장은 크게 주목받지 못하였다.
서사갈래'
신소설 : 고전소설에서 근대소설로 넘어가는 분기점에 위치한 과도기적 소설이다. 1906년 대한매일신보의 광고에서 처음 사용된 단어로, 개화기 소설이라고도 부른다.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신뢰하고 이를 통해 더 나은 사회를 만들려 했던 계몽주의의 사상이 담겨있다. 주로 우연에 의해 사건이 전개되는 등 서사적 측면에서는 고전소설의 특징을, 구조와 형식 측면에서는 외국 소설의 영향을 받았다. 근대적 인쇄, 출판, 유통 방식과 결합하여 문학의 본격적인 대중 유통이 시작되었다.
이광수의 <무정> : 이전의 신소설과는 구분되는 ‘최초의 근대소설’로 분류할 수 있는 작품이다. 연재 당시, 엄청난 인기와 동시에 사회적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문학사적으로 따지면 이전까지처럼 서로 얼굴도 모르는 두 사람의 정략결혼이라는 전근대적 혼인 방식이 아닌 '연애에 기초한 혼인'을 최초로 서사화하고 이를 근대적 삶의 실천이자 심지어 민족 계몽으로까지 그 범위를 확장했다는 점에서 아주 큰 의의가 있는 작품이다. 또 '연애'라는 단어가 이 당시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지금과 같은 의미가 아닌 'LOVE', 사랑의 의미였다는 것을 고려해보면 개인과 개인이 감정의 주체로서 교제 인물을 선택하고 이로써 자아를 자각하는 의미로서도 의의가 있다.
1920년대
1930년대
1940년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