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방어선 전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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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 style="text-align:center; background:#fff; padding:6px; border-right:1px solid #ccc;">교전국</th> | <th style="text-align:center; background:#fff; padding:6px; border-right:1px solid #ccc;">교전국</th> | ||
| − | <td style="padding:6px;">북한</td> | + | <td style="padding:6px;">[[북한]]</t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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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th style="text-align:center; background:#fff; padding:6px; border-right:1px solid #ccc;">지휘관</th> | ||
| + | <td style="padding:6px;">[[김홍일]] <p> 이응준 </td>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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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 ==배경== | ||
| − | 1950년 6월 25일, 6.25 전쟁이 발발하고 한국군은 26일 의정부시, 27일 13시 창동 방어선, 28일 6시 미아리를 차례로 함락당하며 28일 12시에 수도인 서울특별시마저 북한에게 점령당한다. 그렇게 6월 28일 한강을 방어할 작전을 세우게 된다. | + | 1950년 6월 25일, 6.25 전쟁이 발발하고 한국군은 26일 의정부시, 27일 13시 창동 방어선, 28일 6시 미아리를 차례로 함락당하며 28일 12시에 수도인 서울특별시마저 북한에게 점령당한다. 그렇게 6월 28일 오전 총참모장인 채병덕 소장이 수원농업시험장에 육군본부를 개설하였고, 미 극동군사령부의 지휘소장 존 H. 처치준장과 서울을 점령당한 것에 대한 대응방책을 협의한다. 그 결과 미군의 참전 가능성에 대한 시사와 그를 위해서는 한강 선을 고수해야 한다는 결론을 얻게 되고, 이에 따라 한강을 방어할 작전을 세우게 된다. |
== 전개 과정 == | == 전개 과정 == | ||
| + | ===과정=== | ||
1950년 6월 28일, 채병덕 총장은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김홍일 소장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김홍일 소장은 곧바로 방어작전에 들어갔는데, 이때 참모 학교 고문으로 있던 해즐릿 중령이 미 지상군 참전이 정해지더라도 그들이 한반도에 상륙해 전투 전개를 갖추려면 시간이 필요하다며 향후 3일 동안은 한강 방어선을 지탱해 주어야 미군이 들어올 발판을 제공할 수 있다고 조언하였다. 김홍일 장군 역시 한강 방어선을 지탱하는 3일이 나라의 운명을 판가름한다고 생각해 지휘관들에게 3일의 시간 동안 방어선을 지탱할 것을 강조하였다. 김홍일 장군은 낙오병을 수습하며 재정비하는 데에 전력을 쏟으며 부서진 군대를 재건하기 시작했다. 재정비한 병사들을 임시 편제해 방어선에 투입시켰다. 또한 그는 남하하는 장병들을 친절하게 취사장으로 안내하고,헌병들이 퇴각하는 장병들에게 불손한 태도를 보이지 않도록 하였다. | 1950년 6월 28일, 채병덕 총장은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김홍일 소장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김홍일 소장은 곧바로 방어작전에 들어갔는데, 이때 참모 학교 고문으로 있던 해즐릿 중령이 미 지상군 참전이 정해지더라도 그들이 한반도에 상륙해 전투 전개를 갖추려면 시간이 필요하다며 향후 3일 동안은 한강 방어선을 지탱해 주어야 미군이 들어올 발판을 제공할 수 있다고 조언하였다. 김홍일 장군 역시 한강 방어선을 지탱하는 3일이 나라의 운명을 판가름한다고 생각해 지휘관들에게 3일의 시간 동안 방어선을 지탱할 것을 강조하였다. 김홍일 장군은 낙오병을 수습하며 재정비하는 데에 전력을 쏟으며 부서진 군대를 재건하기 시작했다. 재정비한 병사들을 임시 편제해 방어선에 투입시켰다. 또한 그는 남하하는 장병들을 친절하게 취사장으로 안내하고,헌병들이 퇴각하는 장병들에게 불손한 태도를 보이지 않도록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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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9일 맥아더 사령관이 수원 비행관에 도착하고, 그는 이후 전선을 시찰했다. 그는 한강 방어선을 보고 1990년 6월 30일, 미합동참모부에 미군 2개 사단만 있다면 한반도를 지킬 수 있을 것이라는 보고서를 보냈다. 전문가들은 이때 한강 방어선이 지탱됐기 때문에 맥아더가 이런 결정을 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 1950년 6월 29일 맥아더 사령관이 수원 비행관에 도착하고, 그는 이후 전선을 시찰했다. 그는 한강 방어선을 보고 1990년 6월 30일, 미합동참모부에 미군 2개 사단만 있다면 한반도를 지킬 수 있을 것이라는 보고서를 보냈다. 전문가들은 이때 한강 방어선이 지탱됐기 때문에 맥아더가 이런 결정을 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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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결과 및 의의=== | ||
북한군은 7월 3일에 한강 방어선을 결국 돌파하지만, 약 6일 간의 지연전에 성공하였기에 이 시간 동안 분산된 병력을 수습하고 재편성할 수 있었으며, 미 지상군의 참전으로 이어지도록 하여 북한군이 한국군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시기를 놓치게 하였으므로 한강 방어선 전투는 사실상 성공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는 인과적으로 7울 8일, UN군 참전으로도 이어졌다. | 북한군은 7월 3일에 한강 방어선을 결국 돌파하지만, 약 6일 간의 지연전에 성공하였기에 이 시간 동안 분산된 병력을 수습하고 재편성할 수 있었으며, 미 지상군의 참전으로 이어지도록 하여 북한군이 한국군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시기를 놓치게 하였으므로 한강 방어선 전투는 사실상 성공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는 인과적으로 7울 8일, UN군 참전으로도 이어졌다. | ||
2025년 12월 23일 (화) 22:21 기준 최신판
개요
6.25 전쟁 당시 북한군의 남하를 지연함으로써 흩어진 한국군 병력을 재편성하고 미군이 참전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 한강선에서 벌인 전투이다. 7월 3일 북한군이 결국 한강선을 뚫고 내려오긴 했지만, 한국군이 한강선에서 3일 이상을 버티며 미군이 참전할 시간을 벌었고 북한군이 한국군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시기를 놓치게 만들었으므로 실질적으로는 한국군의 승리이기도 했다.
배경
1950년 6월 25일, 6.25 전쟁이 발발하고 한국군은 26일 의정부시, 27일 13시 창동 방어선, 28일 6시 미아리를 차례로 함락당하며 28일 12시에 수도인 서울특별시마저 북한에게 점령당한다. 그렇게 6월 28일 오전 총참모장인 채병덕 소장이 수원농업시험장에 육군본부를 개설하였고, 미 극동군사령부의 지휘소장 존 H. 처치준장과 서울을 점령당한 것에 대한 대응방책을 협의한다. 그 결과 미군의 참전 가능성에 대한 시사와 그를 위해서는 한강 선을 고수해야 한다는 결론을 얻게 되고, 이에 따라 한강을 방어할 작전을 세우게 된다.
전개 과정
과정
1950년 6월 28일, 채병덕 총장은 시흥지구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김홍일 소장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김홍일 소장은 곧바로 방어작전에 들어갔는데, 이때 참모 학교 고문으로 있던 해즐릿 중령이 미 지상군 참전이 정해지더라도 그들이 한반도에 상륙해 전투 전개를 갖추려면 시간이 필요하다며 향후 3일 동안은 한강 방어선을 지탱해 주어야 미군이 들어올 발판을 제공할 수 있다고 조언하였다. 김홍일 장군 역시 한강 방어선을 지탱하는 3일이 나라의 운명을 판가름한다고 생각해 지휘관들에게 3일의 시간 동안 방어선을 지탱할 것을 강조하였다. 김홍일 장군은 낙오병을 수습하며 재정비하는 데에 전력을 쏟으며 부서진 군대를 재건하기 시작했다. 재정비한 병사들을 임시 편제해 방어선에 투입시켰다. 또한 그는 남하하는 장병들을 친절하게 취사장으로 안내하고,헌병들이 퇴각하는 장병들에게 불손한 태도를 보이지 않도록 하였다.
김홍일 장군은 이런 식으로 장병들의 사기를 돋우는 한편 3일이란 시간을 버티기 위해 방어 전략에도 힘을 썼다. 북한군이 파괴되어 있던 한강 철교를 복구해 탱크가 다리를 건너게 하는 순간 국군이 위험해지기에, 그는 다리가 있는 노량진 쪽에 화력을 집중시켰다. 또 여의도는 북한에게 점령당할 경우, 북한군이 곧바로 한강을 건너 영등포 쪽으로 쉽게 진입할 수 있었기에 여의도에도 화력을 집중시켰다. 그렇기에 여의도 쪽에서는 하루에도 수차례 주인이 바뀔 정도로 치열한 격전이 이어졌다.
1950년 6월 29일 맥아더 사령관이 수원 비행관에 도착하고, 그는 이후 전선을 시찰했다. 그는 한강 방어선을 보고 1990년 6월 30일, 미합동참모부에 미군 2개 사단만 있다면 한반도를 지킬 수 있을 것이라는 보고서를 보냈다. 전문가들은 이때 한강 방어선이 지탱됐기 때문에 맥아더가 이런 결정을 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결과 및 의의
북한군은 7월 3일에 한강 방어선을 결국 돌파하지만, 약 6일 간의 지연전에 성공하였기에 이 시간 동안 분산된 병력을 수습하고 재편성할 수 있었으며, 미 지상군의 참전으로 이어지도록 하여 북한군이 한국군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시기를 놓치게 하였으므로 한강 방어선 전투는 사실상 성공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는 인과적으로 7울 8일, UN군 참전으로도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