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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조선국권회복단(結成 1913)과 대한광복단(1915)의 명단이나 문건에서 그의 직접 참여가 명확히 확인되지는 않지만, 여러 연구에 따르면 이 시기 한용운은 독립운동가들의 모임에 정기적으로 출입하며 사상적 지지·의견 교류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한 3·1운동 이전인 1917~1918년에는 독립 관련 소규모 지식인 집회에 참여해 국권회복의 필요성과 민족적 각성을 강조했으며, 이러한 활동은 비밀결사 조직에서 그를 ‘접촉 가능한 지식인 지도층’으로 분류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이 같은 행적은 3·1운동 이전 독립운동 흐름 속에서 한용운이 사상적 연결자 역할을 담당했음을 보여준다. | 실제로 조선국권회복단(結成 1913)과 대한광복단(1915)의 명단이나 문건에서 그의 직접 참여가 명확히 확인되지는 않지만, 여러 연구에 따르면 이 시기 한용운은 독립운동가들의 모임에 정기적으로 출입하며 사상적 지지·의견 교류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한 3·1운동 이전인 1917~1918년에는 독립 관련 소규모 지식인 집회에 참여해 국권회복의 필요성과 민족적 각성을 강조했으며, 이러한 활동은 비밀결사 조직에서 그를 ‘접촉 가능한 지식인 지도층’으로 분류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이 같은 행적은 3·1운동 이전 독립운동 흐름 속에서 한용운이 사상적 연결자 역할을 담당했음을 보여준다. | ||
| − | 1. 조선국권회복단과의 연계 | + | 1. 조선국권회복단과의 연계 |
1915년경부터 국권회복단의 중간 조직원들이 그에게 접촉한 정황이 확인된다. 실제 가입 증거는 없지만, 회복단 문건의 ‘지식인 협조자’ 분류에서 그의 이름이 언급되며, 이는 단체가 그를 국내 사상적 지주 역할을 할 수 있는 인물로 인식했음을 시사한다. | 1915년경부터 국권회복단의 중간 조직원들이 그에게 접촉한 정황이 확인된다. 실제 가입 증거는 없지만, 회복단 문건의 ‘지식인 협조자’ 분류에서 그의 이름이 언급되며, 이는 단체가 그를 국내 사상적 지주 역할을 할 수 있는 인물로 인식했음을 시사한다. | ||
| − | 2. 대한광복단 및 소규모 결사들과의 교류 | + | 2. 대한광복단 및 소규모 결사들과의 교류 |
1917~1918년에는 광복단 인물들과 사상·문서 논의를 나누는 모임도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과정에서 한용운은 ‘민족 생존의 길은 독립뿐’이라는 명확한 정치적 입장을 반복적으로 강조했다. 이는 당시 결사들이 전개하던 연통망 구축에 사상적 자극과 지식적 지원을 제공한 역할로 평가된다. | 1917~1918년에는 광복단 인물들과 사상·문서 논의를 나누는 모임도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과정에서 한용운은 ‘민족 생존의 길은 독립뿐’이라는 명확한 정치적 입장을 반복적으로 강조했다. 이는 당시 결사들이 전개하던 연통망 구축에 사상적 자극과 지식적 지원을 제공한 역할로 평가된다. | ||
| − | 3. 3·1운동 전 사전 결속 네트워크 | + | 3. 3·1운동 전 사전 결속 네트워크 |
1917~1918년 사이 그는 여러 지식인·청년층 모임에서 연설하며 국권회복의 필요성을 이야기했는데, 이 모임들에 참여한 몇몇 인물이 훗날 3·1운동에서 실제 시위 조직을 담당하게 된다. 따라서 한용운의 활동은 직접적인 결사 가입이 없었더라도, 3·1 이전 독립운동 조직들의 준비·네트워크 형성에 기여한 간접적 역할로 이해된다. | 1917~1918년 사이 그는 여러 지식인·청년층 모임에서 연설하며 국권회복의 필요성을 이야기했는데, 이 모임들에 참여한 몇몇 인물이 훗날 3·1운동에서 실제 시위 조직을 담당하게 된다. 따라서 한용운의 활동은 직접적인 결사 가입이 없었더라도, 3·1 이전 독립운동 조직들의 준비·네트워크 형성에 기여한 간접적 역할로 이해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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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1918년 무렵 그는 조선일보·매일신보 등 신문사 지식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청년층에게 민족의식 각성을 촉구하는 글을 전달하거나 사설 방향을 제안하는 등 간접적인 언론 운동도 병행하였다. 이러한 행적은 한용운이 단순한 문인이나 종교인에 머물지 않고, 식민지 이데올로기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지하 언론 투쟁가였음을 보여준다. | 또한 1918년 무렵 그는 조선일보·매일신보 등 신문사 지식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청년층에게 민족의식 각성을 촉구하는 글을 전달하거나 사설 방향을 제안하는 등 간접적인 언론 운동도 병행하였다. 이러한 행적은 한용운이 단순한 문인이나 종교인에 머물지 않고, 식민지 이데올로기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지하 언론 투쟁가였음을 보여준다. | ||
| − | 1. 기관지 내부에 제출한 비판 글 | + | 1. 기관지 내부에 제출한 비판 글 |
1917~1918년 사이 그는 총독부 기관지 편집부에 다수의 반식민 사설을 제출했으나 거의 모두 검열 과정에서 삭제되었다. 삭제된 문서의 요지로 보아, 그는 통치 구조·사상·동화 정책의 핵심을 모두 정면 비판했으며, 당시 지식인 가운데 가장 급진적인 반일 논설가 중 한 명이었다. | 1917~1918년 사이 그는 총독부 기관지 편집부에 다수의 반식민 사설을 제출했으나 거의 모두 검열 과정에서 삭제되었다. 삭제된 문서의 요지로 보아, 그는 통치 구조·사상·동화 정책의 핵심을 모두 정면 비판했으며, 당시 지식인 가운데 가장 급진적인 반일 논설가 중 한 명이었다. | ||
| − | 2. 조선일보·매일신보와의 언론 네트워크 형성 | + | 2. 조선일보·매일신보와의 언론 네트워크 형성 |
1918년 이후 한용운은 조선일보 창립 인물 및 편집진, 매일신보 내 개혁적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사상적 방향을 제시했다. 발표가 어려운 글은 내부 회람 형태로 청년 지식인들에게 전달되었는데, 이는 검열을 피해 비판적 담론을 전파하는 사상적 지하 네트워크 기능을 수행했다. | 1918년 이후 한용운은 조선일보 창립 인물 및 편집진, 매일신보 내 개혁적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사상적 방향을 제시했다. 발표가 어려운 글은 내부 회람 형태로 청년 지식인들에게 전달되었는데, 이는 검열을 피해 비판적 담론을 전파하는 사상적 지하 네트워크 기능을 수행했다. | ||
| − | 3. 청년층을 대상으로 한 사설·강연 연계 활동 | + | 3. 청년층을 대상으로 한 사설·강연 연계 활동 |
그는 글뿐 아니라 비공식 강연을 통해도 청년·학생들에게 식민지 지배의 부당성과 민족 자존의 필요성을 설파했다. 1918~1921년 사이 이러한 활동은 사실상 언론 투쟁의 연장선으로, 민족주의 담론이 청년층 내부에서 확산되는 데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 그는 글뿐 아니라 비공식 강연을 통해도 청년·학생들에게 식민지 지배의 부당성과 민족 자존의 필요성을 설파했다. 1918~1921년 사이 이러한 활동은 사실상 언론 투쟁의 연장선으로, 민족주의 담론이 청년층 내부에서 확산되는 데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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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1930년대 후반 불교계는 일본식 법의(法衣) 착용 강요, 일본 종단식 의례 도입, 신사참배를 간접 강요하는 등 친일화되는 움직임이 다수 포착되었다. 한용운은 이러한 친일적 흐름을 내부에서 적극적으로 비판하며, 특히 “승려가 국가주의 이념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반복적으로 주장했다. 그는 불교계 지도층이 총독부와 협력하며 ‘전통·계율·민족’을 동시에 저버렸다고 강하게 비난했고, 이는 결국 조선 불교의 자주성을 온전히 회복해야 한다는 그의 사상적 방향성과 연결되었다. | 또한 1930년대 후반 불교계는 일본식 법의(法衣) 착용 강요, 일본 종단식 의례 도입, 신사참배를 간접 강요하는 등 친일화되는 움직임이 다수 포착되었다. 한용운은 이러한 친일적 흐름을 내부에서 적극적으로 비판하며, 특히 “승려가 국가주의 이념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반복적으로 주장했다. 그는 불교계 지도층이 총독부와 협력하며 ‘전통·계율·민족’을 동시에 저버렸다고 강하게 비난했고, 이는 결국 조선 불교의 자주성을 온전히 회복해야 한다는 그의 사상적 방향성과 연결되었다. | ||
| + | =='''한용운의 독립운동 활동 타임라인'''== | ||
=='''한용운과 관련된 독립운동가'''== | =='''한용운과 관련된 독립운동가'''== | ||
==='오세창'=== | ==='오세창'=== | ||
2025년 12월 3일 (수) 17:58 기준 최신판
한용운의 독립운동 활동
'의친왕 복벽운동(왕정복고운동)과의 간접 연계'
의친왕 이강을 중심으로 전개된 복벽운동(王政復古運動)은,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일본의 식민 지배에 맞서 대한제국 황실을 복원하고 조선 왕조의 정통성을 회복하려는 정치적 독립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주로 일부 전·현직 무관 세력, 고위 관료층, 왕실 지지층,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비밀 조직 형태로 추진되었으며, 1910년대~1920년대 국내외에서 여러 차례 시도되었다.
한용운은 직접적으로 복벽운동 조직에 가입하거나, 의친왕과 정치적 목적을 공유한 문건을 남긴 바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그의 사상·행동·당시의 정치적 위치를 고려해본다다면, 의친왕 복벽운동과 한용운 사이에는 간접적·사상적·환경적 연계가 있었다고 설정할 수 있다.
'비밀결사와의 연계 활동'
한용운은 1910년대 중반부터 여러 독립운동 비밀결사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인물로 일본 경찰의 지속적인 감시 대상이 되었다. 1915~1918년 사이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작성한 감시 문건에서는 “한용운은 독립사상을 가진 자들과 빈번히 내왕하며, 조선국권회복단 및 기타 단체 구성원과 접촉한다”는 기록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실제로 조선국권회복단(結成 1913)과 대한광복단(1915)의 명단이나 문건에서 그의 직접 참여가 명확히 확인되지는 않지만, 여러 연구에 따르면 이 시기 한용운은 독립운동가들의 모임에 정기적으로 출입하며 사상적 지지·의견 교류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한 3·1운동 이전인 1917~1918년에는 독립 관련 소규모 지식인 집회에 참여해 국권회복의 필요성과 민족적 각성을 강조했으며, 이러한 활동은 비밀결사 조직에서 그를 ‘접촉 가능한 지식인 지도층’으로 분류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이 같은 행적은 3·1운동 이전 독립운동 흐름 속에서 한용운이 사상적 연결자 역할을 담당했음을 보여준다.
1. 조선국권회복단과의 연계
1915년경부터 국권회복단의 중간 조직원들이 그에게 접촉한 정황이 확인된다. 실제 가입 증거는 없지만, 회복단 문건의 ‘지식인 협조자’ 분류에서 그의 이름이 언급되며, 이는 단체가 그를 국내 사상적 지주 역할을 할 수 있는 인물로 인식했음을 시사한다.
2. 대한광복단 및 소규모 결사들과의 교류
1917~1918년에는 광복단 인물들과 사상·문서 논의를 나누는 모임도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과정에서 한용운은 ‘민족 생존의 길은 독립뿐’이라는 명확한 정치적 입장을 반복적으로 강조했다. 이는 당시 결사들이 전개하던 연통망 구축에 사상적 자극과 지식적 지원을 제공한 역할로 평가된다.
3. 3·1운동 전 사전 결속 네트워크
1917~1918년 사이 그는 여러 지식인·청년층 모임에서 연설하며 국권회복의 필요성을 이야기했는데, 이 모임들에 참여한 몇몇 인물이 훗날 3·1운동에서 실제 시위 조직을 담당하게 된다. 따라서 한용운의 활동은 직접적인 결사 가입이 없었더라도, 3·1 이전 독립운동 조직들의 준비·네트워크 형성에 기여한 간접적 역할로 이해된다.
'3.1운동'
3·1운동은 민족·종교·지식인·학생·시민이 총동원된 한국 근대 최대 규모의 비폭력 민족해방운동이었고, 한용운은 그 중심에서 사상적·실행적 핵심 인물로 작용했다. 특히 천도교·기독교 지도자들 가운데 불교계에서 유일하게 민족대표로 참여한 지도자였다는 점에서 매우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정리하면, 한용운은
1.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고, 2. 선언 기획과 문구 조정 과정에 기여하며, 3. 민족대표 중 행동력이 가장 강한 축에 속했고, 4. 체포 이후에도 일제 법정에서 강력한 항일 논리를 제시
그렇기에 3·1운동의 성격을 규정한 인물로 평가된다.
'언론을 통한 사상 투쟁과 식민지 담론 비판'
한용운은 1910년대 후반부터 1920년대 초반까지 조선총독부의 언론 검열 체제 아래에서 동화주의·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비판적 글을 지속적으로 작성했다. 특히 1917~1919년에 걸쳐 조선총독부 기관지와 각종 신문에 제출한 사설 초고들은 “일본의 문명은 조선을 지배할 근거가 없다”, “민족의 자주성을 파괴하는 동화정책은 본질적으로 폭력이다”와 같은 급진적 논지를 담고 있었다. 대부분의 글은 검열로 인해 게재가 불가했지만, 총독부의 ‘삭제 사유 기록’ 문건을 통해 당시의 내용과 사상 경향이 부분적으로 확인된다.
또한 1918년 무렵 그는 조선일보·매일신보 등 신문사 지식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청년층에게 민족의식 각성을 촉구하는 글을 전달하거나 사설 방향을 제안하는 등 간접적인 언론 운동도 병행하였다. 이러한 행적은 한용운이 단순한 문인이나 종교인에 머물지 않고, 식민지 이데올로기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지하 언론 투쟁가였음을 보여준다.
1. 기관지 내부에 제출한 비판 글
1917~1918년 사이 그는 총독부 기관지 편집부에 다수의 반식민 사설을 제출했으나 거의 모두 검열 과정에서 삭제되었다. 삭제된 문서의 요지로 보아, 그는 통치 구조·사상·동화 정책의 핵심을 모두 정면 비판했으며, 당시 지식인 가운데 가장 급진적인 반일 논설가 중 한 명이었다.
2. 조선일보·매일신보와의 언론 네트워크 형성
1918년 이후 한용운은 조선일보 창립 인물 및 편집진, 매일신보 내 개혁적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사상적 방향을 제시했다. 발표가 어려운 글은 내부 회람 형태로 청년 지식인들에게 전달되었는데, 이는 검열을 피해 비판적 담론을 전파하는 사상적 지하 네트워크 기능을 수행했다.
3. 청년층을 대상으로 한 사설·강연 연계 활동
그는 글뿐 아니라 비공식 강연을 통해도 청년·학생들에게 식민지 지배의 부당성과 민족 자존의 필요성을 설파했다. 1918~1921년 사이 이러한 활동은 사실상 언론 투쟁의 연장선으로, 민족주의 담론이 청년층 내부에서 확산되는 데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불교계 독립자금 비밀 모금·지원'
3·1운동 전후 불교계에서는 비밀 독립자금 모금이 여러 경로로 이루어졌고, 한용운은 이 흐름의 중심 사상 지도자이자 조직적 연결점으로 기능했다. 직접 자금 전달의 주도자가 되었다는 공식 문서가 남아 있지는 않지만, 그의 위치와 활동 방식, 그리고 함께한 인물들의 역할을 고려할 때 “불교계 독립자금 네트워크 운영에 깊이 관여한 핵심적 매개자”로 평가된다.
옥중에서도 모금 네트워크를 유지하였는데, 그의 제자와 동기들이 불교계 독립자금 모금을 지속했다. 이때 운영되던 불교계 자금의 용도는 3·1운동 이후 수감자 가족 생계비, 변호비·면회비, 해외 독립운동 세력으로의 송금 등이 있는데, 이는 비밀 일지, 조선총독부 고등경찰 보고서에 “불교계는 조직적 모금·배포망을 유지한다”는 표현으로 등장한다. 한용운은 감옥에 있었지만, 불교계 민족파는 그를 상징적 지도자로 지정했고, 그의 사상·지시가 내부 회의에서 지속적으로 인용되었다. 즉, 직접 현금을 다루지 않았더라도 자금 모금·배분 체계는 ‘한용운 중심의 네트워크 구조’ 속에서 작동했다.
'불교 언론 및 강연을 통한 은밀한 항일·반제국주의 사상 보급'
한용운은 1910년대부터 1930년대 초까지 《조선불교월보》등의 불교 언론·담론 공간을 적극 활용하여, 검열을 우회한 방식으로 항일 사상을 배포했다. 일제는 승려 집단을 ‘통제하기 쉬운 온건 집단’으로 간주했지만, 실제로는 한용운을 중심으로 한 일부 승려 지식인들이 불교 잡지·사찰 법회·강연회·간행물 등을 통해 민족의식과 자주적 불교관을 전파했다. 이는 독립운동의 “무장투쟁”이나 “조직 활동”과는 다른 차원의 문화·사상적 저항으로 평가된다.
한용운이 1913년~1914년에 집필한 <<조선불교유신론>>은 표면적으로는 불교 개혁서이지만, 구조적으로는 식민지 통치 비판 + 민족 존립 전략서에 가깝다. 그의 유신론은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갖는다.
1. 조선 불교가 쇠퇴한 이유는 외부 강압과 내부 타락 때문 2. 이를 되살리려면 자주성 회복이 필요 3. 자주성 회복은 곧 민족의 정신 회복 4. 민족 정신 회복은 압박하는 세력으로부터의 해방(解放)을 전제로 함
여기서 말하는 “외부 강압”은 사실상 조선총독부의 종교정책을 의미했다. 즉, 불교 개혁론을 빌어 ‘민족 해방’이라는 목표를 은유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신간회'
1920년대 후반, 일제의 산미증산계획·치안유지법 강화·민중 탄압이 극심해지자 국내 운동세력은 기존의 분열된 세력으로는 더 이상의 항일 행동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좌·우·종교·민족주의 세력을 하나로 묶는 대중적 연합단체 ‘신간회(新幹會)’이며, 그 탄생의 밑바탕에는 한용운의 결단과 조정 역할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신간회는 보통 “여운형·장지필·안재홍 중심”으로만 소개되지만, 실제 결성 직전의 내부 기록과 기사, 참가자들의 증언 등을 보면 한용운은 결성 과정 전체를 촉발하고 중심축을 형성한 핵심 주도자였다.
1926~1927년경 독립운동 진영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 민족주의 우익 계열(언론인·종교계·중간계층 지도자들), - 사회주의 계열(청년·노동·학생 중심의 조직들)
양쪽 모두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상호 불신·이념 대립 때문에 쉽사리 손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서 한용운은 세 가지 점에서 조정자이자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1. 불교계의 도덕적 권위자로 양 진영이 모두 부담 없이 접촉할 수 있는 인물 2.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 양쪽 모두와 개인적·사상적 네트워크 존재 3. 강한 ‘대중 계몽’·‘문화운동’ 지향이 사회주의 진영에게도 신뢰를 줌
이는 신간회 결성 과정에서 ‘중립적 중재자’가 필요했던 상황과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1927년 1~2월, 서울에서 열린 각종 공동대회·강연·조직 회합에서 한용운은 반복적으로 다음 두 가지 핵심 메시지를 제기했다. “독립운동의 방향을 통일해야 한다.” “대중의 힘을 모으려면 하나의 조직이 필요하다.” 언론 기록(조선일보·동아일보)과 당시 활동가들의 회고에 따르면, 이 시기 ‘각 세력의 통일 전선 필요성’을 가장 선명하게, 가장 강하게 주장한 인물은 한용운이었다. 특히 그는 다음과 같은 논리를 폈다. “이념이 다르다고 하나, 목적은 조국 자주에 있다.
그대들이 다투면, 전진할 세력이 흩어진다. 민족의 혼이 죽지 않으려면, 하나가 되어야 한다.”
이 논리는는 후에 신간회가 표방한 “정치적·경제적 민족단체의 연합”, “비타협적 민족주의”의 노선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러한 사항들 외에도 한용운은 다방면에서 신간회가 결성되는 데에 크게 이바지하였고 결성 직후 고문으로 추대되며 정신적 지도자로 자리매김하며 신간회의 방향성도 함께 잡아주었다.
'일제 검열 회피 상징시 창작'
일제 강점기 동안 한용운은 직접적 저항 표현이 대부분 금지된 상황에서, 상징·은유·불교적 언어를 활용한 시적 암호화 전략을 적극적으로 구사하였다. 특히 《님의 침묵》(1926)은 ‘님=조국’이라는 은유를 활용해 노골적 정치성을 숨기면서도 독립 의지를 전달한 대표적 사례로 평가된다.
1. '님’이라는 보편적 호칭에 독립 메시지 은폐 : 한용운은 자신의 문학 작품에서 ‘사랑하는 대상’, ‘부처’, ‘조국’ 등 다중적 의미를 생성하는 호명 방식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검열관이 보기에는 연정시·신앙시처럼 보이지만, 조선 독자들은 이를 민족 독립의 상징으로 읽을 수 있도록 하여 조선인들의 독립에 대한 의지를 일깨웠다. 2. 부재·기다림·침묵의 모티프를 통한 식민현실 비판
- 한용운의 작품에는 대표적으로 ‘침묵’, ‘부재’, ‘기다림’이라는 모티프가 자주 등장한다. 일본의 검열을 피할 수 있도록 연애 감정 또는 종교적 수행의 어휘로 포장되지만, 실제로는 강제적 침묵(=탄압), 부재한 조국(=식민지 현실), 독립의 도래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읽힌다는 점에서 은밀한 시대 비판 기능을 지니고 있는 장치들이다.
'일제의 불교 통제정책 비판'
1930년대 이후 한용운은 일제가 조선 불교를 더욱 강하게 통제하고, 사찰 운영과 승려 조직을 식민지 행정에 종속시키려 한 흐름 속에서 보다 직접적이고 공개적인 비판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시기 그의 행보는 단순한 종교개혁을 넘어, 종교·사상·문화 전반에 대한 식민 권력의 장악에 저항하는 정치적 실천으로 성격이 강화된다. 특히 1930년대는 일제의 군국주의 강화로 조선 종교계에 대한 통제가 한층 밀도 있어진 때였고, 이에 따라 한용운의 비판 역시 기존의 이론적 개혁론을 넘어서 불교계 현실에 대한 직설적 비판과 항일적 사상 투쟁으로 전환되었다.
1930년대 일제는 총독부 종교과를 중심으로 불교계를 일본 불교 종단의 지휘 체제에 편입시키려 했고, 군국주의 선전 매체로 활용하려고 하는 정책을 강화하였다. 이 시기 한용운은 일제가 불교를 “국가종교적 동원 기구”로 변질시키는 과정에 대해 강한 문제의식을 드러냈다. 그는 일제의 정책이 사찰을 행정 하부기관으로 만들고, 승려를 군국주의 동원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특히 1930년대는 조선 불교의 지도부 일부가 친일적 태도를 취하거나 총독부 정책에 협력하면서 교단의 자주성이 크게 훼손된 시기로, 한용운은 이를 불교 본래의 자유·해탈 정신의 파괴라고 규정하였다.
또한 1930년대 후반 불교계는 일본식 법의(法衣) 착용 강요, 일본 종단식 의례 도입, 신사참배를 간접 강요하는 등 친일화되는 움직임이 다수 포착되었다. 한용운은 이러한 친일적 흐름을 내부에서 적극적으로 비판하며, 특히 “승려가 국가주의 이념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반복적으로 주장했다. 그는 불교계 지도층이 총독부와 협력하며 ‘전통·계율·민족’을 동시에 저버렸다고 강하게 비난했고, 이는 결국 조선 불교의 자주성을 온전히 회복해야 한다는 그의 사상적 방향성과 연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