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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의 불교 타임라인'''== | =='''한용운의 불교 타임라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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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출가와 초기 수행'''== | ||
| + | ===''<font color="#9933ff"> 설악산에서의 초기 수행 </font>''=== | ||
| + | 한용운은 20대 초반이던 '''1896년경''', 세속의 삶을 과감히 버리고 설악산 깊숙한 오세암에 입산함으로써 본격적인 수행자의 길에 들어섰다. 당시 그의 속명은 '''정옥'''이었으며, 출가와 함께 법명 '''「용운(龍雲)」'''을 받고, 이후 사상가·문인으로 활동하면서는 호 '''「만해(萬海)」'''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 출가는 단순한 가족·사회 관계의 단절이 아니라, 급변하는 조선 말기 사회 속에서 인간 존재와 세계의 본질을 직접 파고들려는 지적·영적 결단으로 볼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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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출가 직후 한용운은 '''백담사·오세암·금강산 유점사''' 등 설악산과 금강산 일대의 여러 사찰을 돌며 혹독한 고행과 경전 공부를 병행했다. 그는 눈과 바람이 거센 산간 사찰에서 장기간 머물며, 특히 대승불교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span style="background:yellow">'''<big>[[공(空)]]</big><big><big></big><big></big></big>'''</span>과 '''유심(唯心) 사상''', 그리고 만물이 서로 의존해 존재한다는 <span style="background:yellow">'''<big>[[연기(緣起)]]</big><big><big></big><big></big></big>'''</span>의 원리를 깊이 탐구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불교를 단순한 의식 종교가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는 철학적 프레임으로 받아들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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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 시기에 형성된 한용운의 기본 태도는 세속과 출세간을 날카롭게 나누지 않는 데 있었다. 그는 산중에서 수행하면서도, 산 아래에서 고통받는 민중의 삶을 무시할 수 없다고 느꼈다. 그래서 일찍부터 '''“진리는 세속 밖에만 있지 않다”'''는 생각을 품었고, 진리는 일상과 역사, 민중의 현실 속에서 구현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훗날 그의 독립운동과 문학, 불교 개혁 사상은 모두 이때 싹튼 이러한 문제의식 위에서 전개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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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본격 불교 개혁운동'''== | ||
| + | ===''<font color="#9933ff"> 『조선불교유신론』과 근대 불교 구상 </fon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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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세기 초 조선 불교는 일제의 식민 통치 아래 '''일본식 사찰 제도'''와 행정 체계를 강요받고 있었다. 사찰 재정은 불투명했고, 일부 승려들은 권력과 타협하거나 사적 이익을 추구하며 종교적 신뢰를 잃어가고 있었다. 한용운은 이러한 현실을 단순한 종단 내부의 위기가 아니라, 민족 정신이 쇠퇴해가는 징후로 인식하였다. 그에게 불교의 쇠락은 곧 조선 사회 전체의 도덕·정신적 기초가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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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에 대한 응답으로 1913년에 발표된 <span style="background:yellow">'''<big>[[『조선불교유신론』]]</big><big><big></big><big></big></big>'''</span>은 조선 불교 근대화의 방향을 제시한 선언서로 평가된다. 이 저술에서 한용운은 첫째, 불교가 국가 권력과 타 종교의 영향에서 벗어난 '''자주성'''을 회복해야 하며, 둘째, 승가 교육을 정비하여 시대를 읽을 수 있는 '''근대적 지성'''을 갖춘 승려를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셋째, 불교는 사찰과 승려에만 머무는 종교가 아니라, 도시와 농촌의 '''민중과 함께하는 대중불교'''가 되어야 하며, 넷째, 일제의 통제 아래 도입된 일본식 제도를 거부하고 '''조선 불교의 고유 전통'''을 재정립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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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러한 이론적 주장에 그치지 않고, 그는 <span style="background:yellow">'''<big>[[조선불교청년회(1920)]]</big><big><big></big><big></big></big>'''</span>, '''조선불교유신회''', '''조선불교청년동맹''' 등을 조직하여 강연·출판·교육 활동을 전개하였다. 청년 승려와 재가 신도들을 모아 세미나와 토론회를 열고, 새로운 교리 교육과 사회 참여 방식을 모색하면서 불교를 통한 '''민족 자각 운동'''을 실제로 추진하였다. 한용운에게 불교 개혁은 곧 민족 해방을 향한 정신적 기반을 구축하는 작업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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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font color="#9933ff"> 조선 불교 개혁의 핵심 내용 </font>''=== | ||
| + | {| class="wikitable" | ||
| + | |+ '''한용운의 시각에서 본 조선 불교 개혁의 핵심 방향''' | ||
| + | ! 구분 !! 당시 문제점 !! 한용운이 제시한 개혁 방향 !! 핵심 키워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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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종단 구조 || 일제의 통제, 일본식 사찰 제도 확산 || 조선 불교 고유 전통 회복, 자주적 운영 || 자주성, 전통 회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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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승려 교육 || 교리 이해 부족, 경전 연구·사유의 약화 || 체계적 교육, 철학·역사·시대 인식 강화 || 근대적 승가 교육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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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신앙 방식 || 의례 중심, 민중과의 거리감 || 도시·농촌 민중과 함께하는 대중불교 || 민중불교, 생활 속 불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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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사회 역할 || 식민 권력과의 타협, 소극적 태도 || 민족의 정신적 지주이자 독립운동의 기반 || 민족 자각, 실천적 종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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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행자이자 사상가의 삶'''== | ||
| + | ===''<font color="#9933ff"> 옥중 수행과 사상 정립 </fon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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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한용운은 역사적으로는 독립운동가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그의 삶의 중심에는 언제나 '''수행승(修行僧)'''으로서의 자기 규율이 자리 잡고 있었다. 3·1운동을 비롯한 여러 독립운동에 참여하면서 그는 여러 차례 투옥되었지만, 감옥 안에서도 명상과 독경을 멈추지 않았다. 차갑고 열악한 감옥 환경 속에서도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신이 믿는 진리의 내용을 더욱 또렷하게 다듬어 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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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옥중에서 그는 경전 구절을 새롭게 해석하고, 현실 역사와 연결하여 사유하며, 이러한 결과를 정리하여 <span style="background:yellow">'''<big>[[『불교대전』]]</big><big><big></big><big></big></big>'''</span>'''과 같은 저술을 남겼다. 이 작업은 단순한 주석 작업을 넘어, 불교 교리를 근대 조선의 언어와 문제의식으로 재구성한 시도였다. 즉, 한용운은 수행승·사상가·실천가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면서, 불교가 시대의 고통과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를 모색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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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그에게 불교는 도피의 철학이 아니었다. 그는 불교를 통해 개인의 해탈만을 추구하는 길을 거부하고, '''고통받는 사회와 민족을 구제하는 실천의 철학'''으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그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일관되게 견지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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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진리를 깨닫는 일과 조국을 구하는 일은 다르지 않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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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 짧은 명제에는, 불교적 해탈과 민족적 해방을 동일한 차원의 ‘구원’으로 바라보는 한용운의 독창적 시각이 압축되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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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불교적 시세계로의 확장'''== | ||
| + | ===''<font color="#9933ff"> 『님의 침묵』에 스며든 불교 사상 </font>''=== | ||
| + | 한용운의 대표 시집 '''『님의 침묵』'''은 흔히 민족 저항 문학으로 읽히지만, 그 심층에는 그의 불교 수행과 사상이 깊게 뿌리내려 있다. 이 작품에서 '''「님」'''은 단일한 대상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부처·진리·조국'''을 동시에 가리키는 중층적 상징으로 기능한다. 개인적 사랑의 상실, 진리와의 거리, 조국 상실의 슬픔이 한 상징 안에 겹쳐져 있기 때문에, 독자는 이 시를 사랑시이면서 동시에 종교시·민족시로 읽게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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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또한 제목과 시 전반에 반복되는 '''「침묵」'''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말을 잃은 상태가 아니라, 언어적 분별과 집착을 내려놓은 '''공(空)의 상태'''를 상징한다. 시 속에서 화자는 상실과 그리움을 말하면서도, 결국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차원에 대한 직감을 드러낸다. 이는 불교 수행에서 중요한 태도인 '''무아(無我)''', '''집착의 소멸''', '''연기적 관계성''' 등을 시적 이미지로 번역한 결과라 할 수 있다. | ||
| − | + | 따라서 『님의 침묵』은 한 수행승이 자신의 깨달음과 시대적 고통을 시의 언어로 옮겨 적은 일종의 ‘시적 명상록’이라고도 볼 수 있다. 종교와 문학, 개인과 민족, 사랑과 해탈이 뒤섞인 독특한 시세계는, 조선 근대 문학사에서 한용운을 특별한 위치에 올려놓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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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font color="#9933ff"> 불교 개념과 시적 상징 대응표 </fon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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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 class="wikitable" |
| − | + | |+ '''『님의 침묵』 속 불교 사상과 시적 표현 대응''' | |
| − | + | ! 불교 개념 !! 시 속 상징/표현 !! 의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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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공(空) || 침묵, 여백, 부재의 이미지 || 언어와 집착을 비워내는 상태, 분별 이전의 자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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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무아(無我) || ‘나’의 소멸, 님과의 합일 갈망 || 고정된 자아를 내려놓고 전체와 하나 되려는 욕망 | ||
| + | |- | ||
| + | | 연기(緣起) || 자연·조국·님이 뒤섞인 이미지 || 모든 존재가 서로 얽혀 성립한다는 관계성 | ||
| + | |- | ||
| + | | 해탈 || 이별의 넘어선 깨달음, 체념 아닌 수용 || 고통을 통과한 뒤 도달하는 자유와 평정 | ||
| + | |} | ||
| − | + | → 이 표는 독자가 시를 읽을 때 불교 사상과 상징 구조를 한 번에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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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불교적 삶'''== | =='''말년의 불교적 삶'''== | ||
| − | ===''<font color="#9933ff"> | + | ===''<font color="#9933ff"> 심우장에서의 청빈한 일상</fon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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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3·1운동 이후 지속적인 감시를 받던 한용운은 서울 '''성북동 심우장(心友莊)'''에 머물며 조용한 일상을 보냈다. 심우장은 단순한 거주지가 아니라, 그가 추구한 정신적 태도의 공간적 상징이었다. 이름 그대로 '''“마음의 벗이 머무는 집”'''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한용운은 이곳에서 소규모의 벗들과 교류하면서 수행과 저술을 계속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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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말년에 이르기까지 그는 '''육식을 평생 금지'''하고, 검소한 식생활과 청빈한 생활태도를 지켰다. 규칙적인 명상과 독경을 이어가며, 하루의 많은 시간을 글쓰기와 사유에 할애했다. 그는 화려한 승려복이나 장식품을 멀리하고, 늘 소박한 승복 차림으로 생활했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그가 불교를 단순한 교리나 의식의 차원이 아니라, '''생활 전반을 관통하는 수행'''으로 이해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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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1944년 입적'''에 이르기까지 한용운은 심우장에서 조용히 글을 쓰고 제자를 만나며 생을 마무리했다. 그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생각은, 불교가 세속을 떠나 개인의 구원만을 추구하는 길이 아니라, 오히려 '''세속을 구제하고 함께 변화시키는 길'''이어야 한다는 믿음이었다. 출가와 초기 수행, 불교 개혁과 독립운동, 시를 통한 사상 표현과 심우장의 청빈한 일상까지, 한용운의 삶은 이 신념을 끝까지 실천해 나간 한 수행승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 |
2025년 12월 3일 (수) 17:42 기준 최신판
목차
한용운의 불교 타임라인
한용운의 수행 공간 지도
지도로 한눈에 보는 수행 공간
출가와 초기 수행
설악산에서의 초기 수행
한용운은 20대 초반이던 1896년경, 세속의 삶을 과감히 버리고 설악산 깊숙한 오세암에 입산함으로써 본격적인 수행자의 길에 들어섰다. 당시 그의 속명은 정옥이었으며, 출가와 함께 법명 「용운(龍雲)」을 받고, 이후 사상가·문인으로 활동하면서는 호 「만해(萬海)」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 출가는 단순한 가족·사회 관계의 단절이 아니라, 급변하는 조선 말기 사회 속에서 인간 존재와 세계의 본질을 직접 파고들려는 지적·영적 결단으로 볼 수 있다.
출가 직후 한용운은 백담사·오세암·금강산 유점사 등 설악산과 금강산 일대의 여러 사찰을 돌며 혹독한 고행과 경전 공부를 병행했다. 그는 눈과 바람이 거센 산간 사찰에서 장기간 머물며, 특히 대승불교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공(空)과 유심(唯心) 사상, 그리고 만물이 서로 의존해 존재한다는 연기(緣起)의 원리를 깊이 탐구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불교를 단순한 의식 종교가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는 철학적 프레임으로 받아들였다.
이 시기에 형성된 한용운의 기본 태도는 세속과 출세간을 날카롭게 나누지 않는 데 있었다. 그는 산중에서 수행하면서도, 산 아래에서 고통받는 민중의 삶을 무시할 수 없다고 느꼈다. 그래서 일찍부터 “진리는 세속 밖에만 있지 않다”는 생각을 품었고, 진리는 일상과 역사, 민중의 현실 속에서 구현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훗날 그의 독립운동과 문학, 불교 개혁 사상은 모두 이때 싹튼 이러한 문제의식 위에서 전개되었다.
본격 불교 개혁운동
『조선불교유신론』과 근대 불교 구상
20세기 초 조선 불교는 일제의 식민 통치 아래 일본식 사찰 제도와 행정 체계를 강요받고 있었다. 사찰 재정은 불투명했고, 일부 승려들은 권력과 타협하거나 사적 이익을 추구하며 종교적 신뢰를 잃어가고 있었다. 한용운은 이러한 현실을 단순한 종단 내부의 위기가 아니라, 민족 정신이 쇠퇴해가는 징후로 인식하였다. 그에게 불교의 쇠락은 곧 조선 사회 전체의 도덕·정신적 기초가 흔들리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1913년에 발표된 『조선불교유신론』은 조선 불교 근대화의 방향을 제시한 선언서로 평가된다. 이 저술에서 한용운은 첫째, 불교가 국가 권력과 타 종교의 영향에서 벗어난 자주성을 회복해야 하며, 둘째, 승가 교육을 정비하여 시대를 읽을 수 있는 근대적 지성을 갖춘 승려를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셋째, 불교는 사찰과 승려에만 머무는 종교가 아니라, 도시와 농촌의 민중과 함께하는 대중불교가 되어야 하며, 넷째, 일제의 통제 아래 도입된 일본식 제도를 거부하고 조선 불교의 고유 전통을 재정립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이론적 주장에 그치지 않고, 그는 조선불교청년회(1920), 조선불교유신회, 조선불교청년동맹 등을 조직하여 강연·출판·교육 활동을 전개하였다. 청년 승려와 재가 신도들을 모아 세미나와 토론회를 열고, 새로운 교리 교육과 사회 참여 방식을 모색하면서 불교를 통한 민족 자각 운동을 실제로 추진하였다. 한용운에게 불교 개혁은 곧 민족 해방을 향한 정신적 기반을 구축하는 작업이었다.
조선 불교 개혁의 핵심 내용
| 구분 | 당시 문제점 | 한용운이 제시한 개혁 방향 | 핵심 키워드 |
|---|---|---|---|
| 종단 구조 | 일제의 통제, 일본식 사찰 제도 확산 | 조선 불교 고유 전통 회복, 자주적 운영 | 자주성, 전통 회복 |
| 승려 교육 | 교리 이해 부족, 경전 연구·사유의 약화 | 체계적 교육, 철학·역사·시대 인식 강화 | 근대적 승가 교육 |
| 신앙 방식 | 의례 중심, 민중과의 거리감 | 도시·농촌 민중과 함께하는 대중불교 | 민중불교, 생활 속 불교 |
| 사회 역할 | 식민 권력과의 타협, 소극적 태도 | 민족의 정신적 지주이자 독립운동의 기반 | 민족 자각, 실천적 종교 |
수행자이자 사상가의 삶
옥중 수행과 사상 정립
한용운은 역사적으로는 독립운동가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그의 삶의 중심에는 언제나 수행승(修行僧)으로서의 자기 규율이 자리 잡고 있었다. 3·1운동을 비롯한 여러 독립운동에 참여하면서 그는 여러 차례 투옥되었지만, 감옥 안에서도 명상과 독경을 멈추지 않았다. 차갑고 열악한 감옥 환경 속에서도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신이 믿는 진리의 내용을 더욱 또렷하게 다듬어 갔다.
옥중에서 그는 경전 구절을 새롭게 해석하고, 현실 역사와 연결하여 사유하며, 이러한 결과를 정리하여 『불교대전』과 같은 저술을 남겼다. 이 작업은 단순한 주석 작업을 넘어, 불교 교리를 근대 조선의 언어와 문제의식으로 재구성한 시도였다. 즉, 한용운은 수행승·사상가·실천가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면서, 불교가 시대의 고통과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를 모색하였다.
그에게 불교는 도피의 철학이 아니었다. 그는 불교를 통해 개인의 해탈만을 추구하는 길을 거부하고, 고통받는 사회와 민족을 구제하는 실천의 철학으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그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일관되게 견지했다.
- “진리를 깨닫는 일과 조국을 구하는 일은 다르지 않다.”
이 짧은 명제에는, 불교적 해탈과 민족적 해방을 동일한 차원의 ‘구원’으로 바라보는 한용운의 독창적 시각이 압축되어 있다.
불교 활동과 저술 시기별 변화 그래프
불교적 시세계로의 확장
『님의 침묵』에 스며든 불교 사상
한용운의 대표 시집 『님의 침묵』은 흔히 민족 저항 문학으로 읽히지만, 그 심층에는 그의 불교 수행과 사상이 깊게 뿌리내려 있다. 이 작품에서 「님」은 단일한 대상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부처·진리·조국을 동시에 가리키는 중층적 상징으로 기능한다. 개인적 사랑의 상실, 진리와의 거리, 조국 상실의 슬픔이 한 상징 안에 겹쳐져 있기 때문에, 독자는 이 시를 사랑시이면서 동시에 종교시·민족시로 읽게 된다.
또한 제목과 시 전반에 반복되는 「침묵」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말을 잃은 상태가 아니라, 언어적 분별과 집착을 내려놓은 공(空)의 상태를 상징한다. 시 속에서 화자는 상실과 그리움을 말하면서도, 결국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차원에 대한 직감을 드러낸다. 이는 불교 수행에서 중요한 태도인 무아(無我), 집착의 소멸, 연기적 관계성 등을 시적 이미지로 번역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님의 침묵』은 한 수행승이 자신의 깨달음과 시대적 고통을 시의 언어로 옮겨 적은 일종의 ‘시적 명상록’이라고도 볼 수 있다. 종교와 문학, 개인과 민족, 사랑과 해탈이 뒤섞인 독특한 시세계는, 조선 근대 문학사에서 한용운을 특별한 위치에 올려놓는다.
불교 개념과 시적 상징 대응표
| 불교 개념 | 시 속 상징/표현 | 의미 |
|---|---|---|
| 공(空) | 침묵, 여백, 부재의 이미지 | 언어와 집착을 비워내는 상태, 분별 이전의 자리 |
| 무아(無我) | ‘나’의 소멸, 님과의 합일 갈망 | 고정된 자아를 내려놓고 전체와 하나 되려는 욕망 |
| 연기(緣起) | 자연·조국·님이 뒤섞인 이미지 | 모든 존재가 서로 얽혀 성립한다는 관계성 |
| 해탈 | 이별의 넘어선 깨달음, 체념 아닌 수용 | 고통을 통과한 뒤 도달하는 자유와 평정 |
→ 이 표는 독자가 시를 읽을 때 불교 사상과 상징 구조를 한 번에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말년의 불교적 삶
심우장에서의 청빈한 일상
3·1운동 이후 지속적인 감시를 받던 한용운은 서울 성북동 심우장(心友莊)에 머물며 조용한 일상을 보냈다. 심우장은 단순한 거주지가 아니라, 그가 추구한 정신적 태도의 공간적 상징이었다. 이름 그대로 “마음의 벗이 머무는 집”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한용운은 이곳에서 소규모의 벗들과 교류하면서 수행과 저술을 계속했다.
말년에 이르기까지 그는 육식을 평생 금지하고, 검소한 식생활과 청빈한 생활태도를 지켰다. 규칙적인 명상과 독경을 이어가며, 하루의 많은 시간을 글쓰기와 사유에 할애했다. 그는 화려한 승려복이나 장식품을 멀리하고, 늘 소박한 승복 차림으로 생활했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그가 불교를 단순한 교리나 의식의 차원이 아니라, 생활 전반을 관통하는 수행으로 이해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1944년 입적에 이르기까지 한용운은 심우장에서 조용히 글을 쓰고 제자를 만나며 생을 마무리했다. 그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생각은, 불교가 세속을 떠나 개인의 구원만을 추구하는 길이 아니라, 오히려 세속을 구제하고 함께 변화시키는 길이어야 한다는 믿음이었다. 출가와 초기 수행, 불교 개혁과 독립운동, 시를 통한 사상 표현과 심우장의 청빈한 일상까지, 한용운의 삶은 이 신념을 끝까지 실천해 나간 한 수행승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