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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주제== | ||
| − | <font color="##6A5ACD"><div style="text-align:center">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외교 창구 변천-- | + | <font color="##6A5ACD"><div style="text-align:center"> 고려에서 조선으로의 외교 창구 변천--통문관(通文館)과 사역원(司譯院)을 중심으로</font></div> |
==기획의도== | ==기획의도== | ||
| − | '''본 연구는 고려 | + | '''본 연구는 고려 후기 통문관(通文館)에서 조선시대 사역원(司譯院)으로 이어지는 외교·통역 전담 관청의 변천 과정을 고찰한다. 단순한 기관의 역사를 넘어, 통역 인재 양성 방식의 변화, 역관(譯官)의 지위와 역할 확대, 그리고 이를 집대성한 기록물(『통문관지』)의 가치를 조명함으로써 한국 외교 통역 관청의 역사 발전 흐름을 규명하고자 한다.''' |
==통문관과 사역원== | ==통문관과 사역원== | ||
===통문관=== | ===통문관=== | ||
====설립 배경==== | ====설립 배경==== | ||
| − | 1276년 ([https://ko.wikipedia.org/wiki/%EC%B6%A9%EB%A0%AC%EC%99%95 충렬왕2])참문학사(參文學事) | + | 통문관(通文館)은 1276년 ([https://ko.wikipedia.org/wiki/%EC%B6%A9%EB%A0%AC%EC%99%95 충렬왕2])참문학사(參文學事) 김구의 건의로, 당시 통역관인 설인(舌人)이 대부분 미천한 신분으로 지식이 풍부하지 못하고 또 통역할 때 사리(私利)를 도모하는 등의 폐단이 있어 이를 시정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다. |
====주요 인물==== | ====주요 인물==== | ||
| − | 김구([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8749 金坵], 1211~1278)는 고려 후기의 | + | 김구([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8749 金坵], 1211~1278)는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대몽항쟁기와 원 간섭기 초기의 혼란한 시기에 외교 문서를 작성하며 나라의 외교를 이끌었던 인물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17세에 국자감시에 합격하고, 22세에 예부시에 2등으로 급제하여 관리의 길에 들어섰다. 그러나 고향 사람의 모함으로 인해 제주도로 좌천되는 등 젊은 시절에는 많은 풍파를 겪었다. 제주에서 토지를 정비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공을 세운 뒤 개경으로 돌아와 한림원 관리로 복귀하였으며, 1240년에는 서장관으로 몽골에 파견되는 사절단에 참여하였다. 집권자 최항의 노여움을 사 좌천되기도 했지만, 최씨 정권이 몰락한 뒤 다시 조정에 등용되어 외교 분야에서 큰 활약을 펼쳤다. 그는 태자(훗날 원종)의 몽골 입조 때 고주표(告奏表)를 작성하였고, 이후 쿠빌라이 칸 즉위 축하문 등 주요 외교문서를 맡아 작성하며 고려의 입장을 논리적이고 품격 있게 전달하였다. 그의 외교문서는 원의 관리들로부터도 아름답고 이치에 맞는 글이라는 칭찬을 받았고, 원종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김구를 좌간의대부로 임명하였다.<p> |
| − | + | 김구는 외교 인재 양성의 중요성을 깨닫고, 관리들이 직접 한어(漢語)를 익혀 외교 사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통문관(通文館)을 설치하였다. 이는 훗날 조선시대 사역원 제도의 기초가 되었다. 그는 이후 상서좌복야, 추밀원부사, 정당문학, 이부상서, 참지정사 등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하며 국정 운영에 참여하였고, 신종·희종·강종·고종의 실록 편찬에도 관여하였다. 또한 권세가 강윤소를 탄핵하는 등 올곧은 성품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충렬왕 때는 세자의 스승으로 임명되었다.1278년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충렬왕은 친히 조문하고 장례를 예우했으며 시호를 ‘문정(文貞)’이라 내렸다. 젊은 시절의 역경을 극복하고, 학문과 외교 능력으로 고려의 국위를 높인 김구는 성실하고 강직한 충신으로 후대에 길이 기억되고 있다. 대표 문집으로 『지포집([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4447 止浦集])』이 전해진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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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역할==== | ====주요 역할==== | ||
비서성(秘書省)·사관(史館)·한림원(翰林院)·보문각(寶文閣)·어서원(御書院)·동문원(同文院) 등 금내학관([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7642 禁內學官])의 6품 이하직에 있는 40세 미만자를 선발하여 한어(또는 몽고어)를 습득하게 함으로써 통역사무의 질적 향상을 꾀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 역관으로 원나라 있는 고려인이나 내주자(來住者)들이 역인으로서 대부분의 통역실무를 맡았으므로 통문관을 통한 역관교육의 실효성은 의심스럽다. | 비서성(秘書省)·사관(史館)·한림원(翰林院)·보문각(寶文閣)·어서원(御書院)·동문원(同文院) 등 금내학관([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7642 禁內學官])의 6품 이하직에 있는 40세 미만자를 선발하여 한어(또는 몽고어)를 습득하게 함으로써 통역사무의 질적 향상을 꾀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 역관으로 원나라 있는 고려인이나 내주자(來住者)들이 역인으로서 대부분의 통역실무를 맡았으므로 통문관을 통한 역관교육의 실효성은 의심스럽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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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원=== | ===사역원=== | ||
====설립 배경==== | ====설립 배경==== | ||
| − | + | 사역원(司譯院)은[1393년(태조 2) ~ 1894년(고종 31) ]고려 · 조선시대 사대교린([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5448 事大交隣])에 필요한 외국어 및 통역 인재 등 양성을 위해 설립된 외국어의 통역과 번역에 관한 일을 관장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관서이다. | |
| + | 사역원은 조선시대 외국어 교육과 통역 실무 등을 담당하였다. 고려시대에는 통문관이 있어서 외국어 교육만 담당하였는데, 조선시대에 와서 통역 실무까지 맡은 사역원을 별도로 설립하였다. 사역원은 ‘사대교린(事大交隣)’이라는 국가의 외교 방침을 수행하기 위해 주변 국가들의 언어를 익히고 통역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에 따라 중국어인 한학(漢學)을 비롯하여, 몽골어인 몽학(蒙學), 만주어인 여진학(女眞學, 淸學), 일본어인 왜학(倭學)을 구분하여 관리하였다. 사역원 관원은 대부분 역과(譯科)에 합격한 중인들로 조선시대의 외교 실무관들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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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주요 인물==== | ||
| + | =====김지남===== | ||
| + | 김지남은 조선후기 지중추부사로 『신전자초방』, 『동사록』, 『통문관지』 등을 저술한 역관.1671년(현종 12) 역과에 급제하고, 1682년(숙종 8) 역관으로 일본과 청나라에 다녀왔다. 1692년 부사로 연경에 가는 민취도(閔就道)를 역관으로 수행했는데, 김지남의 권유로 자초법(煮硝法: 화약을 만드는 흙을 달이는 법)을 알아내기 위해 요양(遼陽)의 어느 시골집에 찾아가 사례금을 주고 방법을 배우던 중 갑자기 주인이 죽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당시 중국에서는 자초법을 국법으로 엄금했기 때문에 이를 알아내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다시 진하사(進賀使) 일행으로 청나라에 갔으며, 그 뒤에도 역관으로 중국을 방문할 때마다 되풀이해 물어 결국 그 방법을 알아냈다. 그리하여 1694년 이를 실험한 결과 성공했으나, 김지남을 지원하던 민취도가 평안도관찰사로 전근되어 더 이상 진척을 보지 못하였다.<p> | ||
| + | 1698년 병기창고 도제조 남구만(南九萬)의 지시에 따라 자초법에 따라 화약을 제조하였다. 성과가 매우 크자 숙종의 윤허를 얻어 제조법을 수록한 『신전자초방(新傳煮硝方)』을 저술해 군기시에서 간행, 반포하였다. 이 책은 1796년(정조 20) 정조에 의해 ‘금석(金石)과 같은 성헌(成憲)’이라고 높이 평가받았다.그러한 공로가 인정되어 숙종이 높은 벼슬을 제수하려 했으나, 양사(兩司)에서 벼슬의 귀중함을 들어 역관에게 동서반 실직(實職)의 제수는 부당하다고 반대해 외직인 문성첨사(文城僉使)에 임명되었다.1712년 청나라와 국경선을 확정짓기 위해 양국 대표가 회동할 때, 아들 김경문(金慶門)과 함께 수행해 청나라 대표 목극등(穆克登)을 상대로 하여 백두산정계비를 세우는 데 공이 컸다. 문사(文詞)와 중국어에 유창해 1714년에는 역관으로 사신을 수행하면서 보고들은 사실들을 참고로 하여 사대와 교린의 외교에 관한 연혁·역사·행사·제도 등을 체계화한 『통문관지(通文館志)』를 아들과 함께 편찬하였다.<p> | ||
| + | 이는 당시 외교에 종사하던 중신(重臣)·사절·역관 등 실무진의 편람(便覽) 및 사서(辭書)의 구실을 하는 필수서가 되었고, 국내뿐만 아니라 청나라와 일본에까지 유포되어 그곳 외교관에게도 우리 나라에 관한 지침서가 되었다. 벼슬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저서로 『신전자초방(新傳煮硝方)』·『동사록(東槎錄)』이 있고, 편서로는 『통문관지(通文館志)』가 있다.<p> | ||
| + | =====김경문===== | ||
| + | 김경문은 조선 후기 조선과 청나라 간의 외교적 사안을 담당한 역관이며 아버지는 김지남(金指南)이다.1690년(숙종 16)에 18세에 역과에 한학(漢學)으로 장원 급제주1한 후 영조대까지 역관으로 크게 활약하였다. 1711년(숙종 37) 위원(渭原)주2 백성이 청나라로 월경(越境)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재자관(賫咨官)주3으로 차출되어 양국의 외교 문제를 조율하였고, 임무 수행 중에 청의 군제(軍制)와 정치 상황 등을 자세히 적어서 보고하였다. | ||
| + | 특히 1712년(숙종 38) 강희제(康熙帝)가 목극등(穆克登)을 파견하여 국경선을 확정하려 하자, 특별히 부친 김지남과 함께 접반사(接伴使)주5로 임명되었다. 그는 목극등 일행이 백두산정계비([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2058 白頭山定界碑])를 세울 때 통역과 응대를 담당하였으며, 조정으로 돌아와서는 백두산 국경지대의 지도를 바쳐서 공로를 치하받았다.<p> | ||
| + | 뇌물을 많이 받아 탄핵되기도 하였으나, 1720년(경종 즉위년)에 무기 재료인 궁각(弓角)의 무역, 1722년(경종 2)에 연행사(燕行使)주6를 보좌하는 상인인 난두(欄頭)주7의 폐해 일소주8, 1724년(영조 즉위년) 조공품의 감축, 1725년(영조 1)에 국경 문제의 추론, 1727년(영조 3년)에 조선 상인이 청 호상(豪商)주9에게 진 채무 문제 해결 등 여러 외교 문제를 해결한 공로로 통정대부(通政大夫)주10, 가의대부(嘉義大夫)주11를 거쳐 자헌대부(資憲大夫)주12에 승진하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주13를 받게 되었다.<p> | ||
| + | |||
====주요 역할==== | ====주요 역할==== | ||
| − | 조선시대 | + | 조선시대 사역원(司譯院)은 두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사대교린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한어(漢語), 몽어(蒙語), 여진어(女眞語), 왜어(倭語) 등 외국어를 교육하는 교육 기관으로서의 기능이다. 둘째는 외국어의 통역과 번역 등을 맡아보는 일반 관부(官府)로서의 기능이다.<p> |
| + | 사역원은 조선시대 ‘사대교린(事大交隣)’의 외교 원칙을 수행하기 위해 설치된 관서로, 외국과의 통역 및 외교 실무를 전담하고 외국어 인재를 양성하는 역할을 맡았다. 고려 후기 통문관에서 비롯된 사역원은 조선 태조 때 다시 설치되어 한어, 몽어, 왜어, 여진어 등 4개 언어의 교육과 통역을 담당하였다. 사역원은 단순한 통역 기관이 아니라 외국어 교육기관으로서 교수와 훈도 같은 교육 관직을 두었으며, 생도를 선발해 전문적인 외국어 교육을 실시하였다. 생도들은 『노걸대』, 『박통사』, 『역어지남』 등의 교재로 학습하고, 취재나 역과를 통해 역관으로 진출하였다.<p> | ||
| + | 또한 사역원은 외국 사신의 접대와 외교 사행 시 통역 실무를 담당하여, 명·일본·여진 등 주변국과의 외교 관계 유지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관제상으로는 정3품 아문으로, 실무는 잡과 출신의 중인 역관들이 담당하였고, 도제조와 제조 등 문과 출신 관리가 겸직으로 이를 감독하였다. 사역원은 이처럼 외국어 교육과 통역, 외교 실무를 통합적으로 운영한 국가 전문기관으로서, 조선의 대외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국경 외교를 수행하는 데 중추적인 기능을 담당하였다. 조선 말기 외무아문([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9241 外務衙門])으로 통합되었다. | ||
| + | |||
====통문관지==== | ====통문관지==== | ||
| + | 통문관지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9322 通文館志])는 조선시대 통역 기관인 사역원(司譯院)의 연혁과 조직, 그리고 고대부터 외국과의 외교 및 통교 의례를 집대성한 대표적인 외교서이다.<p> | ||
| + | 초간본은 숙종 46년(1720)에 역관 김지남(金指南)이 아들 김경문(慶門)과 함께 편찬하였으며, 한학관 이선방(李先芳)·변정로(卞廷老)와 청학관 남덕창(南德昌) 등이 사재를 들여 간행한 8권 3책의 개주갑인자본(改鑄甲寅字本)이다. 이후 정조 2년(1778)에 이담(李湛)이 초간본을 증보하여 10권 4책의 목판본으로 중간하였고, 1881년과 1888년에 각각 속편이 더해져 최종적으로 12권 6책으로 완성되었다. 서문에서 김경문은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중국·요연·여진·일본 등과의 외교에서 많은 법례와 사례가 있었으나 이를 정리한 문헌이 없어 어려움이 많았다”며, 영의정 최석정(崔錫鼎)이 사역원 제조로 있을 때 김지남에게 고대의 외교 사례를 수집하고 정리하도록 명한 것이 편찬의 계기였다고 밝혔다.<p> | ||
| + | 내용은 권1 연혁편에서 사역원의 관제와 직제, 인사 변천을 다루었고, 권2 권장편에서는 입속과 승진, 과거, 원시, 취재 등 인사 제도를 정리하였다. 권3과 권4 사대편에서는 중국 사행 절차, 칙사 영접, 무역과 의식 등을 기록하였으며, 권5와 권6 교린편에서는 일본과 대마도와의 외교 관계, 통신사 파견, 조약, 접대 의례 등을 다루었다. 권7 인물편에는 조선 초기 이후의 주요 역관 인물들의 행적이 실려 있고, 권8은 사역원의 고사, 조직, 인장·교재 내력, 서적 목록 등을 수록하였다. 권9에서 권12까지는 기년편과 속편으로, 사대교린의 중요 외교 사건들을 연대순으로 정리하였다.<p> | ||
| + | 이 책은 조선시대 외교 체계와 사역원의 운영, 그리고 한·중·일 관계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 특히 개항기 이전 외교 제도의 변천과 국제 교섭의 실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의 정치·경제·문화 연구에도 폭넓게 활용되는 대표적인 외교 문헌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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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구성 및 주요 내용: | ||
| + | {|class="wikitable sortable" style="background-color:#B0C4DE" | ||
| + | ! | 권 !! | 주요내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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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div style="text-align:center;"> [[1권]]|| <div style="text-align:center;"> 사역원의 관제, 직제, 인사 제도, 등급 제도 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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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div style="text-align:center;"> [[2권]]|| <div style="text-align:center;"> 역관의 선발·승진·시험제도 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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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div style="text-align:center;"> [[3/4권]]|| <div style="text-align:center;"> 중국 사행 절차, 사신 접대, 무역·예식 관련 제도 | ||
| + | |- | ||
| + | |||
| + | |<div style="text-align:center;"> [[5/6권]]|| <div style="text-align:center;"> 일본·대마도와의 외교, 통신사, 서계·노정·접대 규정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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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div style="text-align:center;"> [[7권]]|| <div style="text-align:center;"> 공적이 있는 역관들의 행적 기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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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div style="text-align:center;"> [[8권]]|| <div style="text-align:center;"> 사역원의 제도, 물품, 문서·서적 목록 등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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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div style="text-align:center;"> [[9-12권]]|| <div style="text-align:center;"> 연대별 외교 사건 정리 및 개항기 교섭상 기록 | ||
| + | |} | ||
==연구의 의미== | ==연구의 의미== | ||
| − | '''통문관은 한국 역사상 최초의 공식 통역 교육기관으로, 언어를 매개로 한 외교 행정의 제도화를 의미한다. 조선시대의 사역원은 이를 계승하여 체계적 외국어 교육과 전문 통역 인재 양성을 담당하였으며,조선의 자주적 외교 수행과 국가 안보 확보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두 기관은 한국 외교사의 제도적 기초를 마련하고, 언어를 통한 국제 관계 형성의 역사적 토대를 | + | '''통문관은 한국 역사상 최초의 공식 통역 교육기관으로, 언어를 매개로 한 외교 행정의 제도화를 의미한다. 조선시대의 사역원은 이를 계승하여 체계적 외국어 교육과 전문 통역 인재 양성을 담당하였으며,조선의 자주적 외교 수행과 국가 안보 확보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두 기관은 한국 외교사의 제도적 기초를 마련하고, 언어를 통한 국제 관계 형성의 역사적 토대를 제공하였다는 점에서 연구의 의미가 있다고 본다.또한 통역사의 역할도 단순한 설인으로부터 다양한 영역의 전문가로 발전하는 모습을 확인 할 수 있다. ''' |
==Visualization== | ==Visualization==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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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화사전 https://encykorea.aks.ac.kr/ | ||
| + | 참고문헌:<p> | ||
| + | (1)전가람(Jeon Ga Ram). "고려 후기 金坵의 文翰外交와 通文館 설치." 대동한문학 48.- (2016): 57-86.<p> | ||
| + | (2)김남희. (2012). 통역의 역사 개관 - 고려시대까지. 통번역학연구, 16(1), 1-19.<p> | ||
| + | (3)김남희. (2012). 통역의 역사 개관 II (조선전기). 통번역학연구, 16(4), 25-53.<p> | ||
| + | (4)김남희. (2014). 통역의 역사 개관 III (조선 후기). 통번역학연구, 18(1), 1-39.<p> | ||
| + | 서적: <p> | ||
| + | (조선 최대 갑부)역관 / 이덕일 지음.<p> | ||
| + | 조선역관열전 : 입은 천 개의 칼을 지녔다 / 이상각 지음<p> | ||
2025년 12월 4일 (목) 11:46 기준 최신판
목차
주제
기획의도
본 연구는 고려 후기 통문관(通文館)에서 조선시대 사역원(司譯院)으로 이어지는 외교·통역 전담 관청의 변천 과정을 고찰한다. 단순한 기관의 역사를 넘어, 통역 인재 양성 방식의 변화, 역관(譯官)의 지위와 역할 확대, 그리고 이를 집대성한 기록물(『통문관지』)의 가치를 조명함으로써 한국 외교 통역 관청의 역사 발전 흐름을 규명하고자 한다.
통문관과 사역원
통문관
설립 배경
통문관(通文館)은 1276년 (충렬왕2)참문학사(參文學事) 김구의 건의로, 당시 통역관인 설인(舌人)이 대부분 미천한 신분으로 지식이 풍부하지 못하고 또 통역할 때 사리(私利)를 도모하는 등의 폐단이 있어 이를 시정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다.
주요 인물
김구(金坵, 1211~1278)는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대몽항쟁기와 원 간섭기 초기의 혼란한 시기에 외교 문서를 작성하며 나라의 외교를 이끌었던 인물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17세에 국자감시에 합격하고, 22세에 예부시에 2등으로 급제하여 관리의 길에 들어섰다. 그러나 고향 사람의 모함으로 인해 제주도로 좌천되는 등 젊은 시절에는 많은 풍파를 겪었다. 제주에서 토지를 정비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공을 세운 뒤 개경으로 돌아와 한림원 관리로 복귀하였으며, 1240년에는 서장관으로 몽골에 파견되는 사절단에 참여하였다. 집권자 최항의 노여움을 사 좌천되기도 했지만, 최씨 정권이 몰락한 뒤 다시 조정에 등용되어 외교 분야에서 큰 활약을 펼쳤다. 그는 태자(훗날 원종)의 몽골 입조 때 고주표(告奏表)를 작성하였고, 이후 쿠빌라이 칸 즉위 축하문 등 주요 외교문서를 맡아 작성하며 고려의 입장을 논리적이고 품격 있게 전달하였다. 그의 외교문서는 원의 관리들로부터도 아름답고 이치에 맞는 글이라는 칭찬을 받았고, 원종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김구를 좌간의대부로 임명하였다.
김구는 외교 인재 양성의 중요성을 깨닫고, 관리들이 직접 한어(漢語)를 익혀 외교 사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통문관(通文館)을 설치하였다. 이는 훗날 조선시대 사역원 제도의 기초가 되었다. 그는 이후 상서좌복야, 추밀원부사, 정당문학, 이부상서, 참지정사 등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하며 국정 운영에 참여하였고, 신종·희종·강종·고종의 실록 편찬에도 관여하였다. 또한 권세가 강윤소를 탄핵하는 등 올곧은 성품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충렬왕 때는 세자의 스승으로 임명되었다.1278년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충렬왕은 친히 조문하고 장례를 예우했으며 시호를 ‘문정(文貞)’이라 내렸다. 젊은 시절의 역경을 극복하고, 학문과 외교 능력으로 고려의 국위를 높인 김구는 성실하고 강직한 충신으로 후대에 길이 기억되고 있다. 대표 문집으로 『지포집(止浦集)』이 전해진다.
주요 역할
비서성(秘書省)·사관(史館)·한림원(翰林院)·보문각(寶文閣)·어서원(御書院)·동문원(同文院) 등 금내학관(禁內學官)의 6품 이하직에 있는 40세 미만자를 선발하여 한어(또는 몽고어)를 습득하게 함으로써 통역사무의 질적 향상을 꾀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 역관으로 원나라 있는 고려인이나 내주자(來住者)들이 역인으로서 대부분의 통역실무를 맡았으므로 통문관을 통한 역관교육의 실효성은 의심스럽다.
사역원
설립 배경
사역원(司譯院)은[1393년(태조 2) ~ 1894년(고종 31) ]고려 · 조선시대 사대교린(事大交隣)에 필요한 외국어 및 통역 인재 등 양성을 위해 설립된 외국어의 통역과 번역에 관한 일을 관장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관서이다. 사역원은 조선시대 외국어 교육과 통역 실무 등을 담당하였다. 고려시대에는 통문관이 있어서 외국어 교육만 담당하였는데, 조선시대에 와서 통역 실무까지 맡은 사역원을 별도로 설립하였다. 사역원은 ‘사대교린(事大交隣)’이라는 국가의 외교 방침을 수행하기 위해 주변 국가들의 언어를 익히고 통역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에 따라 중국어인 한학(漢學)을 비롯하여, 몽골어인 몽학(蒙學), 만주어인 여진학(女眞學, 淸學), 일본어인 왜학(倭學)을 구분하여 관리하였다. 사역원 관원은 대부분 역과(譯科)에 합격한 중인들로 조선시대의 외교 실무관들이었다.
주요 인물
김지남
김지남은 조선후기 지중추부사로 『신전자초방』, 『동사록』, 『통문관지』 등을 저술한 역관.1671년(현종 12) 역과에 급제하고, 1682년(숙종 8) 역관으로 일본과 청나라에 다녀왔다. 1692년 부사로 연경에 가는 민취도(閔就道)를 역관으로 수행했는데, 김지남의 권유로 자초법(煮硝法: 화약을 만드는 흙을 달이는 법)을 알아내기 위해 요양(遼陽)의 어느 시골집에 찾아가 사례금을 주고 방법을 배우던 중 갑자기 주인이 죽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당시 중국에서는 자초법을 국법으로 엄금했기 때문에 이를 알아내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다시 진하사(進賀使) 일행으로 청나라에 갔으며, 그 뒤에도 역관으로 중국을 방문할 때마다 되풀이해 물어 결국 그 방법을 알아냈다. 그리하여 1694년 이를 실험한 결과 성공했으나, 김지남을 지원하던 민취도가 평안도관찰사로 전근되어 더 이상 진척을 보지 못하였다.
1698년 병기창고 도제조 남구만(南九萬)의 지시에 따라 자초법에 따라 화약을 제조하였다. 성과가 매우 크자 숙종의 윤허를 얻어 제조법을 수록한 『신전자초방(新傳煮硝方)』을 저술해 군기시에서 간행, 반포하였다. 이 책은 1796년(정조 20) 정조에 의해 ‘금석(金石)과 같은 성헌(成憲)’이라고 높이 평가받았다.그러한 공로가 인정되어 숙종이 높은 벼슬을 제수하려 했으나, 양사(兩司)에서 벼슬의 귀중함을 들어 역관에게 동서반 실직(實職)의 제수는 부당하다고 반대해 외직인 문성첨사(文城僉使)에 임명되었다.1712년 청나라와 국경선을 확정짓기 위해 양국 대표가 회동할 때, 아들 김경문(金慶門)과 함께 수행해 청나라 대표 목극등(穆克登)을 상대로 하여 백두산정계비를 세우는 데 공이 컸다. 문사(文詞)와 중국어에 유창해 1714년에는 역관으로 사신을 수행하면서 보고들은 사실들을 참고로 하여 사대와 교린의 외교에 관한 연혁·역사·행사·제도 등을 체계화한 『통문관지(通文館志)』를 아들과 함께 편찬하였다.
이는 당시 외교에 종사하던 중신(重臣)·사절·역관 등 실무진의 편람(便覽) 및 사서(辭書)의 구실을 하는 필수서가 되었고, 국내뿐만 아니라 청나라와 일본에까지 유포되어 그곳 외교관에게도 우리 나라에 관한 지침서가 되었다. 벼슬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저서로 『신전자초방(新傳煮硝方)』·『동사록(東槎錄)』이 있고, 편서로는 『통문관지(通文館志)』가 있다.
김경문
김경문은 조선 후기 조선과 청나라 간의 외교적 사안을 담당한 역관이며 아버지는 김지남(金指南)이다.1690년(숙종 16)에 18세에 역과에 한학(漢學)으로 장원 급제주1한 후 영조대까지 역관으로 크게 활약하였다. 1711년(숙종 37) 위원(渭原)주2 백성이 청나라로 월경(越境)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재자관(賫咨官)주3으로 차출되어 양국의 외교 문제를 조율하였고, 임무 수행 중에 청의 군제(軍制)와 정치 상황 등을 자세히 적어서 보고하였다.
특히 1712년(숙종 38) 강희제(康熙帝)가 목극등(穆克登)을 파견하여 국경선을 확정하려 하자, 특별히 부친 김지남과 함께 접반사(接伴使)주5로 임명되었다. 그는 목극등 일행이 백두산정계비(白頭山定界碑)를 세울 때 통역과 응대를 담당하였으며, 조정으로 돌아와서는 백두산 국경지대의 지도를 바쳐서 공로를 치하받았다.
뇌물을 많이 받아 탄핵되기도 하였으나, 1720년(경종 즉위년)에 무기 재료인 궁각(弓角)의 무역, 1722년(경종 2)에 연행사(燕行使)주6를 보좌하는 상인인 난두(欄頭)주7의 폐해 일소주8, 1724년(영조 즉위년) 조공품의 감축, 1725년(영조 1)에 국경 문제의 추론, 1727년(영조 3년)에 조선 상인이 청 호상(豪商)주9에게 진 채무 문제 해결 등 여러 외교 문제를 해결한 공로로 통정대부(通政大夫)주10, 가의대부(嘉義大夫)주11를 거쳐 자헌대부(資憲大夫)주12에 승진하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주13를 받게 되었다.
주요 역할
조선시대 사역원(司譯院)은 두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는 사대교린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한어(漢語), 몽어(蒙語), 여진어(女眞語), 왜어(倭語) 등 외국어를 교육하는 교육 기관으로서의 기능이다. 둘째는 외국어의 통역과 번역 등을 맡아보는 일반 관부(官府)로서의 기능이다.
사역원은 조선시대 ‘사대교린(事大交隣)’의 외교 원칙을 수행하기 위해 설치된 관서로, 외국과의 통역 및 외교 실무를 전담하고 외국어 인재를 양성하는 역할을 맡았다. 고려 후기 통문관에서 비롯된 사역원은 조선 태조 때 다시 설치되어 한어, 몽어, 왜어, 여진어 등 4개 언어의 교육과 통역을 담당하였다. 사역원은 단순한 통역 기관이 아니라 외국어 교육기관으로서 교수와 훈도 같은 교육 관직을 두었으며, 생도를 선발해 전문적인 외국어 교육을 실시하였다. 생도들은 『노걸대』, 『박통사』, 『역어지남』 등의 교재로 학습하고, 취재나 역과를 통해 역관으로 진출하였다.
또한 사역원은 외국 사신의 접대와 외교 사행 시 통역 실무를 담당하여, 명·일본·여진 등 주변국과의 외교 관계 유지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관제상으로는 정3품 아문으로, 실무는 잡과 출신의 중인 역관들이 담당하였고, 도제조와 제조 등 문과 출신 관리가 겸직으로 이를 감독하였다. 사역원은 이처럼 외국어 교육과 통역, 외교 실무를 통합적으로 운영한 국가 전문기관으로서, 조선의 대외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국경 외교를 수행하는 데 중추적인 기능을 담당하였다. 조선 말기 외무아문(外務衙門)으로 통합되었다.
통문관지
통문관지 (通文館志)는 조선시대 통역 기관인 사역원(司譯院)의 연혁과 조직, 그리고 고대부터 외국과의 외교 및 통교 의례를 집대성한 대표적인 외교서이다.
초간본은 숙종 46년(1720)에 역관 김지남(金指南)이 아들 김경문(慶門)과 함께 편찬하였으며, 한학관 이선방(李先芳)·변정로(卞廷老)와 청학관 남덕창(南德昌) 등이 사재를 들여 간행한 8권 3책의 개주갑인자본(改鑄甲寅字本)이다. 이후 정조 2년(1778)에 이담(李湛)이 초간본을 증보하여 10권 4책의 목판본으로 중간하였고, 1881년과 1888년에 각각 속편이 더해져 최종적으로 12권 6책으로 완성되었다. 서문에서 김경문은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중국·요연·여진·일본 등과의 외교에서 많은 법례와 사례가 있었으나 이를 정리한 문헌이 없어 어려움이 많았다”며, 영의정 최석정(崔錫鼎)이 사역원 제조로 있을 때 김지남에게 고대의 외교 사례를 수집하고 정리하도록 명한 것이 편찬의 계기였다고 밝혔다.
내용은 권1 연혁편에서 사역원의 관제와 직제, 인사 변천을 다루었고, 권2 권장편에서는 입속과 승진, 과거, 원시, 취재 등 인사 제도를 정리하였다. 권3과 권4 사대편에서는 중국 사행 절차, 칙사 영접, 무역과 의식 등을 기록하였으며, 권5와 권6 교린편에서는 일본과 대마도와의 외교 관계, 통신사 파견, 조약, 접대 의례 등을 다루었다. 권7 인물편에는 조선 초기 이후의 주요 역관 인물들의 행적이 실려 있고, 권8은 사역원의 고사, 조직, 인장·교재 내력, 서적 목록 등을 수록하였다. 권9에서 권12까지는 기년편과 속편으로, 사대교린의 중요 외교 사건들을 연대순으로 정리하였다.
이 책은 조선시대 외교 체계와 사역원의 운영, 그리고 한·중·일 관계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 특히 개항기 이전 외교 제도의 변천과 국제 교섭의 실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의 정치·경제·문화 연구에도 폭넓게 활용되는 대표적인 외교 문헌이다. 구성 및 주요 내용:
| 권 | 주요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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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원의 관제, 직제, 인사 제도, 등급 제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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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관의 선발·승진·시험제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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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사행 절차, 사신 접대, 무역·예식 관련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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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대마도와의 외교, 통신사, 서계·노정·접대 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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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이 있는 역관들의 행적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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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원의 제도, 물품, 문서·서적 목록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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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별 외교 사건 정리 및 개항기 교섭상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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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의 의미
통문관은 한국 역사상 최초의 공식 통역 교육기관으로, 언어를 매개로 한 외교 행정의 제도화를 의미한다. 조선시대의 사역원은 이를 계승하여 체계적 외국어 교육과 전문 통역 인재 양성을 담당하였으며,조선의 자주적 외교 수행과 국가 안보 확보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두 기관은 한국 외교사의 제도적 기초를 마련하고, 언어를 통한 국제 관계 형성의 역사적 토대를 제공하였다는 점에서 연구의 의미가 있다고 본다.또한 통역사의 역할도 단순한 설인으로부터 다양한 영역의 전문가로 발전하는 모습을 확인 할 수 있다.
Visualization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화사전 https://encykorea.aks.ac.kr/
참고문헌:
(1)전가람(Jeon Ga Ram). "고려 후기 金坵의 文翰外交와 通文館 설치." 대동한문학 48.- (2016): 57-86.
(2)김남희. (2012). 통역의 역사 개관 - 고려시대까지. 통번역학연구, 16(1), 1-19.
(3)김남희. (2012). 통역의 역사 개관 II (조선전기). 통번역학연구, 16(4), 25-53.
(4)김남희. (2014). 통역의 역사 개관 III (조선 후기). 통번역학연구, 18(1), 1-39.
서적:
(조선 최대 갑부)역관 / 이덕일 지음.
조선역관열전 : 입은 천 개의 칼을 지녔다 / 이상각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