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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에 있었던 사찰로, 신라 세워진 최대 규모의 사찰이다. 불국사와 함께 신라를 대표하는 사찰이며, 백제의 미륵사, 고구려의 정릉사와 함께 삼국시대를 대표하는 호국 사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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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에 있었던 사찰로, <span style="background:#ffffb1">신라의 최대 규모의 사찰이다.</span> 불국사와 함께 신라를 대표하는 사찰이며, 백제의 미륵사, 고구려의 정릉사와 함께 삼국시대를 대표하는 호국 사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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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553년(신라 진흥왕 14년)에 창건되었다. 원래 새로운 궁궐을 지으려 했으나, 그곳에서 황룡이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고 사찰로 변경하여 짓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후 진흥왕의 아들인 진평왕 때까지 약 90년에 걸쳐 완성되었으며, 신라 불교의 중심 도량이자 국가적인 안녕을 기원하는 중요한 사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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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 멸망한 후에도 고려 시대까지 그 명맥을 이었으나, 고려 고종 25년(1238년) 몽골의 침입으로 인해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 소실되었다. 이후 완전히 복원되지 못하고 사찰 터인 황룡사지로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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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선덕여왕 때 지어진 황룡사 9층 목탑은 그 높이가 무려 <font color="#C83F12">80m</font>에 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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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통해 당시 신라의 건축 기술과 불교 문화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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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 멸망한 후에도 고려 시대까지 그 명맥을 이었으나, <font color="#471396">고려 고종 25년(1238년)</font> 몽골의 침입으로 인해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 소실되었다. 이후 완전히 복원되지 못하고 사찰 터인 황룡사지로만 남아 있다.
  
 
==현대의 황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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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황룡사는 사찰 건물이 남아있지 않아 ‘황룡사지’로 불리며 유적지로 보존되고 있다. 경주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이 찾는 주요 관광지 중 하나이며, 황룡사의 역사와 문화를 알리기 위한 황룡사역사문화관이 건립되어 운영되고 있다. 황룡사지는 과거의 영광을 기억하고 현재에 그 가치를 되새기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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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황룡사는 사찰 건물이 남아있지 않아 '''황룡사지'''로 불리며 유적지로 보존되고 있다. 경주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이 찾는 주요 관광지 중 하나이며, 황룡사의 역사와 문화를 알리기 위한 황룡사역사문화관이 건립되어 운영되고 있다. 황룡사지는 과거의 영광을 기억하고 현재에 그 가치를 되새기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경주 황룡사지는 대한민국의 국가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사찰 터만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라 시대 건축 기술과 불교 미술의 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적이다. 대규모 발굴 조사를 통해 당시의 사찰 배치와 건축 야익에 대한 많은 정보가 밝혀졌으며, 이는 신라 역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경주 황룡사지는 대한민국의 국가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사찰 터만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라 시대 건축 기술과 불교 미술의 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적이다. 대규모 발굴 조사를 통해 당시의 사찰 배치와 건축 야익에 대한 많은 정보가 밝혀졌으며, 이는 신라 역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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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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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탑 외에도 금당, 강당, 회랑 등 다양한 건물 터가 발견되었다. 금당에는 거대한 장육존상이 모셔져 있었다고 전해진다.
 
목탑 외에도 금당, 강당, 회랑 등 다양한 건물 터가 발견되었다. 금당에는 거대한 장육존상이 모셔져 있었다고 전해진다.
 
승려 자장
 
  
 
=='''불교축제와의 관계'''==
 
=='''불교축제와의 관계'''==
 
===신라===
 
===신라===
통일 신라시대 경문왕 6년(866) 정월 보름에 왕이 황룡사에 행차하여 등불들을 구경하고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고 한다. 이것이 연등회의 시작으로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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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에 따르면, 통일 신라시대 경문왕 6년(866) 정월 보름과 진성여왕 4년 정월 15일에 국왕이 황룡사에 행차하여 등불들을 구경하고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고 한다. 이것이 [[연등회]]의 시작으로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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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말 신라사회는 상당한 규모의 등불 행사를 황룡사에서 정월 15일에 개최하였다고 한다. <ref>표정옥, 불교 축제가 현대 사회에 함의하는 문화기호학적 의미와 대중성 고찰, 2009 </ref>
 
===현대===
 
===현대===
 
현재 황룡사 터는 사찰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직접적인 종교 의례나 축제가 대규모로 열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경주시에서는 황룡사지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기리는 다양한 문화 행사나 학술 대회를 개최하기도 한다.
 
현재 황룡사 터는 사찰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직접적인 종교 의례나 축제가 대규모로 열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경주시에서는 황룡사지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기리는 다양한 문화 행사나 학술 대회를 개최하기도 한다.

2025년 6월 23일 (월) 09:40 기준 최신판

개요

황룡사복원도.jpeg

주요 사항 내용
소재지 경북 경주시 구황동 320-1번지
시대 신라 진흥왕 14년
소유단체 경주시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었던 사찰로, 신라의 최대 규모의 사찰이다. 불국사와 함께 신라를 대표하는 사찰이며, 백제의 미륵사, 고구려의 정릉사와 함께 삼국시대를 대표하는 호국 사찰이다.

역사

신라

서기 553년(신라 진흥왕 14년)에 창건되었다. 원래 새로운 궁궐을 지으려 했으나, 그곳에서 황룡이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고 사찰로 변경하여 짓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후 진흥왕의 아들인 진평왕 때까지 약 90년에 걸쳐 완성되었으며, 신라 불교의 중심 도량이자 국가적인 안녕을 기원하는 중요한 사찰이었다.

특히 선덕여왕 때 지어진 황룡사 9층 목탑은 그 높이가 무려 80m에 달했다고 한다. 이 목탑은 신라를 둘러싼 아홉 이웃 나라의 침략을 막아달라는 염원을 담아 지어졌다고 전해진다.

이를 통해 당시 신라의 건축 기술과 불교 문화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

신라가 멸망한 후에도 고려 시대까지 그 명맥을 이었으나, 고려 고종 25년(1238년) 몽골의 침입으로 인해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 소실되었다. 이후 완전히 복원되지 못하고 사찰 터인 황룡사지로만 남아 있다.

현대의 황룡사

현재 황룡사는 사찰 건물이 남아있지 않아 황룡사지로 불리며 유적지로 보존되고 있다. 경주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이 찾는 주요 관광지 중 하나이며, 황룡사의 역사와 문화를 알리기 위한 황룡사역사문화관이 건립되어 운영되고 있다. 황룡사지는 과거의 영광을 기억하고 현재에 그 가치를 되새기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경주 황룡사지는 대한민국의 국가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사찰 터만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라 시대 건축 기술과 불교 미술의 수준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적이다. 대규모 발굴 조사를 통해 당시의 사찰 배치와 건축 야익에 대한 많은 정보가 밝혀졌으며, 이는 신라 역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주요 구조물

9층 목탑

9층목탑.jpeg

황룡사지 발굴 조사를 통해 당시의 주요 구조물들이 확인되었다. 가장 유명한 것은 9층 목탑으로, 높이가 약 80m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이는 당시 동양에서 가장 높은 목탑 중 하나였으며 신라의 국력을 상징하는 건축물이었다. 주변국 구한의 신라 침략을 막을는 염원을 담은 탑으로 전해진다.

그 외

목탑 외에도 금당, 강당, 회랑 등 다양한 건물 터가 발견되었다. 금당에는 거대한 장육존상이 모셔져 있었다고 전해진다.

불교축제와의 관계

신라

'삼국사기'에 따르면, 통일 신라시대 경문왕 6년(866) 정월 보름과 진성여왕 4년 정월 15일에 국왕이 황룡사에 행차하여 등불들을 구경하고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고 한다. 이것이 연등회의 시작으로 알려진다.

통일신라 말 신라사회는 상당한 규모의 등불 행사를 황룡사에서 정월 15일에 개최하였다고 한다. [1]

현대

현재 황룡사 터는 사찰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직접적인 종교 의례나 축제가 대규모로 열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경주시에서는 황룡사지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기리는 다양한 문화 행사나 학술 대회를 개최하기도 한다.

또한 미래에 황룡사가 복원된다면, 다시 한국 불교의 중요한 중심지가 되어 과거처럼 국가적인 불교 축제나 의례가 이곳에서 치러질 가능성도 존재한다. 이는 황룡사 복원 사업과 함께 논의되고 있는 부분이다.

결론

황룡사 터는 비록 건물은 사라졌지만, 그 터에 담긴 신라 천년의 불교 역사와 문화는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팔관회, 연등회와 같은 불교 축제는 이러한 황룡사의 정신과 전통을 오늘날까지 이어오며 한국 사회에 중요한 문화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황룡사 터는 과거와 현재를 잇는 불교 문화의 상징이며, 앞으로도 한국 불교와 문화 발전의 중요한 자산이 될 것이다. 황룡사 터 복원과 함께 불교 축제가 더욱 발전하여 한국의 전통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데 기여할 것이다.

  1. 표정옥, 불교 축제가 현대 사회에 함의하는 문화기호학적 의미와 대중성 고찰,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