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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등놀이(觀燈놀이)는 조선시대 사월초파일(음력 4월 8일, 부처님 오신 날)에 백성들이 각 가정이나 거리, 사찰 등에서 등을 달고 불빛을 구경하며 즐기던 민속 축제이다. 불교의 연등회에서 유래하였으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종교적 의의가 퇴색되고 민속 행사로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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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등놀이(觀燈놀이)는 조선시대 사월초파일(음력 4월 8일, 부처님 오신 날)에 백성들이 각 가정이나 거리, 사찰 등에서 등을 달고 불빛을 구경하며 즐기던 민속 축제이다. [[고려연등회]]에서 유래하였으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종교적 의의가 퇴색되고 민속 행사로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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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이종수. (2012). 조선시대 연등회의 存廢와 불교사적 의미. 불교연구,(37), 113-145.</ref>
 
===장대등과 거리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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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초파일이 되면 각 가정과 상점에서 대나무 장대에 등을 달고, 거리 곳곳에 등이 걸렸다. 이를 '등간'이라고 불렀다.
 
사월초파일이 되면 각 가정과 상점에서 대나무 장대에 등을 달고, 거리 곳곳에 등이 걸렸다. 이를 '등간'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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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등놀이는 단오, 백중, 추석과 함께 민가의 연중 행사로 인식되었으며, 성리학 사회에서도 크게 배척되지 않았다.
 
관등놀이는 단오, 백중, 추석과 함께 민가의 연중 행사로 인식되었으며, 성리학 사회에서도 크게 배척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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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한국 불교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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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Tiaehy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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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6월 23일 (월) 04:53 기준 최신판

관등놀이

관등놀이(觀燈놀이)는 조선시대 사월초파일(음력 4월 8일, 부처님 오신 날)에 백성들이 각 가정이나 거리, 사찰 등에서 등을 달고 불빛을 구경하며 즐기던 민속 축제이다. 고려연등회에서 유래하였으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종교적 의의가 퇴색되고 민속 행사로 자리잡았다.

개요

관등놀이는 사월초파일 밤, 등(燈)을 장대에 매달거나 집 주변에 밝히고 사람들이 이를 감상하며 노닐던 풍속을 말한다. 원래는 부처님의 탄생을 기리는 불교 의례의 일부였으나, 조선시대 후기로 갈수록 종교적 색채보다 민간 축제로서의 성격이 강해졌다. 도심과 시골을 막론하고 관청, 사찰, 민가에서 등간(燈竿)을 세우고 축제처럼 즐기던 행사였다.

역사

관등놀이는 고려시대 연등회에서 비롯되었다. 고려 최이가 부처님의 탄생일을 기려 연등의 법도를 확립하였으며, 이후 연등은 불교 행사로써 중요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접어들어 유교 이념을 국시로 삼으면서 불교는 억제되었고, 연등회는 국가적 행사에서 제외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등은 민간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특히 사월초파일에 관등을 즐기는 풍속은 조선 후기까지 지속되었다. 고종 9년(1872)에는 등간 설치 비용이 지나치다며 폐지 명령이 내려졌으나 실제로는 시행되지 않았고, 도심 거리에는 여전히 등을 밝히는 모습이 이어졌다.

특징

[1]

장대등과 거리등

사월초파일이 되면 각 가정과 상점에서 대나무 장대에 등을 달고, 거리 곳곳에 등이 걸렸다. 이를 '등간'이라고 불렀다.

야간 유희

아이들과 사람들이 밤새 불빛 아래서 놀고 어울리는 풍속이 있었다. 이는 유교적 절제와는 달리 해방감을 주는 행사였다.

불교 의례의 축소

부처님 목욕의식(욕불의식)이나 염불 등은 점차 사라지고, 등불 자체를 구경하거나 노는 것이 주된 내용이 되었다.

사회문화적 의의

불교의 민중화

고려의 국가 중심 불교와 달리, 조선의 관등놀이는 백성들의 소박한 신앙 표현으로 변화하였다. 이는 불교가 민중 종교로 전환된 모습을 보여준다.

국가의 종교 방임 정책

조선후기에는 불교를 적극적으로 억제하지 않고, 민속화된 신앙 형태로 용인하였다. 연등회의 지속은 그 대표적 예이다.

세시풍속으로의 정착

관등놀이는 단오, 백중, 추석과 함께 민가의 연중 행사로 인식되었으며, 성리학 사회에서도 크게 배척되지 않았다.

각주

  1. 이종수. (2012). 조선시대 연등회의 存廢와 불교사적 의미. 불교연구,(37), 113-1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