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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고려 초기부터 국가적인 법회나 의례가 법왕사에서 열렸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 목종 대에는 헌애왕후와 김치양이 자신들의 아들을 왕으로 세우려는 계획을 추진하면서 법왕사를 그 거점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어, 당시 법왕사의 정치적 위상과 영향력을 엿볼 수 있다. | |
| − | + | 의침이 조사당을 지을 무렵 법왕사는 계단이 무너지고 초석이 파괴되어 잡초만이 무성하여 퇴락한 모습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절터만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조선 건국 후 급속도로 퇴락하다 조선 전기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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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축제와의 관계== | ==불교축제와의 관계== | ||
| − | 고려시대 중동팔관회 | + | ===고려 팔관회=== |
| + | *<span style="background:#ffc0cb">고려시대 중동팔관회 절차</span> 중에 국왕의 법왕사 행차가 있었던 것에서 볼 수 있듯 [[고려 팔관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성종이 팔관회의 잡기<ref> 중국 고대와 중세에 행하여진 각종 예능을 통틀어 이르는 말</ref>들이 이치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번거롭고 소란하다고 하여 모조리 폐지해 버리고 법왕사에 행차하여 분향한 뒤에 구정으로 돌아와 문무관료의 하례를 받는 것으로 행차를 마쳤다고 한다. | ||
| − | 이규보의 법왕사 | + | *이규보의 <span style="background:#ffc0cb">법왕사 팔관설경문</span>을 보면 중동 팔관회날 법왕사 행차에서는 고승을 초빙하여 경전 강설을 듣는 순서가 있었다. 팔관회날 국왕의 법왕사 행차는 <font color="#471396">1391년(공양왕 3) 11월</font>까지 계속되어 고려 말까지도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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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그 외=== | ||
| + | *법왕사에서는 팔관회 외에 백고좌도량<ref> 불교에서 신라,고려 시대에 호국을 위해 국가적 행사로 개최한 종교의례 </ref>을 비롯한 다양한 행사를 위한 행차가 있었다. 1129년 9월 28일, 1131년 10월 10일, 1135년 10월 10일 법왕사에 백고좌도량을 개설하고 3일 동안 3만 명의 승려에게 반승<ref> 불교에서 승려를 공경하고 받들어 모신다는 뜻에서 재식을 베푸는 행사를 지칭하는 용어 </ref>을 하였다. | ||
==문화유산== | ==문화유산== | ||
| − | + | 발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현재로서는 파악이 어렵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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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결론== | |
| − | + | 개성 법왕사는 고려의 수도 개경에 자리했던 사찰로서, 당시 성대하게 열렸던 팔관회와 같은 불교 축제와 관련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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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비록 현재는 접근이 어렵고 상세한 기록이 부족하지만, 법왕사의 존재와 불교 축제와의 연결은 고려 시대 개경의 활기찬 불교 문화와 국가 의례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이는 한국 불교사와 문화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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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각주== | ||
| + | <references/> | ||
| + | [[category:한국 불교 축제]][[category:김필삼]] | ||
2025년 6월 24일 (화) 00:21 기준 최신판
개요
고려시대 태조가 개경으로 천도한 이듬해인 919년 개경에 창건한 10개 사찰 가운데 하나이다. 단순히 종교적인 기능뿐만 아니라, 왕실 및 국가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정치적으로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화엄종 승려 우운이 왕명으로 법왕사에 주석했다.
역사
919년(태조 2)에 태조가 개성 10사의 하나로 이 절을 창건하였다. 서긍이 지은 선화봉사고려도경에는 왕성의 동북쪽의 춘궁과 멀지 않은 곳에 절이 있었다고 하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절의 옛 터가 연경궁 동쪽에 있다고 하여 법왕사는 도성 안 동북쪽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고려 초기부터 국가적인 법회나 의례가 법왕사에서 열렸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 목종 대에는 헌애왕후와 김치양이 자신들의 아들을 왕으로 세우려는 계획을 추진하면서 법왕사를 그 거점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어, 당시 법왕사의 정치적 위상과 영향력을 엿볼 수 있다.
의침이 조사당을 지을 무렵 법왕사는 계단이 무너지고 초석이 파괴되어 잡초만이 무성하여 퇴락한 모습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절터만 있다고 기록되어 있어, 조선 건국 후 급속도로 퇴락하다 조선 전기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불교축제와의 관계
고려 팔관회
- 고려시대 중동팔관회 절차 중에 국왕의 법왕사 행차가 있었던 것에서 볼 수 있듯 고려 팔관회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성종이 팔관회의 잡기[1]들이 이치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번거롭고 소란하다고 하여 모조리 폐지해 버리고 법왕사에 행차하여 분향한 뒤에 구정으로 돌아와 문무관료의 하례를 받는 것으로 행차를 마쳤다고 한다.
- 이규보의 법왕사 팔관설경문을 보면 중동 팔관회날 법왕사 행차에서는 고승을 초빙하여 경전 강설을 듣는 순서가 있었다. 팔관회날 국왕의 법왕사 행차는 1391년(공양왕 3) 11월까지 계속되어 고려 말까지도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 외
- 법왕사에서는 팔관회 외에 백고좌도량[2]을 비롯한 다양한 행사를 위한 행차가 있었다. 1129년 9월 28일, 1131년 10월 10일, 1135년 10월 10일 법왕사에 백고좌도량을 개설하고 3일 동안 3만 명의 승려에게 반승[3]을 하였다.
문화유산
발굴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현재로서는 파악이 어렵다.
결론
개성 법왕사는 고려의 수도 개경에 자리했던 사찰로서, 당시 성대하게 열렸던 팔관회와 같은 불교 축제와 관련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비록 현재는 접근이 어렵고 상세한 기록이 부족하지만, 법왕사의 존재와 불교 축제와의 연결은 고려 시대 개경의 활기찬 불교 문화와 국가 의례의 모습을 상상하게 한다. 이는 한국 불교사와 문화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