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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개요] | + | ===<big>'''개요'''</bi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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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파일:31운동뉴스.jpg|400px|cent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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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1919년 3월 1일을 계기로 전개된 3.1운동은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계층이 참여한 대규모 항일 독립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한국 민족의 독립 의지를 국내외에 분명히 드러내며 국제 사회의 관심을 끌었고, 그 영향으로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25-2)|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였다. </br> |
| | + | 또한 강압적 무단통치에 대한 전면적인 저항은 일제의 통치 방식에 변화를 촉발하여 이른바 문화통치로의 전환을 가져오는 배경이 되었으며, 민족의식과 자주 의식을 크게 고취시켜 교육·문화·산업 등 사회 전반에서 민족 역량을 강화하고 자립을 추구하는 여러 사회운동이 확산되는 출발점으로 평가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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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3·1 운동(三一運動) 또는 3·1 만세 운동(三一萬歲運動)은 고종의 인산일인 1919년 3월 3일에 앞서 한국인들이 일제의 지배에 항거하여 3월 1일 독립을 선언하고 비폭력 만세운동을 시작한 사건이다. 기미독립운동이라고도 하며, 대한제국 황제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독살설이 퍼진 것이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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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 만세 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을 민족대표 33인으로 부르며, 그밖에 만세 성명서에 직접 서명하지는 않았으나 직접, 간접적으로 만세 운동의 개최를 준비한 이들까지 합쳐서 보통 민족대표 48인 또는 프랭크 스코필드를 포함 민족대표 49인으로도 부른다. 이들은 모두 만세 운동이 실패한 후에 구속되거나 재판정에 서게 된다. 약 3개월 동안 시위가 발생하였으며, 조선총독부는 강경하게 진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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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조선총독부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집회인수가 106만여 명이고, 그 중 사망자가 7,509명, 구속된 자가 4만 7천여 명이었다. 3·1 운동을 계기로 군사, 경찰에 의한 강경책을 펴던 조선총독부는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정책을 바꾸게 된다. 전국적인 범위에서 각계각층을 망라하여 전개된 3·1운동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켜 한국인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고, 중국 상하이에서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 나아가 민족의식과 민족정신에 새로운 자각과 힘을 주어 교육의 진흥, 신문예운동·산업운동이 활성화하고 민족 자립의 기초를 다지게 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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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946년 3월 1일 제27회 기념식을 시초로 국가 경축일로 지정되었고, 1949년 10월 1일 〈국경일에관한법률〉을 공포함으로써 국경일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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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big>'''배경'''</big>=== |
| − | ===원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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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910년 한국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병탄된 뒤 한국의 의병 · 열사들은 일본의 부당한 침략에 항거하여 전국 각지에서 독립운동에 나섰다. 조선총독부는 강력한 무단통치를 감행하여 가혹한 탄압을 자행하는 한편, 민족 고유문화 말살, 경제적 지배의 철저화로 한국 민족의 정당한 민족적 저항의 기반을 없애고자 하였다. | + | 1910년 강제 병탄 이후 조선총독부는 헌병·경찰을 앞세운 무단통치로 독립운동을 강하게 탄압했고, 문화 말살과 경제적 지배를 병행해 민족적 저항 기반을 약화시키려 했다. 이에 독립운동가들은 국내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거나 중국·만주·연해주·미주 등지로 망명해 활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1차 세계대전 종전 국면과 함께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알려지면서, 국제 여론에 호소해 독립을 추진할 수 있다는 기대가 확산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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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에따라 한국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중국 · 만주 · 노령 · 미주 등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거나,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지하로 숨어 기회를 기다리게 되었다. 이러한 와중에 미국 대통령 윌슨(Wilson, T. W.)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발표되었다.
| + | 특히 해외 한인 사회는 민족자결주의를 근거로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해 한국 독립을 호소하려 했고, 상하이의 신한청년단 등은 김규식 등을 파리로 보내 외교 활동을 시도했다. 국내에는 일제의 은폐로 해당 사상이 즉각 확산되진 않았으나, 유학생·해외 동포의 움직임이 알려지며 독립운동 분위기가 점차 고조되었다. 여기에 1919년 2·8 독립선언이 도화선 역할을 하며, 국내에서도 거족적 행동을 준비하려는 흐름을 촉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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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민족자결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 원칙 14개 조항의 일부로 1918년 1월 제기되었다. 윌슨이 구상했던 민족자결주의 원칙은 연합국과 대결했던 독일 · 오스트리아 · 터키 등의 동맹국 식민지에만 적용하려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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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그러나 이 원칙은 모든 피압박 민족에게 하나의 복음으로 받아들여져 각각이 자국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 원칙을 해석하여 독립을 요구하게 되었다. 한국의 민족지도자들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발표가 있자, 이에 의거해 한국 민족의 독립을 호소하고자 노력하였다.
| + | ===<big>'''전개'''</bi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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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3.1운동은 민족자결주의의 영향, 2·8 독립선언의 파장, 그리고 고종의 갑작스러운 서거(독살설 확산)로 고조된 민심이 결합되며 거족적 항일운동으로 구체화되었다. 운동 준비 과정에서 천도교·기독교·불교계를 중심으로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의 원칙이 정리되었고, 독립선언서 발표와 만세 시위, 독립 청원 등(국내외 여론전)이 함께 구상되었다. 최남선이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종교계 인사들이 연합해 민족대표를 구성하면서 33인이 확정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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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은 재미교포들이었다. 그들은 재미한인대표자회의를 소집하였다. 그 곳에서 이승만(李承晩) · 민찬호(閔瓚鎬) · 정한경(鄭翰景) 등을 한인대표로 선출하여, 민족자결주의의 본질적 이념에 따른 한국 민족의 자결권을 주장하였다.
| + |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진행한 뒤 경찰에 연행되었고, 같은 시각 탑골공원에는 학생과 시민이 모여 독립선언서 낭독과 만세 시위를 시작했다. 시위는 서울 도심에서 행진 형태로 확산되었으며, 이후 평양·원산 등 주요 도시를 거쳐 전국 각지로 빠르게 번져 나갔다. 전개 과정에서 장날·종교 조직·학교 네트워크·지역 간 인접 영향 등 다양한 경로로 동원이 확대되었고, 국내 운동은 만주·연해주·미주 등 해외 한인 사회의 만세 시위로도 연결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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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그 방법으로 파리강화회의에 한인대표를 보내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미국 정부가 여권을 내주지 않아 실패하였다. 이 소식은 도쿄[東京]에서 발간되는 『저팬 애드버타이저(Japan Advertiser)』와 『아사히신문[朝日新聞]』에 보도되었고, 재일본 조선유학생 학우회는 큰 자극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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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중국으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은 상하이[上海]에서 발간되는 영자신문에 보도된 파리강화회의의 개최와 민족자결론을 접했다. 이에 신한청년단(新韓靑年團)에서는 김규식(金奎植)을 한민족 대표로 파리로, 장덕수(張德秀)를 일본으로, 여운형(呂運亨)을 시베리아로 각각 파견하였다.
| + | ===<big>'''결과'''</bi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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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조선총독부는 헌병·경찰뿐 아니라 정규 군대까지 동원해 강경 진압에 나섰고, 그 과정에서 대규모 체포·구금과 희생이 발생했다. 참가 규모와 피해 통계는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조선총독부의 공식 기록 및 당대 자료에서 참가 인원, 사망·부상·피검자 수가 다양하게 집계된다. 한편, 제암리 등 일부 지역에서는 시위 이후 보복적 성격의 살상·방화가 발생해 국제적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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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한편 김철(金澈) · 선우혁(鮮于赫) 등은 국내로 파견하여, 종교계 및 각 사회지도층과 접촉하게 하여 거족적인 민족독립운동을 계획하였다. 한편으로는 미국 대통령 특사로 상하이에 온 크레인(Crane, C. R.)에게 한국 독립에 관한 요망서를 파리강화회의와 미국 대통령에게 전달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 + | 한편 일제는 국제 여론의 악화를 완화하고 향후 통치를 안정화하기 위해 통치 방식의 변화를 표방했다. 이른바 ‘문화통치’로의 전환이 제시되며 헌병경찰제의 완화, 언론·교육 정책의 조정 등이 추진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경찰력과 감시 체계를 강화하고 독립운동가 색출을 지속하는 등 식민 지배의 본질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평가도 함께 존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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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와 같은 국외의 사정과는 달리 국내에서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사상이 일제의 고의적인 은폐로 즉시 알려지지 못했다. 그러나 도쿄유학생의 귀국, 재미 · 재중 동포의 활동 등을 통해 차차 알려지면서 국내에서도 독립운동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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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러한 분위기에 불을 당긴 것은 일본 도쿄에서 거행된 2 · 8독립선언이었다. 당시 일본 도쿄에는 한인유학생들 간에 조선기독교청년회 · 조선유학생학우회 · 조선학회 · 조선여자친목회 등의 애국단체가 있었다. 이 단체들은 겉으로는 친목과 학술연구를 표방하면서도 속으로는 애국사상 고취를 위해 노력하였다.
| + | ===<big>'''평가 및 의의'''</bi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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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그 가운데 조선유학생학우회는 1912년 10월 27일 조직되었다. 도쿄에 재류하는 유학생을 회원으로 하는 항일독립사상이 충일한 단체로 정기총회 외에도 수시로 웅변회 · 토론회 등을 개최하고, 『학지광(學之光)』이라는 잡지를 발간하여 항일사상을 고취하였다.
| + | 3.1운동은 특정 계층에 국한되지 않고 종교계·학생·농민·상인 등 사회 전반이 참여한 대규모 민족운동으로,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국내외에 집단적으로 표출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특히 운동 과정에서 ‘비폭력’과 ‘공동 행동’의 원칙이 강조되며 거족적 항쟁의 전형을 형성했고, 일제의 식민 통치 방식과 국제 여론에 직접적인 압력을 가했다는 점이 중요하게 평가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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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그러던 중 『저팬 애드버타이저』에 재미동포의 활동과 상황이 보도되자, 비밀리에 한국의 독립문제를 토의하였다. 1919년 1월 6일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웅변대회를 개최하여,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한국의 독립을 일본 내각과 각국의 대사관 및 공사관에 청원할 것을 결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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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와 함께 실행위원으로 최팔용(崔八鏞) · 송계백(宋繼白) · 전영택(田榮澤) · 서춘(徐椿) · 김도연(金度演) · 백관수(白寬洙) · 윤창석(尹昌錫) · 이종근(李琮根) · 김상덕(金尙德) · 최근우(崔謹愚) 등 10명을 선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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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후 전영택이 병으로 사임하고, 대신 이광수(李光洙) · 김철수(金喆壽)가 추가로 선출되어 실행위원은 총 11명이 되었다. 이들은 비밀회합을 거듭해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민족대회소집청원서 및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작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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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한편, 조선청년독립단은 송계백과 최근우를 국내에 밀파해 최린(崔麟) · 송진우(宋鎭禹) · 최남선(崔南善) · 현상윤(玄相允) 등과 접촉하게 하여 국내에서도 독립운동을 일으킬 것을 청하였다. 동시에, 독립선언서 등 서류 인쇄에 필요한 활자와 운동자금을 마련하여 오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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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마침내 1919년 2월 8일 오전 10시, 한국 독립의 필연성과 정당성을 천명한 독립선언서 등을 각국 대사 · 공사, 일본정부 요인, 귀족원 · 중의원 양원의원, 조선총독, 신문사, 잡지사와 여러 학자들에게 우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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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 날 오후 2시,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백관수가 조선청년독립단의 이름으로 11명의 대표가 서명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김도연이 결의문을 낭독하자, 장내는 독립만세 소리와 환호성으로 가득하였다. 독립선언식이 끝날 무렵, 동경 경시청에서 급파된 경찰대가 대회장을 포위하고 장내에 진입하여 유학생들과 충돌, 일대 수라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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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 때 이광수를 제외한 10명의 대표는 일본 경찰에 잡혔다. 이에 유학생들은 전원이 귀국할 것을 결의하고 국내에 돌아와, 3월 1일에 일어난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에 합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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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조선청년독립단의 2 · 8독립선언은 한국의 청년학도들이 일본의 수도인 도쿄에서 만세를 외치고 독립을 선언했다는 의의 뿐만 아니라, 국내 3 · 1운동의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는 데에도 큰 의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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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910년 한국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병탄된 뒤 한국의 의병 · 열사들은 일본의 부당한 침략에 항거하여 전국 각지에서 독립운동에 나섰다. 조선총독부는 강력한 무단통치를 감행하여 가혹한 탄압을 자행하는 한편, 민족 고유문화 말살, 경제적 지배의 철저화로 한국 민족의 정당한 민족적 저항의 기반을 없애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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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에따라 한국의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중국 · 만주 · 노령 · 미주 등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거나,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지하로 숨어 기회를 기다리게 되었다. 이러한 와중에 미국 대통령 윌슨(Wilson, T. W.)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발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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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민족자결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 원칙 14개 조항의 일부로 1918년 1월 제기되었다. 윌슨이 구상했던 민족자결주의 원칙은 연합국과 대결했던 독일 · 오스트리아 · 터키 등의 동맹국 식민지에만 적용하려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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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그러나 이 원칙은 모든 피압박 민족에게 하나의 복음으로 받아들여져 각각이 자국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 원칙을 해석하여 독립을 요구하게 되었다. 한국의 민족지도자들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발표가 있자, 이에 의거해 한국 민족의 독립을 호소하고자 노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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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그 방법으로 파리강화회의에 한인대표를 보내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미국 정부가 여권을 내주지 않아 실패하였다. 이 소식은 도쿄[東京]에서 발간되는 『저팬 애드버타이저(Japan Advertiser)』와 『아사히신문[朝日新聞]』에 보도되었고, 재일본 조선유학생 학우회는 큰 자극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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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중국으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은 상하이[上海]에서 발간되는 영자신문에 보도된 파리강화회의의 개최와 민족자결론을 접했다. 이에 신한청년단(新韓靑年團)에서는 김규식(金奎植)을 한민족 대표로 파리로, 장덕수(張德秀)를 일본으로, 여운형(呂運亨)을 시베리아로 각각 파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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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와 함께 실행위원으로 최팔용(崔八鏞) · 송계백(宋繼白) · 전영택(田榮澤) · 서춘(徐椿) · 김도연(金度演) · 백관수(白寬洙) · 윤창석(尹昌錫) · 이종근(李琮根) · 김상덕(金尙德) · 최근우(崔謹愚) 등 10명을 선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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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마침내 1919년 2월 8일 오전 10시, 한국 독립의 필연성과 정당성을 천명한 독립선언서 등을 각국 대사 · 공사, 일본정부 요인, 귀족원 · 중의원 양원의원, 조선총독, 신문사, 잡지사와 여러 학자들에게 우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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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 날 오후 2시,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백관수가 조선청년독립단의 이름으로 11명의 대표가 서명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김도연이 결의문을 낭독하자, 장내는 독립만세 소리와 환호성으로 가득하였다. 독립선언식이 끝날 무렵, 동경 경시청에서 급파된 경찰대가 대회장을 포위하고 장내에 진입하여 유학생들과 충돌, 일대 수라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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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 때 이광수를 제외한 10명의 대표는 일본 경찰에 잡혔다. 이에 유학생들은 전원이 귀국할 것을 결의하고 국내에 돌아와, 3월 1일에 일어난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에 합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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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조선청년독립단의 2 · 8독립선언은 한국의 청년학도들이 일본의 수도인 도쿄에서 만세를 외치고 독립을 선언했다는 의의 뿐만 아니라, 국내 3 · 1운동의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는 데에도 큰 의의가 있었다.
| + | 또한 3.1운동은 독립운동의 구심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어 상하이를 중심으로 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과 독립운동 진영의 재편에 영향을 주었다. 동시에 국내에서는 민족의식의 확산과 함께 교육·언론·문화운동, 경제적 자립을 지향한 여러 사회운동이 활성화되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요약하면, 3.1운동은 즉각적인 독립 달성에는 이르지 못했더라도, 이후 독립운동의 조직화·국제화·대중화에 장기적인 동력을 제공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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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기미독립선언서=== | + | ===<big>'''참고문헌'''</bi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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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기미독립선언서는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당시 일제 강점 하에 있던 조선의 독립을 국내외에 선언한 글이다.
| + | * 국사편찬위원회. 「3·1 운동」, 우리역사넷. [https://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i400200] |
| − |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에 모이기로 했던 조선의 민족대표 33인은 늦게 온 사람이 있어 오후 3시가 되어서야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를 제외한 29인이 모였다. 그들은 태화관(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소재)에서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하였고, 오후 4시 무렵 끝났다. 그들은 총독부 정무총감 야마가타 이자부로에게 전화를 걸어 독립선언 사실을 알렸는데, 이는 자신들이 태화관에 모여 있으니 연행해 가라는 뜻이었다. 60여 명의 헌병과 순사들이 태화관에 들이닥쳐 민족대표를 남산 경무총감부와 지금의 중부경찰서로 연행하였다. 저녁 무렵에 길선주 등 태화관에 오지 못한 나머지 4인도 경찰에 자진 출두했다.
| + | * 한국학중앙연구원. 「3·1운동(三一運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6772] |
| − | 민족대표 33인이 선언한 선언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이에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한다. 이 선언을 세계 온 나라에 알리어 인류 평등의 크고 바른 도리를 분명히 하며, 이것을 후손들에게 깨우쳐 우리 민족이 자기의 힘으로 살아가는 정당한 권리를 길이 지녀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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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 반만 년이나 이어 온 우리 역사의 권위에 의지하여 독립을 선언하는 것이며, 이천만 민중의 정성된 마음을 모아서 이 선언을 널리 펴서 밝히는 바이며, 민족의 한결 같은 자유 발전을 위하여 이것을 주장하는 것이며, 누구나 자유와 평등을 누려야 한다는 인류적 양심이 드러남으로 말미암아 온 세계가 올바르게 바뀌는 커다란 기회와 운수에 발맞추어 나아가기 위하여 이를 내세워 보이는 것이니, 이 독립선언은 하늘의 밝은 명령이며, 민족 자결주의로 옮아가는 시대의 큰 형세이며, 온 인류가 함께 살아갈 권리를 실현하려는 정당한 움직임이므로, 천하의 무엇이든지 우리의 이 독립선언을 가로막고 억누르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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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기미독립선언서 처음 부분 (현대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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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한편 오후 2시에 태화관과 300미터 떨어진 탑골공원에서는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민족대표 33인이 보이지 않아 한동안 당황하였으나 경신학교 출신 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오후 3시경에 보성법률상업보통학교 학생 강기덕, 연희전문학교의 김원벽 그리고 한위건이 민족대표의 소재를 찾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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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거사시간을 기약하지 않고 모인 학생이 천 여 명이었고 정재용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 만세소리가 울려 퍼지고, 자그마한 태극기와 선언서가 하늘에서 내리는 꽃비처럼 쏟아졌다. 모인 사람들은 모자를 벗어 허공에 던지며 미친 듯이 기뻐하였다. 이 때, 성안과 지방의 백성들도 합세하여 수십 만의 군중이 참여하였다. 시위 군중은 두 갈래로 나뉘어 행진을 하였는데, 한 갈래는 종로 보신각을 지나 남대문 쪽으로 향하고, 한 갈래는 매일신보사 옆을 지나 대한문을 향하였다. 대한문에 이른 군중을 이끌던 사람이 덕수궁의 혼전에 나아가 세 번 절하고 계속 만세를 불렀다. 시위행진은 서울을 8개구로 나누어 길을 가면서 독립선언서를 나눠주고 "일본군과 일본인은 일본으로 돌아가라", "조선독립만세", "조선 독립정부를 수립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그리고 계속 진행하여 서대문과 태평로를 지나 미국 영사관에 이르렀다. 이때 어느 학생이 태극기를 높이 들고 손가락을 깨물어 피로써 '대한독립' 4자를 써서 앞에 들고 군중을 인도하니 미국영사는 문을 열어 환영하고 깊은 동의를 표했다. 한 사람이 일어나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독립의 주지를 연설하고, 종로에 이르러 다시 연설을 벌이자 일본 헌병과 기마병들은 칼을 휘두르며 해산시키려 하였으나 군중들은 태연자약한 태도로 물러가지 않다가 6시가 되어서 자진해산하였다. 다음날 총독부는 독립단을 수색하고 체포하여 투옥하였는데 그 숫자가 1만 여 명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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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1919년 3월 1일을 계기로 전개된 3.1운동은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계층이 참여한 대규모 항일 독립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한국 민족의 독립 의지를 국내외에 분명히 드러내며 국제 사회의 관심을 끌었고, 그 영향으로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한 강압적 무단통치에 대한 전면적인 저항은 일제의 통치 방식에 변화를 촉발하여 이른바 문화통치로의 전환을 가져오는 배경이 되었으며, 민족의식과 자주 의식을 크게 고취시켜 교육·문화·산업 등 사회 전반에서 민족 역량을 강화하고 자립을 추구하는 여러 사회운동이 확산되는 출발점으로 평가된다.
배경
1910년 강제 병탄 이후 조선총독부는 헌병·경찰을 앞세운 무단통치로 독립운동을 강하게 탄압했고, 문화 말살과 경제적 지배를 병행해 민족적 저항 기반을 약화시키려 했다. 이에 독립운동가들은 국내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거나 중국·만주·연해주·미주 등지로 망명해 활동을 전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제1차 세계대전 종전 국면과 함께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알려지면서, 국제 여론에 호소해 독립을 추진할 수 있다는 기대가 확산되었다.
특히 해외 한인 사회는 민족자결주의를 근거로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해 한국 독립을 호소하려 했고, 상하이의 신한청년단 등은 김규식 등을 파리로 보내 외교 활동을 시도했다. 국내에는 일제의 은폐로 해당 사상이 즉각 확산되진 않았으나, 유학생·해외 동포의 움직임이 알려지며 독립운동 분위기가 점차 고조되었다. 여기에 1919년 2·8 독립선언이 도화선 역할을 하며, 국내에서도 거족적 행동을 준비하려는 흐름을 촉진했다.
전개
3.1운동은 민족자결주의의 영향, 2·8 독립선언의 파장, 그리고 고종의 갑작스러운 서거(독살설 확산)로 고조된 민심이 결합되며 거족적 항일운동으로 구체화되었다. 운동 준비 과정에서 천도교·기독교·불교계를 중심으로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의 원칙이 정리되었고, 독립선언서 발표와 만세 시위, 독립 청원 등(국내외 여론전)이 함께 구상되었다. 최남선이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종교계 인사들이 연합해 민족대표를 구성하면서 33인이 확정되었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을 진행한 뒤 경찰에 연행되었고, 같은 시각 탑골공원에는 학생과 시민이 모여 독립선언서 낭독과 만세 시위를 시작했다. 시위는 서울 도심에서 행진 형태로 확산되었으며, 이후 평양·원산 등 주요 도시를 거쳐 전국 각지로 빠르게 번져 나갔다. 전개 과정에서 장날·종교 조직·학교 네트워크·지역 간 인접 영향 등 다양한 경로로 동원이 확대되었고, 국내 운동은 만주·연해주·미주 등 해외 한인 사회의 만세 시위로도 연결되었다.
결과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조선총독부는 헌병·경찰뿐 아니라 정규 군대까지 동원해 강경 진압에 나섰고, 그 과정에서 대규모 체포·구금과 희생이 발생했다. 참가 규모와 피해 통계는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조선총독부의 공식 기록 및 당대 자료에서 참가 인원, 사망·부상·피검자 수가 다양하게 집계된다. 한편, 제암리 등 일부 지역에서는 시위 이후 보복적 성격의 살상·방화가 발생해 국제적 비난을 불러일으켰다.
한편 일제는 국제 여론의 악화를 완화하고 향후 통치를 안정화하기 위해 통치 방식의 변화를 표방했다. 이른바 ‘문화통치’로의 전환이 제시되며 헌병경찰제의 완화, 언론·교육 정책의 조정 등이 추진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경찰력과 감시 체계를 강화하고 독립운동가 색출을 지속하는 등 식민 지배의 본질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평가도 함께 존재한다.
평가 및 의의
3.1운동은 특정 계층에 국한되지 않고 종교계·학생·농민·상인 등 사회 전반이 참여한 대규모 민족운동으로,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국내외에 집단적으로 표출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특히 운동 과정에서 ‘비폭력’과 ‘공동 행동’의 원칙이 강조되며 거족적 항쟁의 전형을 형성했고, 일제의 식민 통치 방식과 국제 여론에 직접적인 압력을 가했다는 점이 중요하게 평가된다.
또한 3.1운동은 독립운동의 구심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어 상하이를 중심으로 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과 독립운동 진영의 재편에 영향을 주었다. 동시에 국내에서는 민족의식의 확산과 함께 교육·언론·문화운동, 경제적 자립을 지향한 여러 사회운동이 활성화되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요약하면, 3.1운동은 즉각적인 독립 달성에는 이르지 못했더라도, 이후 독립운동의 조직화·국제화·대중화에 장기적인 동력을 제공한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참고문헌
- 국사편찬위원회. 「3·1 운동」, 우리역사넷. [1]
- 한국학중앙연구원. 「3·1운동(三一運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