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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div style="text-align:center;"> | + | <div style="text-align:center;">조선과 청의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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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청의 관계== | ==조선과 청의 관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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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개요=== | ||
| − | 조선과 청나라는 역사적으로 복잡한 관계를 맺고 | + | 조선과 청나라는 역사적으로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다. 조선은 장기간에 걸쳐 청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문화, 정치, 군사적 영향을 받았다. 청나라가 세력을 확장함에 따라 조선은 청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속국의 위치에 있었다. 이 관계는 조선의 대외정책과 국제관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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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돌기(17세기초)=== | === 충돌기(17세기초)=== | ||
| − | 정묘호란 ( | + | ====정묘호란==== |
| − | + |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A%B4%84%EC%9D%98_%EB%82%9C 반란에 실패한 이괄]의 잔당 중 한명련의 아들, 한윤과 한택은 후금으로 도망하여, 거기서 광해군의 폐위와 인조 즉위의 부당성을 호소하고, 또 조선의 병력이 약하며 모문룡의 군사가 오합(烏合)임을 말하여 속히 조선을 칠 것을 종용하였다. 명나라와의 교전으로 인한 경제단교로 심한 물자 부족에 처하여 있던 후금 태종(太宗) [https://ko.wikipedia.org/wiki/%EC%88%AD%EB%8D%95%EC%A0%9C 홍타이지(皇太極)]에게, 이괄 잔당의 이러한 종용은 더욱 조선 침입의 결의를 촉진시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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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627년(인조 5년) 1월 13일(양력 2월 28일), 홍타이지는 광해군을 위하여 보복한다는 구실을 내세우고, 버일러(beile, 貝勒 : 만주·몽골의 부족장) 아민(Amin, 阿敏)에게 군사 3만 명을 주어 조선을 침입하게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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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후금군의 일부는 가도의 모문룡을 치고, 주력 부대 3만 명은 1월 14일(양력 3월 1일) 의주를 점령하고[1], 1월 15일(양력 3월 2일)엔 정주성을 함락시켰고, 1월 21일(양력 3월 8일) 안주성에서 남이흥, 전상의, 양진국, 장돈, 김언수, 함응수, 김준, 김양언, 송덕영을 죽인 이후 함락시켰고, 1월 23일(양력 3월 10일) 평양성에 도착했다. 이에 소현세자는 전주로 피난가고, 인조와 조선 조정은 강화도로 피난하였다.[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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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조선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나 평안북도 철산의 정봉수와 용천의 이립의 의병이 전투에서 승리하자, 명나라와 전쟁 중이였던 후금은 조선이 자신들의 배후를 공격할 것을 염려하여 강화를 제의하였다. 1627년 3월 3일(양력 4월 18일) 조선과 후금 사이에 강화가 성립되었다. 이때 조선은 후금과 형제관계를 맺었다. | ||
| + | ====병자호란==== | ||
| + | [[파일:삼전도비.JPG|섬네일|삼전도비]] | ||
| + | 정묘호란 이후 후금은 조선에 여러 가지를 요구하였다. 이 요구에는 식량 지원과 명 정벌에 사용할 병선(兵船) 제공이 포함되었고 1632년(인조 10) 조선에 “형제지맹”을 “군신지의”로 바꾸기를 요구했는데 이것은 조선을 신하의 나라로 삼으려는 굴욕스러운 요구였다. 후금의 무리한 요구와 강압 정책으로 조선 내에서는 주자학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화친하자는 논의를 배척하자는 척화론(斥和論)이 대두되었고 후금과의 관계는 악화하기 시작했다. 한편 후금의 숭덕제는 내몽골을 평정한 뒤 만주족의 왕을 일컫는 칭호인 한(汗)을 버리고 황제를 칭하려 했다. 1636년(인조 14) 3월에 [https://ko.wikipedia.org/wiki/%ED%83%80%ED%83%80%EB%9D%BC_%EC%9E%89%EA%B5%B4%EB%8B%A4%EC%9D%B4 잉굴다이(Inggūldai, 龍骨大)]와 마푸타(Mafuta, 馬福大) 등을 보내어 여러 만주·몽골의 부족장들이 숭덕제에게 올린 존호의 글을 보이면서 조선 조정도 이같이 하라고 요구하였으나 척화론을 좇아 인조는 후금의 사신을 접견하지도 않고 국서도 받지 않았다. 물론 조정에서는 [https://ko.wikipedia.org/wiki/%EC%B5%9C%EB%AA%85%EA%B8%B8_(1586%EB%85%84) 최명길]과 같이 전쟁을 피하고 화해하거나 평화롭게 지내자는 주화론(主和論)을 주장한 자도 있었지만, 대세는 척화선전(斥和宣戰) 하는 기운으로 기울어졌고 드디어 팔도에 선전(宣戰) 교서를 내리어 방비를 굳게 하고 적의를 보였다.12월 8일, 청나라 선봉대가 압록강을 건너옴으로서 침공이 시작되었다. 당시, 조선의 대청 방어전략은 청야견벽(淸野堅壁)으로, 강한 청의 기병과 직접 맞부딪치는 것을 피하고 침공로 주변의 성에 군사를 집결하여 공성전을 강요함으로서 전쟁을 장기전으로 이끄는 것이었다. 이 전략은 명이 아무리 약화되었더라도 이를 배후에 두고서는 장기전을 벌이기 어려운 청의 약점을 노린 것으로, 유사시에는 수군이 약한 청의 공세를 피할 수 있도록 강화도에 파천하는 계획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정묘호란 당시 인조가 강화도로 파천하는 것을 지켜본 경험이 있는 청은 조선군이 지키고 있던 산성을 우회해서, 한양으로 신속히 남하하여 인조와 조정이 강화도로 피난하는 길을 차단하였다. 봉화를 통한 긴급 통신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조정이 청군의 침공을 인지한 것은 12월 13일이었으며, 인조는 청군이 한양에 거의 접근한 12월 14일에서야 파천에 나섰으나 강화도로 향하는 길이 이미 차단당한 이후라 남한산성으로 피할 수 밖에 없었다. | ||
| − | ==== | + | 남한산성은 천혜의 요새로 1만 3천여 명의 조선군이 수성에 나서 청군이 이를 공략하기는 쉽지 않았으나, 사전에 방어를 위한 준비가 갖춰지지 않았던 터라 한 달 남짓 버틸 수 있는 군량 밖에 없어 장기전을 도모하기 어려웠다. 조정은 남한산성과 강화도가 항전하는 동안 전국 각지의 관군이 집결하여 청군의 포위를 풀 것을 기대하였으나, 충청도 근왕병의 진격이 죽산에서 멈추었고(12월 19일) 12월 2일에서 청군에게 패배하였으며 수원 광교산 전투에서 청군에게 승리를 거둔 전라도 근왕병마저 보급 부족으로 퇴각함으로서 남한산성의 고립은 심화되었다. 한편,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청야견벽 전략에 따라 수성을 준비하다 허를 찔린 조선군은 청군의 뒤를 쫓아 남하하였으나 12월 25일 도르곤이 이끄는 청의 우익군에게 기습을 당하여 양근 미원으로 퇴각하였다. 양근 미원에는 약 1만 7천여 명의 조선군이 집결하였으나 청군과 정면으로 대결하지 못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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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강화도에는 세자빈(소현세자의 부인)과 봉림대군(후일 효종)을 비롯하여 왕실과 역대 임금의 신주가 피난해 있었다. 인조와 조정은 수전의 경험이 적은 청군이 강화도를 공략하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였으나, 청군은 명 수군 출신의 공유덕과 경중명 등을 앞세워 강화도를 공격하였다. 숭덕제는 인조가 1월 19일까지 항복하지 않자 강화도 공격을 명령하였고, 청군은 1월 22일 새벽부터 강화도 상륙을 시도하여 당일 오후에 강화산성을 함락시켰다. 비축 식량의 소진으로 어려움을 겪던 인조와 조정은 2월 20일(음력 1월 26일) 강화도 실함 사실을 접하자 항전의지를 상실했고, 결국 1월 30일(양력 2월 24일) 출성하여 삼전도에서 숭덕제에게 항복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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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교류기(18세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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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인물---박지원==== | ||
| + | [[파일:조선박지원.jpg|섬네일|박지원.jpg]] | ||
| + |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미중(美仲) 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 연상(煙湘), 열상외사(洌上外史)이고, 시호는 문도(文度)이다.[1][2][3][4] 1765년 집안 어른들의 기대 때문에 과거에 응시한 그는 일부러 과거시험에 합격하지 않았고, 이후에도 과거를 피했으며 학문 연구와 저술에만 몰두하였다. 저서로는 북학파 실학자 연암의 철학이 담긴 [https://ko.wikipedia.org/wiki/%EC%97%B4%ED%95%98%EC%9D%BC%EA%B8%B0 《열하일기》], 소설인 [https://ko.wikipedia.org/wiki/%ED%97%88%EC%83%9D%EC%A0%84 《허생전》]이 있다. 그는 [https://ko.wikipedia.org/wiki/%EC%B2%AD%EB%82%98%EB%9D%BC 청나라]의 신문물에 관심을 두었다. 정조대왕이 즉위한 후에 여러번이나 학문과 문장력을 존중받아서 추천받았지만 고사하다가, 노론 명문가인 반남 박씨 집안의 거듭된 권고로 1786년 문음으로 출사하게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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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786년 음서로 선공감 감역이 되어 1789년 평시서주부(平市署主簿)·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 1791년 한성부판관, 1792년 안의현감(安義縣監), 1797년 면천군수(沔川郡守), 1800년 양양부사를 역임했다. 안의현감 재직 중 북경여행을 다녀왔으며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실험적 작업을 시도하였으며, 면천군수 재직 중 《과농소초(課農小抄)》,《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 《안설(按說)》 등의 저서를 남겼다. 사후에도 그의 문집과 저서는 간행되지 못하다가 1910년(융희 4년)에 가서야 간행되었다. 증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다. | ||
| + | |||
| + | 당색으로는 노론이었으나, 노론의 한 분파인 [https://ko.wikipedia.org/wiki/%EB%B6%81%ED%95%99 북학파(北學派)]를 세워 그 영수가 되었다. 홍대용, 박제가 등과 함께 청나라의 우수한 점을 배워서 민중들의 삶을 위해야 한다면서, 상업과 공업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https://ko.wikipedia.org/wiki/%EC%A4%91%EC%83%81%EC%A3%BC%EC%9D%98 중상주의]를 주장하였다. 실례로 《열하일기》에서 박지원은 청나라를 본받아서 수레를 사용하고 도로를 닦아서 생필품들을 널리 사고팔도록 해야, 민중들이 생필품을 손쉽게 구할 수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이를 북학파라고 한다. 그의 제자로는 [https://ko.wikipedia.org/wiki/%EB%B0%95%EC%A0%9C%EA%B0%80 박제가], [https://ko.wikipedia.org/wiki/%EC%9C%A0%EB%93%9D%EA%B3%B5 유득공], [https://ko.wikipedia.org/wiki/%EC%9D%B4%EB%8D%95%EB%AC%B4 이덕무] 등이 있다. | ||
| + | |||
| + | =====홍대용===== | ||
| + | 홍대용(洪大容, 1731년 3월 1일[1] ~ 1783년 10월 23일[2](음력))은 조선 후기의 문신, 실학자이자 과학 사상가이다. 자는 덕보(德保), 호는 담헌(湛軒)과 홍지(弘之)이며,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북학파(北學派)의 학자인 박지원, 박제가 등과 우정을 쌓았으며, 학풍은 유학보다도 군국과 경제장려에 치중하였다. | ||
| + | 생애 초기 | ||
| + | 홍대용은 영조 7년에 충청도 청주목 수신면 (현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수신면) 장산리 수촌마을에서 태어났다. 당색으로는 노론이었는데, 그는 그 중에서도 노론 북학파에 가담하게 된다. 북학파의 선구자로서 일찍이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에게 글과 학문을 배워 당대의 국학(國學)으로 쥐지냈고 그 문하생들인 유득공, 이서구, 박제가 등과도 가깝게 지냈다. | ||
| + | 그와 친하게 지냈던 인물인 박제가는 후일 홍대용의 외재종손인 김정희가 다시 박제가의 문하생이 되기도 했다. | ||
| + | 북경 방문 | ||
| + | 1765년(조선 영조 41년) 35세 때 숙부인 홍억(洪檍)이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갈 때 군관(軍官)으로 수행, 3개월여를 북경에 묵으면서 엄성(嚴誠), 반정균(潘庭筠), 육비(陸飛) 등을 만나 담론하며 경의(經義), 성리(性理), 역사, 풍속 등에 대하여 토론했다. 한편 천문학·지리학·역사 등에 관한 지식을 쌓고 서양 문물을 배우고 돌아왔다. 또 천주당(天主堂)에서 서양 문물을 견학, 학습하고 독일 사람으로 청나라의 흠천감정(欽天監正)을 하는 할레르슈타인(劉松齡)과 흠천감 부감(副監) 고가이슬(鮑友管) 등을 만나 면담했으며, 청나라 관상대(觀象臺)를 여러 번 방문, 견학하여 천문지식을 습득해 오기도 했다. 홍대용의 이와 같은 북경 방문은 당시의 여러 북학파 학자 중에서도 제일 처음의 일로서 실학의 도입에서 그 선구적 업적이 크다. | ||
| − | + | 귀국 후추 | |
| + | 귀국하여 천주교와 천문학의 이론을 기록한 유포문답과 과학 사상을 담은 의산문답을 지었다. 지구의 자전설과 경제 정책의 개혁, 과거 제도를 폐지하여 공거제를 통한 인재 등용 등 혁신적인 개혁 사상을 제창하였다. 또한 박지원, 박제가 등의 실학자들과 교류를 계속하면서 정치·경제에 관한 학문을 연구하였다. | ||
| − | ==== | + | 1774년(영조 50년), 나이 44세 때 귀국 후 수차 과거에 실패하고 음서제에 의해 선공감의 종9품 관리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 뒤 한 차례의 사직, 삼사의 사헌부 감찰직 등을 거쳐 1780년 영주 군수를 지내게 되었다. 관직에 있으면서도 쉬지 않고 자신의 학설을 직접 사회에 도입해보려는 노력을 하였으나 시대 환경에 억눌려 별 성과 없이 눈을 감았다. |
| − | + | =====교류===== | |
2025년 12월 3일 (수) 21:37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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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조선과 청의 관계
개요
조선과 청나라는 역사적으로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다. 조선은 장기간에 걸쳐 청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문화, 정치, 군사적 영향을 받았다. 청나라가 세력을 확장함에 따라 조선은 청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속국의 위치에 있었다. 이 관계는 조선의 대외정책과 국제관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충돌기(17세기초)
정묘호란
반란에 실패한 이괄의 잔당 중 한명련의 아들, 한윤과 한택은 후금으로 도망하여, 거기서 광해군의 폐위와 인조 즉위의 부당성을 호소하고, 또 조선의 병력이 약하며 모문룡의 군사가 오합(烏合)임을 말하여 속히 조선을 칠 것을 종용하였다. 명나라와의 교전으로 인한 경제단교로 심한 물자 부족에 처하여 있던 후금 태종(太宗) 홍타이지(皇太極)에게, 이괄 잔당의 이러한 종용은 더욱 조선 침입의 결의를 촉진시켰다.
1627년(인조 5년) 1월 13일(양력 2월 28일), 홍타이지는 광해군을 위하여 보복한다는 구실을 내세우고, 버일러(beile, 貝勒 : 만주·몽골의 부족장) 아민(Amin, 阿敏)에게 군사 3만 명을 주어 조선을 침입하게 했다.
후금군의 일부는 가도의 모문룡을 치고, 주력 부대 3만 명은 1월 14일(양력 3월 1일) 의주를 점령하고[1], 1월 15일(양력 3월 2일)엔 정주성을 함락시켰고, 1월 21일(양력 3월 8일) 안주성에서 남이흥, 전상의, 양진국, 장돈, 김언수, 함응수, 김준, 김양언, 송덕영을 죽인 이후 함락시켰고, 1월 23일(양력 3월 10일) 평양성에 도착했다. 이에 소현세자는 전주로 피난가고, 인조와 조선 조정은 강화도로 피난하였다.[2]
조선 곳곳에서 의병이 일어나 평안북도 철산의 정봉수와 용천의 이립의 의병이 전투에서 승리하자, 명나라와 전쟁 중이였던 후금은 조선이 자신들의 배후를 공격할 것을 염려하여 강화를 제의하였다. 1627년 3월 3일(양력 4월 18일) 조선과 후금 사이에 강화가 성립되었다. 이때 조선은 후금과 형제관계를 맺었다.
병자호란
정묘호란 이후 후금은 조선에 여러 가지를 요구하였다. 이 요구에는 식량 지원과 명 정벌에 사용할 병선(兵船) 제공이 포함되었고 1632년(인조 10) 조선에 “형제지맹”을 “군신지의”로 바꾸기를 요구했는데 이것은 조선을 신하의 나라로 삼으려는 굴욕스러운 요구였다. 후금의 무리한 요구와 강압 정책으로 조선 내에서는 주자학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화친하자는 논의를 배척하자는 척화론(斥和論)이 대두되었고 후금과의 관계는 악화하기 시작했다. 한편 후금의 숭덕제는 내몽골을 평정한 뒤 만주족의 왕을 일컫는 칭호인 한(汗)을 버리고 황제를 칭하려 했다. 1636년(인조 14) 3월에 잉굴다이(Inggūldai, 龍骨大)와 마푸타(Mafuta, 馬福大) 등을 보내어 여러 만주·몽골의 부족장들이 숭덕제에게 올린 존호의 글을 보이면서 조선 조정도 이같이 하라고 요구하였으나 척화론을 좇아 인조는 후금의 사신을 접견하지도 않고 국서도 받지 않았다. 물론 조정에서는 최명길과 같이 전쟁을 피하고 화해하거나 평화롭게 지내자는 주화론(主和論)을 주장한 자도 있었지만, 대세는 척화선전(斥和宣戰) 하는 기운으로 기울어졌고 드디어 팔도에 선전(宣戰) 교서를 내리어 방비를 굳게 하고 적의를 보였다.12월 8일, 청나라 선봉대가 압록강을 건너옴으로서 침공이 시작되었다. 당시, 조선의 대청 방어전략은 청야견벽(淸野堅壁)으로, 강한 청의 기병과 직접 맞부딪치는 것을 피하고 침공로 주변의 성에 군사를 집결하여 공성전을 강요함으로서 전쟁을 장기전으로 이끄는 것이었다. 이 전략은 명이 아무리 약화되었더라도 이를 배후에 두고서는 장기전을 벌이기 어려운 청의 약점을 노린 것으로, 유사시에는 수군이 약한 청의 공세를 피할 수 있도록 강화도에 파천하는 계획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정묘호란 당시 인조가 강화도로 파천하는 것을 지켜본 경험이 있는 청은 조선군이 지키고 있던 산성을 우회해서, 한양으로 신속히 남하하여 인조와 조정이 강화도로 피난하는 길을 차단하였다. 봉화를 통한 긴급 통신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조정이 청군의 침공을 인지한 것은 12월 13일이었으며, 인조는 청군이 한양에 거의 접근한 12월 14일에서야 파천에 나섰으나 강화도로 향하는 길이 이미 차단당한 이후라 남한산성으로 피할 수 밖에 없었다.
남한산성은 천혜의 요새로 1만 3천여 명의 조선군이 수성에 나서 청군이 이를 공략하기는 쉽지 않았으나, 사전에 방어를 위한 준비가 갖춰지지 않았던 터라 한 달 남짓 버틸 수 있는 군량 밖에 없어 장기전을 도모하기 어려웠다. 조정은 남한산성과 강화도가 항전하는 동안 전국 각지의 관군이 집결하여 청군의 포위를 풀 것을 기대하였으나, 충청도 근왕병의 진격이 죽산에서 멈추었고(12월 19일) 12월 2일에서 청군에게 패배하였으며 수원 광교산 전투에서 청군에게 승리를 거둔 전라도 근왕병마저 보급 부족으로 퇴각함으로서 남한산성의 고립은 심화되었다. 한편,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청야견벽 전략에 따라 수성을 준비하다 허를 찔린 조선군은 청군의 뒤를 쫓아 남하하였으나 12월 25일 도르곤이 이끄는 청의 우익군에게 기습을 당하여 양근 미원으로 퇴각하였다. 양근 미원에는 약 1만 7천여 명의 조선군이 집결하였으나 청군과 정면으로 대결하지 못하였다.
강화도에는 세자빈(소현세자의 부인)과 봉림대군(후일 효종)을 비롯하여 왕실과 역대 임금의 신주가 피난해 있었다. 인조와 조정은 수전의 경험이 적은 청군이 강화도를 공략하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하였으나, 청군은 명 수군 출신의 공유덕과 경중명 등을 앞세워 강화도를 공격하였다. 숭덕제는 인조가 1월 19일까지 항복하지 않자 강화도 공격을 명령하였고, 청군은 1월 22일 새벽부터 강화도 상륙을 시도하여 당일 오후에 강화산성을 함락시켰다. 비축 식량의 소진으로 어려움을 겪던 인조와 조정은 2월 20일(음력 1월 26일) 강화도 실함 사실을 접하자 항전의지를 상실했고, 결국 1월 30일(양력 2월 24일) 출성하여 삼전도에서 숭덕제에게 항복하였다.
교류기(18세기)
인물---박지원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미중(美仲) 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 연상(煙湘), 열상외사(洌上外史)이고, 시호는 문도(文度)이다.[1][2][3][4] 1765년 집안 어른들의 기대 때문에 과거에 응시한 그는 일부러 과거시험에 합격하지 않았고, 이후에도 과거를 피했으며 학문 연구와 저술에만 몰두하였다. 저서로는 북학파 실학자 연암의 철학이 담긴 《열하일기》, 소설인 《허생전》이 있다. 그는 청나라의 신문물에 관심을 두었다. 정조대왕이 즉위한 후에 여러번이나 학문과 문장력을 존중받아서 추천받았지만 고사하다가, 노론 명문가인 반남 박씨 집안의 거듭된 권고로 1786년 문음으로 출사하게 된다.
1786년 음서로 선공감 감역이 되어 1789년 평시서주부(平市署主簿)·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 1791년 한성부판관, 1792년 안의현감(安義縣監), 1797년 면천군수(沔川郡守), 1800년 양양부사를 역임했다. 안의현감 재직 중 북경여행을 다녀왔으며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실험적 작업을 시도하였으며, 면천군수 재직 중 《과농소초(課農小抄)》,《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 《안설(按說)》 등의 저서를 남겼다. 사후에도 그의 문집과 저서는 간행되지 못하다가 1910년(융희 4년)에 가서야 간행되었다. 증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당색으로는 노론이었으나, 노론의 한 분파인 북학파(北學派)를 세워 그 영수가 되었다. 홍대용, 박제가 등과 함께 청나라의 우수한 점을 배워서 민중들의 삶을 위해야 한다면서, 상업과 공업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중상주의를 주장하였다. 실례로 《열하일기》에서 박지원은 청나라를 본받아서 수레를 사용하고 도로를 닦아서 생필품들을 널리 사고팔도록 해야, 민중들이 생필품을 손쉽게 구할 수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이를 북학파라고 한다. 그의 제자로는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이 있다.
홍대용
홍대용(洪大容, 1731년 3월 1일[1] ~ 1783년 10월 23일[2](음력))은 조선 후기의 문신, 실학자이자 과학 사상가이다. 자는 덕보(德保), 호는 담헌(湛軒)과 홍지(弘之)이며,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북학파(北學派)의 학자인 박지원, 박제가 등과 우정을 쌓았으며, 학풍은 유학보다도 군국과 경제장려에 치중하였다. 생애 초기 홍대용은 영조 7년에 충청도 청주목 수신면 (현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수신면) 장산리 수촌마을에서 태어났다. 당색으로는 노론이었는데, 그는 그 중에서도 노론 북학파에 가담하게 된다. 북학파의 선구자로서 일찍이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에게 글과 학문을 배워 당대의 국학(國學)으로 쥐지냈고 그 문하생들인 유득공, 이서구, 박제가 등과도 가깝게 지냈다. 그와 친하게 지냈던 인물인 박제가는 후일 홍대용의 외재종손인 김정희가 다시 박제가의 문하생이 되기도 했다.
북경 방문 1765년(조선 영조 41년) 35세 때 숙부인 홍억(洪檍)이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갈 때 군관(軍官)으로 수행, 3개월여를 북경에 묵으면서 엄성(嚴誠), 반정균(潘庭筠), 육비(陸飛) 등을 만나 담론하며 경의(經義), 성리(性理), 역사, 풍속 등에 대하여 토론했다. 한편 천문학·지리학·역사 등에 관한 지식을 쌓고 서양 문물을 배우고 돌아왔다. 또 천주당(天主堂)에서 서양 문물을 견학, 학습하고 독일 사람으로 청나라의 흠천감정(欽天監正)을 하는 할레르슈타인(劉松齡)과 흠천감 부감(副監) 고가이슬(鮑友管) 등을 만나 면담했으며, 청나라 관상대(觀象臺)를 여러 번 방문, 견학하여 천문지식을 습득해 오기도 했다. 홍대용의 이와 같은 북경 방문은 당시의 여러 북학파 학자 중에서도 제일 처음의 일로서 실학의 도입에서 그 선구적 업적이 크다.
귀국 후추 귀국하여 천주교와 천문학의 이론을 기록한 유포문답과 과학 사상을 담은 의산문답을 지었다. 지구의 자전설과 경제 정책의 개혁, 과거 제도를 폐지하여 공거제를 통한 인재 등용 등 혁신적인 개혁 사상을 제창하였다. 또한 박지원, 박제가 등의 실학자들과 교류를 계속하면서 정치·경제에 관한 학문을 연구하였다.
1774년(영조 50년), 나이 44세 때 귀국 후 수차 과거에 실패하고 음서제에 의해 선공감의 종9품 관리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 뒤 한 차례의 사직, 삼사의 사헌부 감찰직 등을 거쳐 1780년 영주 군수를 지내게 되었다. 관직에 있으면서도 쉬지 않고 자신의 학설을 직접 사회에 도입해보려는 노력을 하였으나 시대 환경에 억눌려 별 성과 없이 눈을 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