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실록"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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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으로 인한 사료 소실과 1차 자료 수습의 어려움)
(역사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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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따라 1595년(선조 28) 2월 15일, 경연관 <span style="background:#f1b1b2>'''정경세(鄭經世)'''</span>의 건의로 춘추관은 전란 이전의 사관들에게 기억을 기록하여 제출하도록 명했고, 동시에 당시까지 남아 있던 <font color="red">'''조보(朝報), 정목(政目), 개인의 일기, 야사(野史)'''</font> 등을 수집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가 얼마나 실효성 있게 이루어졌는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실제로 이후에도 조정은 꾸준히 자료 수집을 시도해야 했다.<br/>
 
이에 따라 1595년(선조 28) 2월 15일, 경연관 <span style="background:#f1b1b2>'''정경세(鄭經世)'''</span>의 건의로 춘추관은 전란 이전의 사관들에게 기억을 기록하여 제출하도록 명했고, 동시에 당시까지 남아 있던 <font color="red">'''조보(朝報), 정목(政目), 개인의 일기, 야사(野史)'''</font> 등을 수집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가 얼마나 실효성 있게 이루어졌는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실제로 이후에도 조정은 꾸준히 자료 수집을 시도해야 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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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9년에도 조정은 유희춘의 『미암일기』, 유조인의 『행조일기』 등 개인이 소장한 일록(家藏日錄)부터, 배삼익.이기.이수준 등의 집에 흩어져 있던 조보의 단간(斷簡), 그리고 사대부 문집 속에 포함된 소(疏), 차(箚), 비명(碑銘) 등 각종 기록을 적극적으로 모아야 했다. 즉, <ins>『선조실록』 편찬은 기존 정사 편찬과 달리 전란으로 파괴된 사료의 ‘복원’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ins>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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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9년에도 조정은 유희춘의 『미암일기』, 유조인의 『행조일기』 등 개인이 소장한 일록(家藏日錄)부터, 배삼익.이기.이수준 등의 집에 흩어져 있던 조보의 단간(斷簡), 그리고 사대부 문집 속에 포함된 소(疏), 차(箚), 비명(碑銘) 등 각종 기록을 적극적으로 모아야 했다. 즉, <font color="red"><ins>『선조실록』 편찬은 기존 정사 편찬과 달리 전란으로 파괴된 사료의 ‘복원’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ins></font>이다.
  
 
====<span style="background:#becbff">'''광해군대의 정치적 불안정과 무옥(誣獄)에 따른 편찬 주체의 잦은 교체'''</span>====
 
====<span style="background:#becbff">'''광해군대의 정치적 불안정과 무옥(誣獄)에 따른 편찬 주체의 잦은 교체'''</span>====
편찬 지체의 두 번째 원인은 광해군대의 불안한 정국 운영과 잇따른 무옥(誣獄) 때문이다. 실록 편찬을 주도하던 중심 인물들이 정치 사건에 휘말려 좌천·파직·유배되는 일이 반복되면서, 편찬 과정 전체가 지속적으로 흔들렸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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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찬 지체의 두 번째 원인은 <ins><span style="background:#becbff">'''광해군대의 불안한 정국 운영과 잇따른 무옥(誣獄)'''</span></ins> 때문이다. <ins><span style="background:#becbff">'''실록 편찬을 주도하던 중심 인물들이 정치 사건에 휘말려 좌천·파직·유배되는 일이 반복'''</span></ins>되면서, 편찬 과정 전체가 지속적으로 흔들렸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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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편찬 체제에서 총재관(摠裁官)은 이항복(李恒福)이었고, 이정귀(李廷龜)가 1611년 대제학에 오르면서 신흠(申欽)도 합류하여 편찬의 주축을 이루었다. 즉, 편찬의 1차 진용은 이항복–이정귀–신흠의 삼각 구도로 구성되었다.<br/>
 
초기 편찬 체제에서 총재관(摠裁官)은 이항복(李恒福)이었고, 이정귀(李廷龜)가 1611년 대제학에 오르면서 신흠(申欽)도 합류하여 편찬의 주축을 이루었다. 즉, 편찬의 1차 진용은 이항복–이정귀–신흠의 삼각 구도로 구성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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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광해군 5년, 김제남의 옥사가 발생하면서 이항복은 인재를 잘못 천거했다는 책임을 지고 중추부로 좌천되었다. 이어 광해군 9년 인목대비의 서궁(西宮) 유폐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함경도 북청에 유배되었고, 광해군 10년에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이정귀와 신흠 역시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박응서 사건과 김제남 옥사에 잇따라 연루되어 파직되었다.<br/>
 
그러나 광해군 5년, 김제남의 옥사가 발생하면서 이항복은 인재를 잘못 천거했다는 책임을 지고 중추부로 좌천되었다. 이어 광해군 9년 인목대비의 서궁(西宮) 유폐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함경도 북청에 유배되었고, 광해군 10년에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이정귀와 신흠 역시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박응서 사건과 김제남 옥사에 잇따라 연루되어 파직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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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편찬 인력이 모두 탈락하면서, 편찬 책임은 이후 이이첨(李爾瞻)과 기자헌(奇自獻) 등의 손으로 넘어갔다. 이는 실록 편찬의 연속성이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는 구조적 요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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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편찬 인력이 모두 탈락하면서, 편찬 책임은 이후 <ins><span style="background:#becbff">'''이이첨(李爾瞻)'''</span></ins><ins><span style="background:#becbff">'''기자헌(奇自獻)'''</span></ins> 등의 손으로 넘어갔다. 이는 실록 편찬의 연속성이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는 구조적 요인이었다.
  
 
==='''『선조실록』편찬인원'''===
 
==='''『선조실록』편찬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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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내용'''===
실록의 정식 명칭은『선조소경대왕실록(宣祖昭敬大王實錄)』이다. 이 실록은 1567년 7월 선조의 즉위부터 1608년 1월 선조의 승하까지, 총 40년 7개월에 걸친 국정 전반을 다룬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하나이다. 편찬은 1609년(광해군 1) 7월에 시작되어 이듬해 11월에 일단락되었으며, 총 221권 116책이라는 방대한 규모로 구성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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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의 정식 명칭은 <ins><span style="background:#f1b1b2>'''『선조소경대왕실록(宣祖昭敬大王實錄)』'''</ins></span>이다. 이 실록은 1567년 7월 선조의 즉위부터 1608년 1월 선조의 승하까지, 총 40년 7개월에 걸친 국정 전반을 다룬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하나이다. 편찬은 1609년(광해군 1) 7월에 시작되어 이듬해 11월에 일단락되었으며, 총 221권 116책이라는 방대한 규모로 구성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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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실록의 분량 구조를 보면 난점이 분명하다. 1592년 임진왜란 이후의 기록은 충실하게 남아 있으나, 그 이전, 즉 1567년부터 1591년까지 약 25년에 해당하는 기록은 25권 12책, 전체의 1/10 수준에 불과하다. 이는 임진왜란으로 인해 사초(史草),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등 국가 핵심 기록이 대부분 소실된 데에서 비롯한다. 이후 조정은 기록 공백을 메우기 위해 사대부 일기, 지방에 남아 있던 조보(朝報) 등을 수집해 선조 재위 초기의 사실관계를 최대한 복원하고자 하였으나, 어려움이 많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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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실록의 분량 구조를 보면 난점이 분명하다. <ins><font color="red">'''1592년 임진왜란 이후의 기록은 충실하게 남아 있으나, 그 이전, 즉 1567년부터 1591년까지 약 25년에 해당하는 기록은 25권 12책, 전체의 1/10 수준에 불과'''</font></ins>하다. 이는 임진왜란으로 인해 사초(史草),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등 국가 핵심 기록이 대부분 소실된 데에서 비롯한다. 이후 조정은 기록 공백을 메우기 위해 사대부 일기, 지방에 남아 있던 조보(朝報) 등을 수집해 선조 재위 초기의 사실관계를 최대한 복원하고자 하였으나, 어려움이 많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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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소실 문제는 천문 관측 기록에서도 드러난다. 선조 재위기에 두 차례 초신성—SN 1572와 SN 1604—이 관측되었음에도, 전자의 기록은 『선조수정실록』에 단 한 줄만 전하고 『선조실록』에는 아예 남아 있지 않다. 반면 1604년에 폭발한 SN 1604(일명 ‘케플러 초신성’)에 대해서는 130회가량의 관측 기록이 실록에 상세히 전해져, 요하네스 케플러의 기록보다도 더 정밀하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이다. 이러한 차이는 임진왜란 이전 사료의 거의 전면적인 소실에 기인한다. 당시 조선은 이 초신성을 매우 불길한 ‘천변(天變)’으로 인식했으며, 초신성 발견 시점도 이탈리아–명–조선–프라하 순으로 이어졌다(10월 9일 이탈리아, 10일 명나라, 13일 조선, 17일 케플러의 관측)<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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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소실 문제는 <ins><span style="background:#f1b1b2>'''천문 관측 기록'''</ins></span>에서도 드러난다. 선조 재위기에 두 차례 <font color="red">'''초신성—SN 1572와 SN 1604—'''</font>이 관측되었음에도, 전자의 기록은 『선조수정실록』에 단 한 줄만 전하고 『선조실록』에는 아예 남아 있지 않다. 반면 1604년에 폭발한 SN 1604(일명 ‘케플러 초신성’)에 대해서는 130회가량의 관측 기록이 실록에 상세히 전해져, 요하네스 케플러의 기록보다도 더 정밀하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이다. 이러한 차이는 <ins><span style="background:#f1b1b2>'''임진왜란 이전 사료의 거의 전면적인 소실'''</ins></span>에 기인한다. 당시 조선은 이 초신성을 매우 불길한 ‘천변(天變)’으로 인식했으며, 초신성 발견 시점도 <font color="red">'''이탈리아–명–조선–프라하 순'''</font>으로 이어졌다(10월 9일 이탈리아, 10일 명나라, 13일 조선, 17일 케플러의 관측)<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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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 소실의 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실록 간 기록이 다르다. 『선조실록』은 이를 일본군의 방화 때문이라고 서술한 반면, 『선조수정실록』은 당시 사관 네 명이 사초를 직접 불태우고 야밤에 도주하였다고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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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 소실의 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실록 간 기록이 다르다. <ins><span style="background:#f1b1b2>'''『선조실록』'''</ins></span>은 이를 <ins><font color="red">'''일본군의 방화 때문'''</ins></font>이라고 서술한 반면, <ins><span style="background:#becbff>'''『선조수정실록』'''</ins></span>은 당시 <ins><font color="blue">사관 네 명이 사초를 직접 불태우고 야밤에 도주</ins></font>하였다고 기록한다.
실제로 『선조수정실록』 25년 6월 1일조에는 다음과 같은 사건이 실려 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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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선조수정실록』25년 6월 1일조에는 다음과 같은 사건이 실려 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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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관 조존세·김선여·임취정·박정현 등이 사초를 구덩이에 넣고 불을 지른 뒤 밤중을 틈타 도망하였다. 선조는 호종하던 사관을 계속 찾았으나 찾을 수 없었고, 날이 밝은 뒤에야 그들이 도망친 사실을 알았다.
 
사관 조존세·김선여·임취정·박정현 등이 사초를 구덩이에 넣고 불을 지른 뒤 밤중을 틈타 도망하였다. 선조는 호종하던 사관을 계속 찾았으나 찾을 수 없었고, 날이 밝은 뒤에야 그들이 도망친 사실을 알았다.
당시를 따르는 자들은 “상이 환국하시면 그들이 어찌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라며 크게 분노하였다. 이들은 영남과 호남 사이에서 가족을 찾아다니며 ‘상께서 가라 하여 돌아왔다’고 주장했으나, 사람들은 이를 믿지 않았다.『선조수정실록』 25년 6월 1일<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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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를 따르는 자들은 “상이 환국하시면 그들이 어찌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라며 크게 분노하였다. 이들은 영남과 호남 사이에서 가족을 찾아다니며 ‘상께서 가라 하여 돌아왔다’고 주장했으나, 사람들은 이를 믿지 않았다.'''『선조수정실록』 25년 6월 1일'''<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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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편찬 당시의 기록 왜곡 문제는 후대의 개수 작업으로 이어졌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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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편찬 당시의 기록 왜곡 문제는 <ins><span style="background:#f1b1b2>'''후대의 개수 작업'''</ins></span>으로 이어졌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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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1년(인조 19) 기존 『선조실록』이 오류와 문제점이 많다는 지적이 제기되자, 인조는 이식(李植)에게 개수를 명하였다. 당시 개수 작업은 여러 사정으로 난항을 겪었으나, 결국 1657년(효종 8)『선조수정실록』과 『선조대왕실록수정청의궤』가 완성되었다. 『선조수정실록』은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기존 편찬본을 공식적으로 개수한 최초의 사례라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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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1년(인조 19) 기존 『선조실록』이 오류와 문제점이 많다는 지적이 제기되자, 인조는 이식(李植)에게 개수를 명하였다. 당시 개수 작업은 여러 사정으로 난항을 겪었으나, 결국 1657년(효종 8)<ins><span style="background:#becbff>'''『선조수정실록』'''</ins></span>과 <ins><span style="background:#becbff>'''『선조대왕실록수정청의궤』'''</ins></span>가 완성되었다. 『선조수정실록』은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기존 편찬본을 공식적으로 개수한 <font color="red"><ins>'''최초의 사례'''</ins></font>라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역사적 의의'''===
 
==='''역사적 의의'''===
『선조실록』은 전체 221권 가운데 임진왜란 이후 16년간의 기사(1592~1608)가 195권을 차지하고, 그 이전인 선조 즉위년 7월부터 선조 25년 3월(1567~1592)까지의 기록은 26권에 불과하다. 따라서 실록의 상당 부분은 전란 이후의 정치.군사 상황에 집중되어 있으며, 전란 이전 시기의 기록은 매우 소략하게 편찬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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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수정실록으로 재편찬했음에도 수정 전 기록, '선조실록'을 남긴 이유! 차이나는 클라스(jtbclecture) 204회 | JTBC 210422 방송 </h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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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은 전체 221권 가운데 임진왜란 이후 16년간의 기사(1592~1608)가 195권을 차지하고, 그 이전인 선조 즉위년 7월부터 선조 25년 3월(1567~1592)까지의 기록은 26권에 불과하다. 따라서 <span style="background:#becbff>'''실록의 상당 부분은 전란 이후의 정치.군사 상황에 집중되어 있으며, 전란 이전 시기의 기록은 매우 소략하게 편찬'''</span>되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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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적 측면에서도 여러 문제점이 지적된다. 『선조실록』은 전쟁으로 인한 사료 공백과 더불어, 편찬 과정에서의 당파적 관점 개입으로 인해 기사의 구성과 논평에서 공정성을 잃은 부분이 적지 않다. 이러한 이유로 역대 실록 가운데에서도 가장 품질이 떨어지는 편찬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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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적 측면에서도 여러 문제점이 지적된다. 『선조실록』은 <span style="background:#f1b1b2>'''전쟁으로 인한 사료 공백'''</span>과 더불어, <span style="background:#becbff>편찬 과정에서의 당파적 관점 개입으로 인해 기사의 구성과 논평에서 공정성을 잃은 부분</span>이 적지 않다. 이러한 이유로 역대 <ins><font color="red">'''실록 가운데에서도 가장 품질이 떨어지는 편찬본'''</font></ins>이라는 평가를 받는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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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서인계 인물인 이이(李珥).성혼(成渾).박순(朴淳).정철(鄭澈)이나 남인 유성룡(柳成龍) 등에 대해서는 사실과 다른 비방적 서술이 나타나는 반면, 북인 세력의 중심 인물인 이산해(李山海).이이첨(李爾瞻) 등에 대해서는 과도하게 평가를 높이는 기술이 보인다. 이로 인해 실록의 시비(是非)와 선악(善惡)이 뒤바뀌거나 왜곡된 대목이 적지 않다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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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서인계 인물인 이이(李珥).성혼(成渾).박순(朴淳).정철(鄭澈)이나 남인 유성룡(柳成龍) 등에 대해서는 사실과 다른 비방적 서술이 나타나는 반면, 북인 세력의 중심 인물인 이산해(李山海).이이첨(李爾瞻) 등에 대해서는 과도하게 평가를 높이는 기술이 보인다. 이로 인해 <ins><font color="red">'''실록의 시비(是非)와 선악(善惡)이 뒤바뀌거나 왜곡된 대목이 적지 않다는 비판'''</font></ins>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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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문제의식은 인조반정 이후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북인 정권을 무너뜨린 인조 정부는 기존 『선조실록』의 편찬이 정치적 편향과 사실 왜곡에 기반한 것이라고 판단하였고, 결국 이를 바로잡기 위해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을 새로 편찬하게 되었다. 이러한 개수 작업은 조선왕조실록 편찬사에서도 중요한 의의를 지니는 사건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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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문제의식은 인조반정 이후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북인 정권을 무너뜨린 인조 정부는 기존 『선조실록』의 편찬이 정치적 편향과 사실 왜곡에 기반한 것이라고 판단하였고, 결국 이를 바로잡기 위해 <span style="background:#becbff>'''『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span>을 새로 편찬하게 되었다. 이러한 개수 작업은 <ins>'''조선왕조실록 편찬사에서도 중요한 의의를 지니는 사건'''</ins>으로 평가된다.
  
 
[[분류:윤주하]]
 
[[분류:윤주하]]

2025년 12월 3일 (수) 20:25 기준 최신판

목차

선조실록

선조실록.gif


선조실록

서지사항

『선조실록』은 1567년(선조 즉위) 7월부터 1608년(선조 41) 1월까지, 약 40년 7개월 동안의 국정 전반을 기록한 역사서이다. 총 221권 116책으로 구성된 인본(印本)이며, 1609년(광해군 1) 7월에 편찬 작업이 시작되어 1617년(광해군 9)에 완성되었다.

편찬 초기에는 이항복(李恒福)이 총재관(摠裁官)을 맡아 실록 편찬을 총괄하였으나, 계축옥사 전후의 정치 상황 변화로 인해 이후에는 이이첨(李爾瞻), 기자헌(奇自獻) 등이 편찬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사론(史論)에 정치적 왜곡이 다수 포함되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고, 이후 실록은 여러 차례의 수정 과정을 거쳐 정비되었다.

『선조실록』 편찬의 지체 배경

『선조실록』은 1609년(광해군 1) 7월 편찬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1617년(광해군 9)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완성되었다. 전체 편찬 기간이 8년에 달한 것은 단순한 사업 규모 때문이 아니라, 임진왜란으로 인한 사료의 대대적 소실광해군대 정치 상황의 불안정이라는 두 가지 요인이 중첩되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으로 인한 사료 소실과 1차 자료 수습의 어려움

편찬이 늦어진 가장 큰 원인은, 선조대의 실록 편찬을 위한 기반자료 즉, '사초(史草)와 각종 사책(史冊)—이 임진왜란 과정에서 거의 전부 소실되었다는 데 있었다. 정사 편찬의 기초가 되는 사관(史官)의 사초는 물론이고, 역대 홍문관(弘文館)에 보관하던 여러 서적과 춘추관에 비치된 각조실록(各朝實錄)까지도 전란 속에서 불에 타 없어졌다. 특히 전조(前朝) 사초, 즉 『고려사』 편찬 과정에서 작성된 초고(草稿)까지 소실된 사실은 사료 상황의 심각성을 보여준다.

더불어 『승정원일기』는 한 권도 남지 않고 모두 불타버렸으며, 내외 창고나 각 관서(各官署)에서 관리하던 문서들도 전란 중 도난과 화재로 전부 손실되었다. 이는 곧 실록 편찬의 가장 핵심적인 1차 사료가 사실상 ‘0’ 상태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1595년(선조 28) 2월 15일, 경연관 정경세(鄭經世)의 건의로 춘추관은 전란 이전의 사관들에게 기억을 기록하여 제출하도록 명했고, 동시에 당시까지 남아 있던 조보(朝報), 정목(政目), 개인의 일기, 야사(野史) 등을 수집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가 얼마나 실효성 있게 이루어졌는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실제로 이후에도 조정은 꾸준히 자료 수집을 시도해야 했다.

1609년에도 조정은 유희춘의 『미암일기』, 유조인의 『행조일기』 등 개인이 소장한 일록(家藏日錄)부터, 배삼익.이기.이수준 등의 집에 흩어져 있던 조보의 단간(斷簡), 그리고 사대부 문집 속에 포함된 소(疏), 차(箚), 비명(碑銘) 등 각종 기록을 적극적으로 모아야 했다. 즉, 『선조실록』 편찬은 기존 정사 편찬과 달리 전란으로 파괴된 사료의 ‘복원’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광해군대의 정치적 불안정과 무옥(誣獄)에 따른 편찬 주체의 잦은 교체

편찬 지체의 두 번째 원인은 광해군대의 불안한 정국 운영과 잇따른 무옥(誣獄) 때문이다. 실록 편찬을 주도하던 중심 인물들이 정치 사건에 휘말려 좌천·파직·유배되는 일이 반복되면서, 편찬 과정 전체가 지속적으로 흔들렸다.

초기 편찬 체제에서 총재관(摠裁官)은 이항복(李恒福)이었고, 이정귀(李廷龜)가 1611년 대제학에 오르면서 신흠(申欽)도 합류하여 편찬의 주축을 이루었다. 즉, 편찬의 1차 진용은 이항복–이정귀–신흠의 삼각 구도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광해군 5년, 김제남의 옥사가 발생하면서 이항복은 인재를 잘못 천거했다는 책임을 지고 중추부로 좌천되었다. 이어 광해군 9년 인목대비의 서궁(西宮) 유폐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함경도 북청에 유배되었고, 광해군 10년에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이정귀와 신흠 역시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박응서 사건과 김제남 옥사에 잇따라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주요 편찬 인력이 모두 탈락하면서, 편찬 책임은 이후 이이첨(李爾瞻)기자헌(奇自獻) 등의 손으로 넘어갔다. 이는 실록 편찬의 연속성이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는 구조적 요인이었다.

『선조실록』편찬인원

정국이 요동치는 상황 속에서도 실록청은 방대한 인력을 투입해 편찬을 지속하였다. 편찬 인원 구성은 다음과 같다.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 총재관) : 기자헌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총재관) : 이항복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도청당상) : 이호민, 유근, 이이첨, 이정구, 박홍구, 조정, 민몽룡, 정창연, 이상의, 윤방, 윤승길, 김신원, 박승종, 이시언, 김상용, 오억령, 송순 등 17인

또한 보조적·집필적 역할을 맡은 직원도 광범위했다.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각방당상): 박건, 최유원, 정광적, 신식, 이수광, 박이장, 박진원, 정사호, 구의강, 이성, 김시헌, 김상준, 김권, 최관, 이경함, 남근, 이시발, 한덕원, 이필영, 유공량, 이정신, 강홍립, 강첨, 유인길 등 24인
편수관(編修官) : 윤효전 등 48인
기주관(記注官) : 김유 등 52인
기사관(記事官) : 송일 등 81인

이처럼 편찬관·주석관.기사관 등으로 구성된 방대한 조직은, 소실된 사료를 복원해야 했던 특성상 필요했던 것이며, 동시에 광해군대의 빈번한 인사 개편 속에서도 편찬을 지속하기 위한 체제였다.

내용

실록의 정식 명칭은 『선조소경대왕실록(宣祖昭敬大王實錄)』이다. 이 실록은 1567년 7월 선조의 즉위부터 1608년 1월 선조의 승하까지, 총 40년 7개월에 걸친 국정 전반을 다룬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하나이다. 편찬은 1609년(광해군 1) 7월에 시작되어 이듬해 11월에 일단락되었으며, 총 221권 116책이라는 방대한 규모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실록의 분량 구조를 보면 난점이 분명하다. 1592년 임진왜란 이후의 기록은 충실하게 남아 있으나, 그 이전, 즉 1567년부터 1591년까지 약 25년에 해당하는 기록은 25권 12책, 전체의 1/10 수준에 불과하다. 이는 임진왜란으로 인해 사초(史草),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등 국가 핵심 기록이 대부분 소실된 데에서 비롯한다. 이후 조정은 기록 공백을 메우기 위해 사대부 일기, 지방에 남아 있던 조보(朝報) 등을 수집해 선조 재위 초기의 사실관계를 최대한 복원하고자 하였으나, 어려움이 많았다.

자료 소실 문제는 천문 관측 기록에서도 드러난다. 선조 재위기에 두 차례 초신성—SN 1572와 SN 1604—이 관측되었음에도, 전자의 기록은 『선조수정실록』에 단 한 줄만 전하고 『선조실록』에는 아예 남아 있지 않다. 반면 1604년에 폭발한 SN 1604(일명 ‘케플러 초신성’)에 대해서는 130회가량의 관측 기록이 실록에 상세히 전해져, 요하네스 케플러의 기록보다도 더 정밀하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이다. 이러한 차이는 임진왜란 이전 사료의 거의 전면적인 소실에 기인한다. 당시 조선은 이 초신성을 매우 불길한 ‘천변(天變)’으로 인식했으며, 초신성 발견 시점도 이탈리아–명–조선–프라하 순으로 이어졌다(10월 9일 이탈리아, 10일 명나라, 13일 조선, 17일 케플러의 관측)

사료 소실의 원인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실록 간 기록이 다르다. 『선조실록』은 이를 일본군의 방화 때문이라고 서술한 반면, 『선조수정실록』은 당시 사관 네 명이 사초를 직접 불태우고 야밤에 도주하였다고 기록한다. 실제로 『선조수정실록』25년 6월 1일조에는 다음과 같은 사건이 실려 있다.

사관 조존세·김선여·임취정·박정현 등이 사초를 구덩이에 넣고 불을 지른 뒤 밤중을 틈타 도망하였다. 선조는 호종하던 사관을 계속 찾았으나 찾을 수 없었고, 날이 밝은 뒤에야 그들이 도망친 사실을 알았다. 당시를 따르는 자들은 “상이 환국하시면 그들이 어찌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라며 크게 분노하였다. 이들은 영남과 호남 사이에서 가족을 찾아다니며 ‘상께서 가라 하여 돌아왔다’고 주장했으나, 사람들은 이를 믿지 않았다.『선조수정실록』 25년 6월 1일

이처럼 편찬 당시의 기록 왜곡 문제는 후대의 개수 작업으로 이어졌다.

1641년(인조 19) 기존 『선조실록』이 오류와 문제점이 많다는 지적이 제기되자, 인조는 이식(李植)에게 개수를 명하였다. 당시 개수 작업은 여러 사정으로 난항을 겪었으나, 결국 1657년(효종 8)『선조수정실록』『선조대왕실록수정청의궤』가 완성되었다. 『선조수정실록』은 조선왕조실록 가운데 기존 편찬본을 공식적으로 개수한 최초의 사례라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역사적 의의

선조수정실록으로 재편찬했음에도 수정 전 기록, '선조실록'을 남긴 이유! 차이나는 클라스(jtbclecture) 204회 | JTBC 210422 방송


『선조실록』은 전체 221권 가운데 임진왜란 이후 16년간의 기사(1592~1608)가 195권을 차지하고, 그 이전인 선조 즉위년 7월부터 선조 25년 3월(1567~1592)까지의 기록은 26권에 불과하다. 따라서 실록의 상당 부분은 전란 이후의 정치.군사 상황에 집중되어 있으며, 전란 이전 시기의 기록은 매우 소략하게 편찬되었다.

내용적 측면에서도 여러 문제점이 지적된다. 『선조실록』은 전쟁으로 인한 사료 공백과 더불어, 편찬 과정에서의 당파적 관점 개입으로 인해 기사의 구성과 논평에서 공정성을 잃은 부분이 적지 않다. 이러한 이유로 역대 실록 가운데에서도 가장 품질이 떨어지는 편찬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서인계 인물인 이이(李珥).성혼(成渾).박순(朴淳).정철(鄭澈)이나 남인 유성룡(柳成龍) 등에 대해서는 사실과 다른 비방적 서술이 나타나는 반면, 북인 세력의 중심 인물인 이산해(李山海).이이첨(李爾瞻) 등에 대해서는 과도하게 평가를 높이는 기술이 보인다. 이로 인해 실록의 시비(是非)와 선악(善惡)이 뒤바뀌거나 왜곡된 대목이 적지 않다는 비판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이 같은 문제의식은 인조반정 이후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북인 정권을 무너뜨린 인조 정부는 기존 『선조실록』의 편찬이 정치적 편향과 사실 왜곡에 기반한 것이라고 판단하였고, 결국 이를 바로잡기 위해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을 새로 편찬하게 되었다. 이러한 개수 작업은 조선왕조실록 편찬사에서도 중요한 의의를 지니는 사건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