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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수. (2014). 조선시대 使臣宴 의례의 변천 — 중국 사신에게 베푼 연향을 중심으로 —. 온지논총, 38, 69-120.<br/>
 
*김종수. (2014). 조선시대 使臣宴 의례의 변천 — 중국 사신에게 베푼 연향을 중심으로 —. 온지논총, 38, 69-120.<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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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 and 황효영. (2015). 명·청시기 조선 사신들의 대중국 인식 변화 양상에 대한 연구-‘연행록’ 중의 산해관시(詩)을 중심으로. 아시아문화연구, 39, 29-68.<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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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태혜. (2015). 고려시대 중국사신영접의례와 전통연희. 남도민속연구, 31, 41-76.<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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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刘喜涛,封贡关系视角下明代中朝使臣往来研究,山东师范大学博士学位论文,2011.<br/>
[[참고문헌:김종수. (2014). 조선시대 使臣宴 의례의 변천 — 중국 사신에게 베푼 연향을 중심으로 —. 온지논총, 38, 69-120.]] [[참고문헌:김철 and 황효영. (2015). 명·청시기 조선 사신들의 대중국 인식 변화 양상에 대한 연구-‘연행록’ 중의 산해관시(詩)을 중심으로. 아시아문화연구, 39, 29-68.]] [[참고문헌:민태혜. (2015). 고려시대 중국사신영접의례와 전통연희. 남도민속연구, 31, 41-76.]][[참고문헌:刘喜涛,封贡关系视角下明代中朝使臣往来研究,山东师范大学博士学位论文,2011.]][[참고문헌:白礼如,明代中国使臣笔下的朝鲜形象,延边大学硕士学位论文,2022.]][[참고문헌:https://contents.history.go.kr/front/ta/view.do?levelId=ta_p82r_0010_0020_0070_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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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礼如,明代中国使臣笔下的朝鲜形象,延边大学硕士学位论文,2022.<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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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contents.history.go.kr/front/ta/view.do?levelId=ta_p82r_0010_0020_0070_0520.

2025년 12월 3일 (수) 15:53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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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사신을 배웅하기

연구 동기

조선시대의 외교는 명·청 등 중국 왕조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사신의 영접과 접대 의례는 국제 질서 속에서 조선의 위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연구는 주로 사신의 입국과 영접 절차에 집중되어 왔고, 사신의 귀국 과정에 해당하는 배웅의례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연구가 미비하다. 배웅 의례는 단순한 전송 행위가 아니라, 조선이 외교 관계를 마무리하는 방식이자 상대국에 대한 존중과 자주적 외교 인식을 드러내는 상징적 행위였다. 따라서 이를 고찰함으로써 조선이 대중국 관계 속에서 사대와 자주, 의례와 실리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모색했는지를 보다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사신 배웅에는 중앙과 지방 관청의 협조, 연회 준비, 선물 제공, 인력 동원 등 복합적인 행정·경제적 절차가 수반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조선의 행정 체계, 재정 운용, 물질문화의 구조를 보여주는 단서가 된다. 나아가 배웅 과정에서 이루어진 상인과 역관들의 교류는 당시 조선과 중국 간의 비공식적 무역 및 문화 교류의 현장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본 연구는 조선시대 중국 사신의 배웅 의례를 종합적으로 고찰함으로써, 기존 외교의례 연구의 공백을 메우고 조선 후기 외교문화사의 이해를 보다 심화하고자 한다.

칙사 접대 절차

중국에서 파견된 사신은 일반적으로 칙사(勅使)라 불렸으며, 이들은 황제의 조서(詔書)칙서(勅書), 또는 예부 자문(禮部咨文)이나 요동도사 자문(遼東都司咨文) 등을 지참하고 조선을 방문하였다. 이러한 중국 사신들의 주요 임무는 우선 중국 황실의 중대한 변동 사항을 통보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황제가 붕어하거나, 새 황제가 즉위하거나, 혹은 어린 황제가 성년이 되어 친정을 시작할 때,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 사신이 조선에 파견되었다. 또한 황태자나 황태후를 책봉하는 경우에도 황제의 조서를 전달하기 위해 조선에 사신을 보냈다. 이와 더불어 조선과 관련된 사무를 수행하기 위한 방문도 있었다. 즉, 조선 국왕의 즉위를 승인하거나 왕세자와 왕후의 책봉을 인준하기 위한 황제의 명을 전달하기 위해 파견되었으며, 또한 조선 왕실 구성원에 대한 시호(諡號)나 고명(誥命)을 하달하기 위한 경우도 있었다. 그 밖에도 표류인(漂流人)·도래인(渡來人)·월경인(越境人) 등의 송환 문제, 처녀 진헌, 물품 청구 등 다양한 사안으로 여러 형태의 사신이 조선을 방문하였다. 중국 사신의 일행은 주로 상사(上使)와 부사(副使)를 중심으로, 그 아래에 서반(序班), 두목(頭目), 군관(軍官), 의원(醫員), 사자관(寫字官), 주자(廚子)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 중 서반은 통역을 담당하였고, 두목은 물품 운반 및 관리를 맡았는데, 두목들은 대부분 북경이나 요동 지역의 상인들이었다.[1] 이들은 조선에 입국하면 조선 상인들과 활발히 교역하였으며, 이러한 비공식적인 무역 활동은 조선의 산업과 상업 발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명나라 시기에는 임진왜란 이전까지 사신의 방문이 빈번하였으나, 인조반정과 정묘호란 이후로는 그 횟수가 점차 줄어들었다. 병자호란 이후에는 명나라 대신 청나라 사신들이 조선을 방문하게 되어, 조청 관계가 새로운 외교 질서를 형성하게 되었다.

자료에 따르면 칙사가 파견된다는 통보를 받으면, 조정에서는 원접사(遠接使) 일행을 의주(義州)로 보내어 칙사의 입국을 환영하였다. 또한 의주에서 한양으로 향하는 길목의 다섯 곳에는 미리 선위사(宣慰使)를 파견하여 잔치를 베풀고 위로하는 예를 행하였다. 칙사가 벽제관에 도착하면 영접사(迎接使) 등이 나아가 맞이하였으며, 왕은 왕세자를 비롯한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모화루(慕華樓)에 거둥하여 ‘영칙의(迎勅儀)’의 절차에 따라 칙사를 영접하였다. 이후 칙사를 경복궁으로 인도하여 황제의 칙서를 전달받고 다례(茶禮)를 행한 뒤, 태평관(太平館)에 머물게 하였다. 그 자리에서 하마연(下馬宴)을 베풀어 정중히 대접하였으며, 다음 날에는 왕세자, 종친부(宗親府), 의정부 및 육조(六曹) 등 각 기관에서 차례로 연회를 마련하였다. 칙사가 귀국할 때에도 조정에서는 예에 따라 여러 차례 전연(餞宴)을 열어 후하게 전송하였다.[2]

정탁의 경험 중심으로

사건 배경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조선은 일본군의 침략으로 국가 존망의 위기에 처하였다. 조선의 요청에 따라 명나라는 군대를 파견하여 조선을 지원하기로 결정하였고, 이로써 조·명 연합군이 형성되었다. 명나라는 일본의 침략을 단순한 국지전이 아니라 동아시아 질서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인식하였으며, 전쟁의 장기화를 우려해 조선에서의 군사 지원과 함께 외교적 해결 방안을 동시에 모색하였다. 만력(萬曆) 28년(1600) 5월 8일, 명 조정은 일본과의 강화 가능성을 탐색하기 위해 칙사(勅使) 사용재(謝用梓)와 서일관(徐一貫)을 파견하였다. 두 사람은 일본의 최고 실권자 도요토미_히데요시(豊臣秀吉)와 나고야(名護屋)에서 회담을 가졌으며, 히데요시는 “내일 평화(來日和平)”라 불리는 7개 조항의 강화 조건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 조건은 일본의 일방적 입장을 반영한 것이었고, 명나라와 조선이 수용하기 어려운 내용이 많았다. 이 무렵 일본 측 외교사절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는 명의 협상 대표인 심유경(沈惟敬)과 사적으로 접촉하였다. 두 사람은 전쟁의 지속이 양국 모두에게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진짜 강화 조건이 받아들여지기 어렵다는 사실을 감추고 강화 조건을 위조하는 외교적 조작을 감행하였다. 심유경은 히데요시가 명의 모든 요구를 수용한 것처럼 보고하였고, 이에 따라 명 조정은 일본의 항복 의사가 진실하다고 오판하였다. 이러한 허위 보고를 바탕으로, 명 조정은 1596년(선조 29년) 4월, 훈위서도독첨사(勳衛署都督僉使)이자 흠차책봉일본정사(欽差冊封日本正使)로 임명된 이종성(李宗城)을 조선에 파견하였다. 그의 임무는 조선을 경유하여 일본으로 가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왜왕(倭王)”으로 책봉하고 명의 조서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진정한 의도가 항복이 아니라 조선 점령의 합법화를 꾀하는 것이었음이 드러나자, 사태는 급변하였다. 이종성은 일본으로 향하기 위해 부산의 일본군 진영에 머물던 중 자신의 신변이 위협받고 있음을 감지하고, 끝내 일본행을 포기한 채 탈출하였다. 이 사건은 명·일 간의 강화 협상이 허위와 오판 위에 세워진 외교적 실패였음을 드러낸 계기가 되었으며, 이후 임진왜란의 재발단(정유재란, 1597년)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

주요인물

이종성

이종성 사진

이종성은 명나라 개국 명장 이문충(李文忠)의 장남 이경륭(李景隆)의 후손이다. 이문충의 어머니는 명태조 주원장(朱元璋)의둘째 누나이며, 그는 뛰어난 공로로 여섯 명의 건국 공작 중 네 번째로 서열이 높다. 주원장은 심지어 자신의 조카가 전 원황실을 거의 일망타진했다고 자랑스럽게 지적했다.

50px-Quote-left.png 平章李文忠总兵应昌,逐前元太子远遁漠北,获其皇孙、妃嫔、重宝悉归朝廷,此功最大。평장 이문충의 총병 응창은 원나라 태자를 쫓아멀리 막북으로 도망쳐 그의 황손, 비빈, 중보를 모두 조정에 귀속시켰고, 이 공이 가장 컸다. 50px-Quote-right.png
출처:명태조실록 권58—《明太祖实录卷五十八》).


정탁

정탁은 이황(李滉)과 조식(曺植)의 문인(门人)이고 조선에서 대표적인 온건파(穩健派) 정치인으로, 당쟁이 격화되던 시기에도 비교적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하며 양당의 갈등을 완화하려 노력했다. 선조 때에는 사헌부 대사헌, 우의정, 좌의정 등 요직을 맡으며 국정 운영에 깊이 관여했다. 특히 임진왜란(1592) 이후의 혼란기에도 침착하고 실용적인 태도로 국가 재건과 외교 안정을 도모했다.

정탁 사진

50px-Quote-left.png 충성스럽고 예를 아는 신하 50px-Quote-right.png
출처:조선왕조실록.


풍습 활동및 장소

중국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모화관(慕華館) 앞에 세웠던 문이다. 현재 독립문이 있는 곳의 바로 앞에 있었다.

영은문 사진

모화관(慕華館)은 모화루(慕華樓)이라고도 하여, 조선 초기 중국과의 관계 속에서 사대외교(事大外交)의 상징으로 건립되었던 건물이다.

모화관 사진

흥겨운 놀이와 음악·춤 등이 어우러진 열렬한 환영 의식이 베풀어졌다.

고악 사진
잡희 사진
채붕 사진

명과 조선의 외교 관계

조선과 명나라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전통 사대 외교 질서를 구축하여, 명을 종주국으로 받들고 조선을 번국으로 인정하는 책봉-조공 관계를 유지했다. 이 관계는 명 황제가 조선 국왕을 공식적으로 승인(冊封)하고 조선이 이에 대한 예로써 정기적인 조공을 바치는 형태로 이루어졌으며, 상호 의무와 권리를 수반한 쌍방향의 외교 체계였다. 즉, 명은 세계질서의 최고 권위로서 조선에 군신관계를 요구했지만, 한편으로 독립된 국가 사이에 예물을 주고받는 상호 교류를 통해 관계가 운영되었다. 이러한 종주-번국 간 사대 체제는 당시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보편적 모델이었다.

조선 국왕이 즉위할 때마다 조선은 명에 사신을 보내 새 임금에 대한 책봉을 요청했고, 명 황제는 특사(冊封使)를 파견하여 조선 국왕의 정통성을 승인하고 공식 인장과 책봉 교서를 하달하였다. 책봉은 명이 조선 왕조의 합법성과 영토를 국제적으로 공인하는 의례로서, 왕위 계승의 안정을 도모하는 효과도 있었다. 아울러 조선은 일정 주기에 따라 조공 사절을 파견하여 토산물 등의 예물을 바쳤고, 명 조정은 이에 대한 답례로 비단과 서적 등 조선에 필요한 물자와 관직 품계 등을 후하게 내려주었다. 이러한 조공은 형식상으로는 황제에 대한 존경을 표시하는 예물이었지만, 그에 대한 풍부한 회례(回禮)를 통해 조선은 경제적 지원과 무역 이익을 얻는 측면이 있었다. 실제로 조선은 명과의 조공 무역을 통해 자국 생산에 부족한 필수 물자를 공급받았으며, 유사시에 명의 외교적·군사적 원조를 기대할 수 있어 안보 측면의 이익도 확보했다. 반대로 명 입장에서는 조공-책봉 체제가 황제의 권위를 대외적으로 과시하고 주변 질서를 안정시키는 수단이 되었다.

양국은 빈번한 사신 왕래를 통해 이러한 외교 관계를 운영하였다. 조선에서 명으로 가는 사신단(조천사)은 육로로 요동을 거쳐 북경에 이르렀는데, 명 예부는 이들을 영빈관인 회동관에서 맞이하여 환영 연회인 ‘하마연(下馬宴)’을 베풀고 조공 품목을 점검하였다. 또한 사신들에게 여정에 필요한 여비를 지급하고 무역을 허용하였으며, 홍려시를 통해 황제를 알현할 예법을 미리 교육한 뒤 황제 접견이 끝나면 하사품을 내려 돌려보냈다. 한편 명에서 조선으로 오는 사신은 압록강 근처에서부터 예우를 받으며 입국하였다. 조선은 미리 영접 사신을 국경에 보내 오는 사절을 맞이하고, 사신 일행이 도성으로 향하는 길목의 의주·평양 등 주요 거점마다 관민이 참여하는 환영 의식을 거행하였다. 사절이 한양 교외에 이르면 국왕이 직접 교외까지 나가 영접하면서 황제의 조서나 교지를 받드는 엄숙한 의식을 치르고, 이후 사신을 수도의 영빈관(태평관 등)에 모셔 예우하였다. 머무르는 동안 명 사신은 국왕의 접견을 받고 의정부 및 육조에서 마련한 연회에 참석하였으며, 일정이 끝난 뒤 국왕이 주재하는 전별연(餞別宴, ‘상마연(上馬宴)’)을 끝으로 환송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 국왕은 명 사신에게 예물을 하사하고 명 사신도 답례품을 전달하며 우의를 다졌다. 사신 접대 의례에서는 술과 차를 올리는 다례(茶禮)·주례(酒禮)를 시작으로 여러 차례의 축배와 음식 진설이 예서에 따라 진행되었고, 연회 중간마다 음악과 무용 등 전통 연희 공연이 펼쳐져 손님을 환대하였다. 이러한 의전 절차는 일찍이 고려 시대 송 사신 접대 때 확립된 빈례(賓禮) 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조선은 예악(禮樂)에 기반한 성대한 의식으로 중국 사신을 응대하였다.

조선의 대명 외교 인식은 기본적으로 사대의 예를 충실히 따르는 것이었다. 조선 왕실과 사대부는 명을 문명의 중심국이자 형제의 나라로 여겨 진심으로 존중했고, 이를 대명숭배 의식으로 표현하였다. 조선 사신들은 명나라를 “중화 문명의 전통이 살아 있는 우호적인 형제의 나라”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 속에는 명에 대한 깊은 충성심과 문화적 동경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러한 대명의식, 곧 사대주의 의식과 ‘소중화’ 의식은 조선 외교 태도의 한 축이었다. 17세기 명이 멸망하고 청 왕조가 들어서자 조선 조정은 충격을 받았고, 소중화 의식을 더욱 강화하여 자신들이 정통 중화 문명의 계승자라는 자부심을 내세웠다. 명에 대한 그리움과 상실감은 조선 사신들의 기록에서 절절히 드러나며, 새로이 중원에 들어선 청에 대해서는 “승냥이·개나 표범에 비유”하는 등 오랑캐로 깎아내리는 적대감마저 표출되었다. 한편 조선이 이러한 사대 외교 기조를 견지한 데에는 현실적인 이익 추구의 고려도 있었다. 명과의 관계를 돈독히 함으로써 얻는 통상 이익과 국제적 안전보장, 그리고 책봉을 통한 왕권 강화를 조선 조정은 적극 활용하고자 했다. 실제로 조선 조정은 친명 사대 정책을 통해 자국의 존립과 국익을 도모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판단했으며, 명 황제의 권위를 빌려 신생 왕조의 정통성을 공고히 다지는 성과를 거두었다. 아울러 외교적으로는 명을 떠받들었지만 내정에 있어서는 철저히 자주성을 견지하여, 명이 조선의 국내 정치에 직접 간섭하지 않는 한도에서 외교적 예속과 국내 자치를 양립시켰다. 이처럼 조선은 대외적으로는 명에 대한 예를 다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주권 국가로서의 자율성과 체면을 지켰고, 사대를 하나의 외교 전략으로 인식하였다.

200여 년에 걸친 조선-명의 사대 외교 관계는 양국 모두에 여러 문화·정치적 영향을 미쳤다. 조선은 명과의 빈번한 사신 교류를 통해 중국의 선진 문물과 제도를 적극 수용하였고, 유교 이념을 통치 이념의 근간으로 삼는 소중화적 국가 정체성을 강화하였다. 예컨대 조선은 명의 법전과 의례서를 참고하여 자국의 법과 예제를 정비하고 과거 제도 등 정치 시스템을 마련하였는데, 그 결과 “조선의 문물典章이 중국과 다르지 않고 다른 나라들보다도 훨씬 뛰어나다”는 평을 명 사신들로부터 받을 정도로 제도적 수준을 높였다. 실제로 명에서 파견된 사신들이 바라본 조선 사회는 유교 문화의 철저한 구현이었다. 군주에서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예의를 알고 예를 행하며, 국왕과 신하들은 학문을 숭상하고 예법을 엄격히 준수하는 모습이 뚜렷했는데, 명 사신들은 이를 두고 조선 국왕은 “동방의 예의를 지키는 군주”요 조선인들은 “끊임없이 학문에 힘쓰고 예를 숭상하는 국민”이라고 묘사하였다. 이러한 기록은 중화문화의 영향 아래 조선 사회가 예의와 학문을 중시하는 풍조를 이루었음을 보여주며, 조선이 명과의 관계를 통해 문화적으로 교화되고 또 스스로를 문명국으로 정체화했음을 시사한다. 한편 정치적으로도 책봉-조공 관계는 조선에 안정적인 대외 환경을 제공하였다. 명나라는 조선을 자국의 책봉국으로 인정한 이상 그 독립을 존중하고 외적의 침입 시 군사 지원을 약속하였기 때문에, 조선은 대외적으로 비교적 안전판을 확보한 상태에서 내치와 발전에 집중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명의 파병은 이러한 조선-명 협력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며, 이를 통해 조선은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왕조를 지켜낼 수 있었다. 전반적으로 조선은 사대 관계를 통하여 국제 질서 속에서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고, 명의 문화적 권위를 빌려 국내 통치 이념을 정당화·강화하는 효과를 얻었다. 오랜 기간 지속된 중조(中朝) 외교 관계에서 확립된 여러 의례 문화와 외교 관행은 후대까지 계승되어 동아시아의 외교 문화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조선은 대명 외교를 통해 얻은 경험과 전통을 바탕으로 이후 청 대에도 유사한 외교를 전개하였으며, 이러한 사대 외교의 유산은 근대 이전 동아시아 국제관계의 중요한 특징으로 남게 되었다.

온톨로지


참고문헌

  • 김종수. (2014). 조선시대 使臣宴 의례의 변천 — 중국 사신에게 베푼 연향을 중심으로 —. 온지논총, 38, 69-120.
  • 김철 and 황효영. (2015). 명·청시기 조선 사신들의 대중국 인식 변화 양상에 대한 연구-‘연행록’ 중의 산해관시(詩)을 중심으로. 아시아문화연구, 39, 29-68.
  • 민태혜. (2015). 고려시대 중국사신영접의례와 전통연희. 남도민속연구, 31, 41-76.
  • 刘喜涛,封贡关系视角下明代中朝使臣往来研究,山东师范大学博士学位论文,2011.
  • 白礼如,明代中国使臣笔下的朝鲜形象,延边大学硕士学位论文,2022.
  • https://contents.history.go.kr/front/ta/view.do?levelId=ta_p82r_0010_0020_0070_0520.
  • 출처:https://contents.history.go.kr/front/km/view.do?levelId=km_010_0040_0040_0010
  • 출 처:https://story.ugyo.net/front/sub01/sub0103.do?chkId=S_LSM_C011#sel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