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실록"의 두 판 사이의 차이

dh_edu
이동: 둘러보기, 검색
5번째 줄: 5번째 줄:
 
『선조실록』은 1567년(선조 즉위) 7월부터 1608년(선조 41) 1월까지 선조 재위 40년 7개월간의 국정 전반에 관한 역사적 기록에 해당한다. 221권 116책으로 된 인본(印本)으로써 1609년(광해군 1) 7월부터 편찬하기 시작하여 1617년(광해군 9)에 편찬이 완료되었다. 처음에는 이항복(李恒福)을 총재관(摠裁官)하여 편찬하였고, 계축옥사 전후로 이이첨(李爾瞻), 기자헌(奇自獻)이 편찬을 주관하였다. 다만 이 과정에서 사론에 왜곡이 많아 이후에 실록이 수정되었다.  
 
『선조실록』은 1567년(선조 즉위) 7월부터 1608년(선조 41) 1월까지 선조 재위 40년 7개월간의 국정 전반에 관한 역사적 기록에 해당한다. 221권 116책으로 된 인본(印本)으로써 1609년(광해군 1) 7월부터 편찬하기 시작하여 1617년(광해군 9)에 편찬이 완료되었다. 처음에는 이항복(李恒福)을 총재관(摠裁官)하여 편찬하였고, 계축옥사 전후로 이이첨(李爾瞻), 기자헌(奇自獻)이 편찬을 주관하였다. 다만 이 과정에서 사론에 왜곡이 많아 이후에 실록이 수정되었다.  
 
===편찬 경위===
 
===편찬 경위===
 +
1609년(광해군 1) 7월부터 편찬하기 시작하여 1617년(광해군 9)에 편찬을 마쳤다. 이렇게 편찬이 늦어진 데는 우선, 사초를 비롯한 사책(史冊)주2이 임진왜란 과정에서 전부 없어져서 사료를 수집해야 했기 때문이다. 역대 홍문관에 간직해 둔 서적(書籍), 춘추관의 각조실록(各朝實錄), 다른 창고에 보관된 전조(前朝)주3의 사초(史草), 즉, 『고려사(高麗史)』를 수찬할 때의 초고(草稿)주4가 불에 탔다. 또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가 모두 남김없이 불탔고, 내외 창고와 각 관서에 보관된 것도 모두 도둑을 맞아 먼저 불탔다. 1595(선조 28) 2월 15일, 경연관(經筵官) 정경세(鄭經世)의 건의로 춘추관에서 임진왜란 이전의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기억을 기록해 제출하게 하였다. 또한 임진왜란 이전의 조보(朝報) · 정목(政目)주5과 개인의 일기 및 야사(野史) 등을 춘추관에 납입하게 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제대로 실행되지 못했던 것 같다. 1609년에도 조정에서는 유희춘(柳希春)의 『미암일기(眉巖日記)』, 유조인(柳祖訒)의 『행조일기(行朝日記)』 등 가장일록(家藏日錄)을 찾았다. 배삼익(裵三益) 및 이기(李芑) · 이수준(李壽俊) 등의 집에 보관하고 있는 조보의 단간(斷簡)주6과 사대부 집에 전하는 문집(文集) 중에 들어 있는 소(疏)주7 · 차(箚)주8 · 비명(碑銘)주9 등도 수집하였다.<br/>
 +
<br/>
 +
둘째, 정국의 불안정과 무옥(誣獄)주10으로 편찬 주체가 계속 교체되었기 때문이다. 당초 광해군 원년 10월 일실된 사료를 모아 실록 편찬을 시작할 당시 총재관(總裁官)은 이항복(李恒福)이었다. 이정귀(李廷龜)가 1611년(광해군 3) 11월에 대제학이 됐고 이정귀의 건의로 신흠(申欽)이 합류했으니 실록 편찬의 진용은 이항복-이정귀-신흠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이항복은 광해군 5년 김제남의 옥사와 연루돼 인재 천거를 잘못했다는 이유로 한직(閒職)인 중추부로 옮겼다. 또한 광해군 9년(1617) 인목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하는 데 반대하다가 함경도 북청에 유배됐었으며 광해군 10년에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정귀와 신흠 역시 영창대군을 옹립하려고 했다는 박응서 등의 역모 사건과 이어진 김제남 옥사에 연루돼 파직되었다.<br/>
 +
<br/>
 +
후 이이첨(李爾瞻), 기자헌(奇自獻)이 편찬 책임을 맡았다. 편찬에 참여한 실록청의 인원 구성을 보면,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 총재관(摠裁官)) 기자헌,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총재관(摠裁官)) 이항복,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도청당상(都廳堂上))에 이호민(李好閔) · 유근(柳根) · 이이첨 · 이정구(李廷龜)주12 · 박홍구(朴弘耉) · 조정(趙挺) · 민몽룡(閔夢龍) · 정창연(鄭昌衍) · 이상의(李尙毅) · 윤방(尹昉) · 윤승길(尹承吉) · 김신원(金信元) · 박승종(朴承宗) · 이시언(李時彦) · 김상용(金尙容) · 오억령(吳億齡) · 송순(宋諄) 등 17인이 있었다. 이밖에도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각방당상(各房堂上))에 박건(朴健) · 최유원(崔有源) · 정광적(鄭光績) · 신식(申湜) · 이수광(李睟光) · 박이장(朴而章) · 박진원(朴震元) · 정사호(鄭賜湖) · 구의강(具義剛) · 이성(李惺) · 김시헌(金時獻) · 김상준(金尙寯) · 김권(金權) · 최관(崔瓘) · 이경함(李慶涵) · 남근(南瑾) · 이시발(李時發) · 한덕원(韓德遠) · 이필영(李必榮) · 유공량(柳公亮) · 이정신(李廷臣) · 강홍립(姜弘立) · 강첨(姜籤) · 유인길(柳寅吉) 등 24인과 편수관(編修官)에 윤효전(尹孝全) 등 48인, 기주관(記注官)에 김유(金紐) 등 52인, 기사관(記事官)에 송일(宋馹) 등 81인이 있었다.
 
===내용===
 
===내용===
 
===역사적 의의===
 
===역사적 의의===
  
# 기본정보
 
# 편찬정보
 
## 편찬이 늦어지게 된 이유
 
## 편찬 참여자
 
# 역사적 의의
 
  
  

2025년 12월 2일 (화) 11:57 판

목차

선조실록

조선 전기 제14대 왕 선조의 재위 기간 동안의 국정 전반에 관한 역사를 다룬 실록

서지사항

『선조실록』은 1567년(선조 즉위) 7월부터 1608년(선조 41) 1월까지 선조 재위 40년 7개월간의 국정 전반에 관한 역사적 기록에 해당한다. 221권 116책으로 된 인본(印本)으로써 1609년(광해군 1) 7월부터 편찬하기 시작하여 1617년(광해군 9)에 편찬이 완료되었다. 처음에는 이항복(李恒福)을 총재관(摠裁官)하여 편찬하였고, 계축옥사 전후로 이이첨(李爾瞻), 기자헌(奇自獻)이 편찬을 주관하였다. 다만 이 과정에서 사론에 왜곡이 많아 이후에 실록이 수정되었다.

편찬 경위

1609년(광해군 1) 7월부터 편찬하기 시작하여 1617년(광해군 9)에 편찬을 마쳤다. 이렇게 편찬이 늦어진 데는 우선, 사초를 비롯한 사책(史冊)주2이 임진왜란 과정에서 전부 없어져서 사료를 수집해야 했기 때문이다. 역대 홍문관에 간직해 둔 서적(書籍), 춘추관의 각조실록(各朝實錄), 다른 창고에 보관된 전조(前朝)주3의 사초(史草), 즉, 『고려사(高麗史)』를 수찬할 때의 초고(草稿)주4가 불에 탔다. 또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가 모두 남김없이 불탔고, 내외 창고와 각 관서에 보관된 것도 모두 도둑을 맞아 먼저 불탔다. 1595(선조 28) 2월 15일, 경연관(經筵官) 정경세(鄭經世)의 건의로 춘추관에서 임진왜란 이전의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기억을 기록해 제출하게 하였다. 또한 임진왜란 이전의 조보(朝報) · 정목(政目)주5과 개인의 일기 및 야사(野史) 등을 춘추관에 납입하게 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러나 제대로 실행되지 못했던 것 같다. 1609년에도 조정에서는 유희춘(柳希春)의 『미암일기(眉巖日記)』, 유조인(柳祖訒)의 『행조일기(行朝日記)』 등 가장일록(家藏日錄)을 찾았다. 배삼익(裵三益) 및 이기(李芑) · 이수준(李壽俊) 등의 집에 보관하고 있는 조보의 단간(斷簡)주6과 사대부 집에 전하는 문집(文集) 중에 들어 있는 소(疏)주7 · 차(箚)주8 · 비명(碑銘)주9 등도 수집하였다.

둘째, 정국의 불안정과 무옥(誣獄)주10으로 편찬 주체가 계속 교체되었기 때문이다. 당초 광해군 원년 10월 일실된 사료를 모아 실록 편찬을 시작할 당시 총재관(總裁官)은 이항복(李恒福)이었다. 이정귀(李廷龜)가 1611년(광해군 3) 11월에 대제학이 됐고 이정귀의 건의로 신흠(申欽)이 합류했으니 실록 편찬의 진용은 이항복-이정귀-신흠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이항복은 광해군 5년 김제남의 옥사와 연루돼 인재 천거를 잘못했다는 이유로 한직(閒職)인 중추부로 옮겼다. 또한 광해군 9년(1617) 인목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하는 데 반대하다가 함경도 북청에 유배됐었으며 광해군 10년에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정귀와 신흠 역시 영창대군을 옹립하려고 했다는 박응서 등의 역모 사건과 이어진 김제남 옥사에 연루돼 파직되었다.

후 이이첨(李爾瞻), 기자헌(奇自獻)이 편찬 책임을 맡았다. 편찬에 참여한 실록청의 인원 구성을 보면,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 총재관(摠裁官)) 기자헌,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총재관(摠裁官)) 이항복,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도청당상(都廳堂上))에 이호민(李好閔) · 유근(柳根) · 이이첨 · 이정구(李廷龜)주12 · 박홍구(朴弘耉) · 조정(趙挺) · 민몽룡(閔夢龍) · 정창연(鄭昌衍) · 이상의(李尙毅) · 윤방(尹昉) · 윤승길(尹承吉) · 김신원(金信元) · 박승종(朴承宗) · 이시언(李時彦) · 김상용(金尙容) · 오억령(吳億齡) · 송순(宋諄) 등 17인이 있었다. 이밖에도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각방당상(各房堂上))에 박건(朴健) · 최유원(崔有源) · 정광적(鄭光績) · 신식(申湜) · 이수광(李睟光) · 박이장(朴而章) · 박진원(朴震元) · 정사호(鄭賜湖) · 구의강(具義剛) · 이성(李惺) · 김시헌(金時獻) · 김상준(金尙寯) · 김권(金權) · 최관(崔瓘) · 이경함(李慶涵) · 남근(南瑾) · 이시발(李時發) · 한덕원(韓德遠) · 이필영(李必榮) · 유공량(柳公亮) · 이정신(李廷臣) · 강홍립(姜弘立) · 강첨(姜籤) · 유인길(柳寅吉) 등 24인과 편수관(編修官)에 윤효전(尹孝全) 등 48인, 기주관(記注官)에 김유(金紐) 등 52인, 기사관(記事官)에 송일(宋馹) 등 81인이 있었다.

내용

역사적 의의


2. 편찬정보

(1) 편찬이 늦어지게 된 이유

① 사초를 비롯한 사책(史冊)이 임진왜란 과정에서 전부 없어져 사료를 새롭게 수집해야 할 필요성
역대 홍문관에 간직해 둔 서적(書籍), 춘추관의 각조실록(各朝實錄), 다른 창고에 보관된 전조(前朝)의 사초(史草)가 불에 타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또한,『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가 모두 남김없이 불에 타는 상황이 발생하였고, 내외 창고와 각 관서에 보관된 것들 역시 모두 도둑을 맞아 불에 타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1595(선조 28) 2월 15일 경연관(經筵官) 정경세(鄭經世)의 건의로 춘추관에서 임진왜란 이전의 사관(史官)으로 하여금 기억을 기록해 제출하게 하였다. 또한, 임진왜란 이전의 조보(朝報).정목(政目)과 개인의 일기 및 야사(野史) 등을 춘추관에 납입하게 할 것을 결정하였으나 제대로 실행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1609년에도 조정에서는 유희춘(柳希春)의 『미암일기(眉巖日記)』, 유조인(柳祖訒)의 『행조일기(行朝日記)』 등 가장일록(家藏日錄)을 찾았다. 배삼익(裵三益) 및 이기(李芑) 이수준(李壽俊) 등의 집에 보관하고 있는 조보의 단간(斷簡)과 사대부 집에 전하는 문집(文集) 중에 들어 있는 소(疏).차(箚).비명(碑銘) 등도 수집하였다.

② 정국의 불안정과 무옥으로 인한 편찬주체의 지속적 교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