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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년대''' || 모더니즘 시 || 모더니즘 소설, 농촌 소설 | | '''1930년대''' || 모더니즘 시 || 모더니즘 소설, 농촌 소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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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정갈래'''''<p>김억<ref>시인 김소월의 스승으로 알려져있다. </ref> 을 중심으로 상징주의 | + | '''''서정갈래'''''<p>김억<ref>시인 김소월의 스승으로 알려져있다. </ref> 을 중심으로 <ins>상징주의 시</ins>가 등장하였다. 상징주의는 19세기 후반 프랑스의 사실주의, 자연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등장한 문예사조이다. 낭만주의와 같이 현실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문학적으로 표현하려 했고, 이를 위해 상징적 표현을 사용하였다. 한국에서는 1918년에 김억이 최초의 문예 주간지인 태서문예신보에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와 시론을 번역하여 소개하였다. 김억은 내적 리듬, 즉 내재율만을 가진 자유시는 자칫 산문과 구별되기 어려울 수 있다며 엄격한 외재율, 그 중에서도 중국 한시에 나타나는 압운<ref> 여러 행을 걸쳐 발현되는 규칙이다. 비슷한 개념으로 rhyme을 떠올릴 수 있다. </ref>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김억의 이러한 주장은 크게 주목받지 못하였다. <p> |
'''''서사갈래''''' <p> | '''''서사갈래''''' <p> | ||
| − | '''신소설 ''': 고전소설에서 근대소설로 넘어가는 분기점에 위치한 과도기적 | + | '''신소설 ''': 고전소설에서 근대소설로 넘어가는 분기점에 위치한 <ins>과도기적 소설</ins>이다. 1906년 대한매일신보의 광고에서 처음 사용된 단어로, 개화기 소설이라고도 부른다.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신뢰하고 이를 통해 더 나은 사회를 만들려 했던 계몽주의의 사상이 담겨있다. |
주로 우연에 의해 사건이 전개되는 등 서사적 측면에서는 고전소설의 특징을, 구조와 형식 측면에서는 외국 소설의 영향을 받았다. 근대적 인쇄, 출판, 유통 방식과 결합하여 문학의 본격적인 대중 유통이 시작되었다. <p> | 주로 우연에 의해 사건이 전개되는 등 서사적 측면에서는 고전소설의 특징을, 구조와 형식 측면에서는 외국 소설의 영향을 받았다. 근대적 인쇄, 출판, 유통 방식과 결합하여 문학의 본격적인 대중 유통이 시작되었다. <p> | ||
| − | '''이광수의 <무정> ''' : 이전의 신소설과는 구분되는 ‘최초의 | + | '''이광수의 <무정> ''' : 이전의 신소설과는 구분되는 <ins>‘최초의 근대소설’</ins>로 분류할 수 있는 작품이다. 연재 당시, 엄청난 인기와 동시에 사회적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문학사적으로 따지면 이전까지처럼 서로 얼굴도 모르는 두 사람의 정략결혼이라는 전근대적 혼인 방식이 아닌 '연애에 기초한 혼인'을 최초로 서사화하고 이를 근대적 삶의 실천이자 심지어 민족 계몽으로까지 그 범위를 확장했다는 점에서 아주 큰 의의가 있는 작품이다. 또 '연애'라는 단어가 이 당시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지금과 같은 의미가 아닌 'LOVE', 사랑의 의미였다는 것을 고려해보면 개인과 개인이 감정의 주체로서 교제 인물을 선택하고 이로써 자아를 자각하는 의미로서도 의의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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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920년대 한국문학은 3.1운동으로 대표되는 민족저항의식과 그로 인한 일본의 문화통치에 큰 영향을 받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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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3.1운동의 실패로 인해 드리운 암울한 정서의 영향을 받아 감상적이면서 퇴폐적인 <ins>낭만주의 문학</ins>이 등장하였다. <p> 한편, 낭만주의 문학에 대척점에 서있는 문예사조로 암울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자 한 <ins>사실주의 문학</ins> 역시 등장하였다.사실주의 문학 계열 중 하나로 사회주의 사상이 본격적으로 문학계에 유입되며 '''''신경향파'''''가 대두하였다. 신경향파 문학은 낭만적 감상주의를 극복하고 한반도의 암울한 현실을 예술적 인식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주인공의 개인적인 복수, 본능적인 반항,살인,방화, 자살 등으로 작품을 마무리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 영향을 받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이란 뜻의 '''''카프'''''<ref> 1925년에 결성되어 1935년에 해체되었다. </ref>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p> 이러한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대항하여 민족주의 진영에서는 '''''국민문학파'''''<ref> 최남선, 이광수, 염상섭 등 중견작가들의 주도로 등장하였다. </ref>라는 사조가 등장하였다. 이들은 일제의 문화적인 예속을 거부하는 민족주의 운동을 문학적으로 반영하였으며, 그 맥락에서 시조부흥운동, 역사소설 창작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일제로부터의 해방·광복이라는 동일한 궁극적인 목표는 카프와 동일하였지만 실천 방법에 있어서 서로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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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920년을 지배한 낭만주의 사조에 반발하여 지성과 논리를 강조하는 '''''모더니즘 문학'''''이 등장하였다. 모더니즘의 등장에는 당시 조선 식민지 사회의 시대적 배경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세계 대공황으로 경제 위기에 처한 일본이 식민지 조선에 대한 수탈을 강화하는 한편 대륙 침략을 단행함으로써 위기를 탈출하려고 하였고, 이 과정에서 당시 식민지 조선은 군사 기지의 목적으로 중화학 공업이 발달하게 되고 급속한 도시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이러한 도시화 속에서의 극단적 개인주의와 인간성 상실에 대한 문제인식을 기반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모더니즘 문학인 것이다. 영미 모더니즘에 영향을 받아 우리 나라에 모더니즘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1924년 무렵이다. 고한용(高漢容)이 <다다이슴>(開闢, 51호)·<서울 왓든 다다이스트의 이약이>(개벽, 52호)·<다다? 다다!>(동아일보, 1924.11.24.)·<잘못 안 다다이슴>(동아일보, 1924.12.1.) 등의 글을 발표하였다. 양주동(梁柱東)은 <정오 이·삼 正誤二三>(朝鮮文壇, 12호)에서 이미지즘의 개념과 문학적 성격을 소개하고 있다. | ||
| − | + | ===<font color="green">'''1940년대'''</font>===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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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갈래''''' <p> | '''''서정갈래''''' <p> | ||
| + | 조지훈,박목월, 박두진 세 명의 시인이 결성한 '''''청록파'''''가 등장하였다. 이들은 서정성을 극대화한 자연친화적인 시풍을 보여줬다. 이 세 사람의 시인은 이후의 활동과 함께 광복 이전과 이후의 한국시를 이어주는 징검다리로서의 구실을 했고 시의 순수성을 굳건히 지키며 시의 바른 길을 밝혀 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이 청록파 시인들의 공통적인 특징인 자연의 세계는 전기의 전원시를 한층 발전시킨 참신한 감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김수영, 박인환 등의 시인들은 이들의 시를 현실도피적이라며 비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시는 시대 현실에 대해 도피적인 시세계라기보다 추악한 도시 현실을 외면한다는 뜻에서 자연 복귀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동양 시인의 체질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세계가 그들의 시적 근거로 형상화하였으며 광복 후 시단의 전통의 집대성에 큰 영향을 끼쳤으므로 광복부터 6·25 전쟁까지의 한 시기를 대표하게 되었다.<p> 한편, 일본제국이 확장되도 민족말살통치가 극심해지며 윤동주, 이육사, 한용운 등을 중심으로 '''''저항시'''''가 등장하였다. 검열을 피해 일본어로 쓰이기도 하였다. 당대의 시인들은 강한 검열 속에서도 민족 의식과 조국 사랑을 담은 저항시를 지속적으로 발표하였다. 그러한 당대 저항시는 자유와 희망에 대한 강렬한 염원을 반영하며, 사회적 억압을 문학적으로 승화하고 민족적 자긍심과 독립 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 ||
| − | '''''서사갈래''''' | + | <p> |
| + | |||
| + | '''''서사갈래''''' <p> | ||
| + | 1940년대 서사갈래는 일본의 민족말살통치의 영향으로 인해 시련을 맞이하였다. | ||
| + | 이 시기를 전후로 문단에 발에 들인 작가로는 황순원, 최명익, 정인태, 현덕, 김이석, 안수길, 김영수, 정비석, 김사량, 최인욱, 곽하신, 최태웅, 임옥인, 지하련 등 이있다. | ||
| + | 시에서 출발하여 시적 언어와 산문성을 결함시킨 '''''황순원'''''은 초기 단편에서 소년과 소녀를 등장시켜 그들이 겪어야 하는 통과 제의(通過祭儀) 의 아픔을 그리고 있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기러기' , '세레나데' , '별' , '닭제' , '소나기' , '늪' 등이 있는데, 이는 유년기의 소년, 소녀들이 성인으로 가는 시련과 아픔의 과정을 통하여 역사를 헤쳐 나간다는 것의 어려움, 그런 역사에 대해서 비관하거나 절망하지 않는 면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 ||
| + | 이와 반대로 최명익은 마르크스주의적인 세계관을 토대로 모더니즘적 작품 경향을 보여 주는데, 자의식적인 성인을 주인공으로 하여 현실의 상황을 절망적이고 암담한 분위기로 조성하고 있다. 그의 대표작에는 '역설' , '장삼 이사' , '무성격자' , '비 오는 길' , '봄과 신작로' 등이 있다. | ||
| + | ==참고문헌== | ||
| + | 한국민족대백과사전 <국민문학>, <카프>, <시조부흥운동> | ||
| − | <references/> | + | 주석 <references/> |
| + | [[분류: 시대별로 살펴보는 한국 문학 작품의 흐름과 변화]] | ||
| + | [[분류:김치찌개]] | ||
2025년 6월 24일 (화) 00:32 기준 최신판
역사적 관점 : 19세기 후반 개항, 갑신정변, 갑오개혁 전후 ~ 1945년 광복까지
문학사적 관점 : 1900년대 초반[1] ~ 1945년 광복까지
근대문학의 흐름
| 시기 | 서정갈래 | 서사갈래 |
|---|---|---|
| 1910년대 | 상징주의 시, 현대적 자유시 | 신소설 |
| 1920년대 | 낭만주의 시 | 낭만주의 소설, 현실주의 소설 |
| 1930년대 | 모더니즘 시 | 모더니즘 소설, 농촌 소설 |
| 1940년대 | 청록파, 저항시 | 암흑기 |
1910년대
서정갈래
김억[2] 을 중심으로 상징주의 시가 등장하였다. 상징주의는 19세기 후반 프랑스의 사실주의, 자연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등장한 문예사조이다. 낭만주의와 같이 현실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문학적으로 표현하려 했고, 이를 위해 상징적 표현을 사용하였다. 한국에서는 1918년에 김억이 최초의 문예 주간지인 태서문예신보에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와 시론을 번역하여 소개하였다. 김억은 내적 리듬, 즉 내재율만을 가진 자유시는 자칫 산문과 구별되기 어려울 수 있다며 엄격한 외재율, 그 중에서도 중국 한시에 나타나는 압운[3]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김억의 이러한 주장은 크게 주목받지 못하였다.
서사갈래
신소설 : 고전소설에서 근대소설로 넘어가는 분기점에 위치한 과도기적 소설이다. 1906년 대한매일신보의 광고에서 처음 사용된 단어로, 개화기 소설이라고도 부른다.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신뢰하고 이를 통해 더 나은 사회를 만들려 했던 계몽주의의 사상이 담겨있다. 주로 우연에 의해 사건이 전개되는 등 서사적 측면에서는 고전소설의 특징을, 구조와 형식 측면에서는 외국 소설의 영향을 받았다. 근대적 인쇄, 출판, 유통 방식과 결합하여 문학의 본격적인 대중 유통이 시작되었다.
이광수의 <무정> : 이전의 신소설과는 구분되는 ‘최초의 근대소설’로 분류할 수 있는 작품이다. 연재 당시, 엄청난 인기와 동시에 사회적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문학사적으로 따지면 이전까지처럼 서로 얼굴도 모르는 두 사람의 정략결혼이라는 전근대적 혼인 방식이 아닌 '연애에 기초한 혼인'을 최초로 서사화하고 이를 근대적 삶의 실천이자 심지어 민족 계몽으로까지 그 범위를 확장했다는 점에서 아주 큰 의의가 있는 작품이다. 또 '연애'라는 단어가 이 당시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지금과 같은 의미가 아닌 'LOVE', 사랑의 의미였다는 것을 고려해보면 개인과 개인이 감정의 주체로서 교제 인물을 선택하고 이로써 자아를 자각하는 의미로서도 의의가 있다.
1920년대
1920년대 한국문학은 3.1운동으로 대표되는 민족저항의식과 그로 인한 일본의 문화통치에 큰 영향을 받았다.
3.1운동의 실패로 인해 드리운 암울한 정서의 영향을 받아 감상적이면서 퇴폐적인 낭만주의 문학이 등장하였다.
한편, 낭만주의 문학에 대척점에 서있는 문예사조로 암울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자 한 사실주의 문학 역시 등장하였다.사실주의 문학 계열 중 하나로 사회주의 사상이 본격적으로 문학계에 유입되며 신경향파가 대두하였다. 신경향파 문학은 낭만적 감상주의를 극복하고 한반도의 암울한 현실을 예술적 인식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주인공의 개인적인 복수, 본능적인 반항,살인,방화, 자살 등으로 작품을 마무리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 영향을 받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이란 뜻의 카프[4]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대항하여 민족주의 진영에서는 국민문학파[5]라는 사조가 등장하였다. 이들은 일제의 문화적인 예속을 거부하는 민족주의 운동을 문학적으로 반영하였으며, 그 맥락에서 시조부흥운동, 역사소설 창작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일제로부터의 해방·광복이라는 동일한 궁극적인 목표는 카프와 동일하였지만 실천 방법에 있어서 서로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다.
1930년대
1920년을 지배한 낭만주의 사조에 반발하여 지성과 논리를 강조하는 모더니즘 문학이 등장하였다. 모더니즘의 등장에는 당시 조선 식민지 사회의 시대적 배경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세계 대공황으로 경제 위기에 처한 일본이 식민지 조선에 대한 수탈을 강화하는 한편 대륙 침략을 단행함으로써 위기를 탈출하려고 하였고, 이 과정에서 당시 식민지 조선은 군사 기지의 목적으로 중화학 공업이 발달하게 되고 급속한 도시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이러한 도시화 속에서의 극단적 개인주의와 인간성 상실에 대한 문제인식을 기반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모더니즘 문학인 것이다. 영미 모더니즘에 영향을 받아 우리 나라에 모더니즘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1924년 무렵이다. 고한용(高漢容)이 <다다이슴>(開闢, 51호)·<서울 왓든 다다이스트의 이약이>(개벽, 52호)·<다다? 다다!>(동아일보, 1924.11.24.)·<잘못 안 다다이슴>(동아일보, 1924.12.1.) 등의 글을 발표하였다. 양주동(梁柱東)은 <정오 이·삼 正誤二三>(朝鮮文壇, 12호)에서 이미지즘의 개념과 문학적 성격을 소개하고 있다.
1940년대
서정갈래
조지훈,박목월, 박두진 세 명의 시인이 결성한 청록파가 등장하였다. 이들은 서정성을 극대화한 자연친화적인 시풍을 보여줬다. 이 세 사람의 시인은 이후의 활동과 함께 광복 이전과 이후의 한국시를 이어주는 징검다리로서의 구실을 했고 시의 순수성을 굳건히 지키며 시의 바른 길을 밝혀 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이 청록파 시인들의 공통적인 특징인 자연의 세계는 전기의 전원시를 한층 발전시킨 참신한 감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김수영, 박인환 등의 시인들은 이들의 시를 현실도피적이라며 비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시는 시대 현실에 대해 도피적인 시세계라기보다 추악한 도시 현실을 외면한다는 뜻에서 자연 복귀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동양 시인의 체질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세계가 그들의 시적 근거로 형상화하였으며 광복 후 시단의 전통의 집대성에 큰 영향을 끼쳤으므로 광복부터 6·25 전쟁까지의 한 시기를 대표하게 되었다.
한편, 일본제국이 확장되도 민족말살통치가 극심해지며 윤동주, 이육사, 한용운 등을 중심으로 저항시가 등장하였다. 검열을 피해 일본어로 쓰이기도 하였다. 당대의 시인들은 강한 검열 속에서도 민족 의식과 조국 사랑을 담은 저항시를 지속적으로 발표하였다. 그러한 당대 저항시는 자유와 희망에 대한 강렬한 염원을 반영하며, 사회적 억압을 문학적으로 승화하고 민족적 자긍심과 독립 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서사갈래
1940년대 서사갈래는 일본의 민족말살통치의 영향으로 인해 시련을 맞이하였다. 이 시기를 전후로 문단에 발에 들인 작가로는 황순원, 최명익, 정인태, 현덕, 김이석, 안수길, 김영수, 정비석, 김사량, 최인욱, 곽하신, 최태웅, 임옥인, 지하련 등 이있다. 시에서 출발하여 시적 언어와 산문성을 결함시킨 황순원은 초기 단편에서 소년과 소녀를 등장시켜 그들이 겪어야 하는 통과 제의(通過祭儀) 의 아픔을 그리고 있다.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는 '기러기' , '세레나데' , '별' , '닭제' , '소나기' , '늪' 등이 있는데, 이는 유년기의 소년, 소녀들이 성인으로 가는 시련과 아픔의 과정을 통하여 역사를 헤쳐 나간다는 것의 어려움, 그런 역사에 대해서 비관하거나 절망하지 않는 면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이와 반대로 최명익은 마르크스주의적인 세계관을 토대로 모더니즘적 작품 경향을 보여 주는데, 자의식적인 성인을 주인공으로 하여 현실의 상황을 절망적이고 암담한 분위기로 조성하고 있다. 그의 대표작에는 '역설' , '장삼 이사' , '무성격자' , '비 오는 길' , '봄과 신작로' 등이 있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대백과사전 <국민문학>, <카프>, <시조부흥운동>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