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중윤과 홍명원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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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광해군 연간은 국제관계에 있어 조선을 끌어들여 후금공략에 활용하려는 명의 이이 제이 정책(以夷制夷政策)으로 광해군대 조선의 대명관계는 국왕 광해군의 책봉문제와 정치적 갈등, 국경무역을 비롯한 경제적 갈등 등으로 분석할 수 있으며, 명의 대후금 출병을 둘러싸고 명과의 갈등, 심하(深河)전투의 패전과 그 여파, 명의 재징병 요구와 조·명간 긴장관계 등 갈등과 긴장의 연속이었다. 심하전투에서 후금에 투항했던 조선 병사들이 1620년(광해군 12) 모두 석방되어 조선으로 돌아오자 명나라는 조선이 후금과 내통하였다고 의심하였다. 명나라의 보복을 근심한 광해군은 임기응변에 능한 홍명원을 주청사(奏請使)에 임명하였다. 그는 명나라에 가서 자칭 ‘고급사(告急使)’라 하며 오히려 임박한 조선에 대한 후금 침략의 다급함을 고하고, 구원을 주청하였다.
명나라는 파병에 대한 사례로 유시준(劉時俊)을 보내어 내탕금(內帑金)을 우리나라의 군신(君臣)들에게 나누어 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는 조선의 실정을 탐색하려는 것이었기에 홍명원은 명나라 조정 인사들을 만나 조선이 중국 사신을 접대하기조차 어려운 형편임을 설명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황제에게 조선에 사신을 보내지 말도록 주청하고, 그 내탕금을 홍명원 편에 보내도록 하였다. 광해군이 그 말을 듣고 기뻐하였으나 이이첨은 황중윤(黃中允)을 명나라에 주청사로 보내 사신과 내탕금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응천일록(凝川日錄)』 권2) 홍명원은 귀국 길에 황중윤의 사신 파견 소식을 듣고 명나라 황제의 명령을 기다리며 중강(中江)에 머물렀다. 그러나 명나라 조정 인사의 거절로 황중윤이 황제에게 주청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듣자 조선으로 돌아와 명나라에서 받은 조서(詔書)와 내탕금을 광해군에게 바쳤다.

사건

-사행날짜가 촉박하여 왕이 날을 미뤄주다.
1620년 3월 26일, 홍명원이 주청사로 명에 가자 명나라 만력제는 칙서와 함께 수만 냥의 백금(白金)을 하사하고, 사신을 보내도록 하였다. 그러나 홍명원은 혹여 중국 사신들이 조선의 내정을 살필 것을 우려해 사신을 막고자 조선의 사정이 좋지 않아 중국 사신을 맞이할 여력이 부족하다고 핑계를 대며 사신 행차를 정지해 달라고 청하였다. 이에 만력제는 홍명원의 말을 믿고 사신의 파견을 중지하고, 칙서와 하사금만 홍명원 편에 보냈다.
이 소식이 조정에 전해지자 3월 26일 사헌부와 비변사는 왕에게 명의 칙사를 막은 홍명원의 행동을 비난하며 급히 사신을 보내 홍명원의 말은 우리나라의 입장이 아니며 조선 조정에서도 이 기별을 듣고 놀라움에 허둥대며 실망하고 있으므로 다시 칙사를 보내 달라는 청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아뢰었다.
경신년(1620) 3월 29일 왕은 홍명원이 명을 벗어나기 전에 도착할 수 있게 사신을 보낼 것을 결정하고 비변사와 승문원으로 하여금 수일 안에 사신을 발송할 길일을 급히 택일하라 했다.
4월 1일 명나라로 가는 주문사(奏聞使)에 황중윤이 차출되었는데, 비변사는 황중윤이 명으로 출발할 날짜를 7일로 정하고 재촉했다. 그러나 왕은 날이 너무 촉박하니 연행(燕行) 가는 날짜를 미루라 하여 11일로 정하였다.
황중윤은 11일에 입궐하여 연경으로 가는 것을 고하며 하직(下直)하였다. 그러나 담당관청에서 인정(人情)과 여비 등의 물자를 지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15일로 날을 미루었다.

참고문헌

1)스토리테마파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