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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HS21CNU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1월 4일 (월) 15:46 판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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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팅쥔(溫庭筠)

: 화간파의 비조

중어중문학과 김한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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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Contents


개요 생애 연보 작품 데이터 참고문헌 주석



개요


온정균은 만당시기의 문인으로 어떤 평론가는 '화간파의 비조'라고 평할 정도로 온정균은 중국 문학사에서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온정균은 당나라 중엽에 이미 존재했던 사에 완약하고 염려한 풍격을 불어넣어 후에 사 창작에 있어 훌륭한 모델이 되었다.[1] 온정균은 시와 사에서 모두 뛰어나 시에 있어서는 이상은과 명성을 견주었고, 사에 있어서는 위장과 이름을 나란히 했다. 그의 시사는 대상의 천착에 뛰어났고, 색채미와 음률미가 있었다. 사는 여인의 규정을 담아 섬세하고 정교한 작품이 많다.[2]



생애


탄생과 어린시절


본명은 기(岐), 자는 비경(飛卿)이다. 태원 기(祁) 지역(지금의 山西성 祁현)에서 태어났다. 당나라 초엽에 재상을 지낸 온언박의 후예지만, 그가 태어날 무렵에는 이미 가세가 몰락한 후였다. 어려서부터 거문고와 피리를 잘 다루었고, 영민하고 문재가 뛰어났으며 글을 잘 지었다.[3]

여러 번의 과거 낙방과 관직 생활


그는 온팔차, 온팔음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온정균이 과거시험장에서 8번 팔짱을 끼었다 풀자 팔운시가 완성되었다 하여 붙여진 것이다. 그는 이렇게 재주가 뛰어났지만, 과거시험에는 누차 낙방했다. 문종 개성 4년(839)에 마흔에 가까운 나이로 과거에 응시하기 시작했으나 급제하지 못했고, 성시에도 참가할 수 없었다. 선종 대중 9년(855)에 다시 과거에 응시했지만, 이번에는 다른 사람을 대신해 부를 지어주어 과거시험장을 어지럽혔기 때문에 낙방했고, 수주 수현위라는 말단 관리로 폄적되었다. 대중 11년(857)에 서상이 양양을 다스리고 있을 때 온정균을 순관으로 임명했는데, 이때 그의 나이 56세였다. 함통 6년(865)에 온정균은 국자조교에 임명되어 국자감시를 관장했다. 그는 문장으로 사람을 판단하겠다는 기준을 제시했는데, 이것이 권세가와 귀족의 불만을 샀다. 또한 그가 시정을 비판하고 부패한 자를 폭로한 시문을 지은 것이 재상 등의 분노를 사서 결국 방성위로 폄관되었다.[4]

우울한 죽음


함통 7년(866) 우울함 속에서 죽고 말았다.[5]

교류하던 사람들


서상이 양양을 다스리고 있을 때 온정균이 순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그는 단성식, 주요 등과 교유하며 수창했다. 양양에서 몇 년을 보내다 함통 2년(861) 서상이 궐로 들어가자 온정균도 양양을 떠나 강동으로 갔고 다음해 겨울 회남으로 돌아왔다. 이때 분명하진 않으나 귀족 자제인 배성, 영호호 등과 어울렸던 것 같다. [6]



연보


801(추정)


태원 기 지역에서 태어났다.

839


마흔에 가까운 나이에 과거에 응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급제하지는 못했다.

855


다시 과거에 응시했지만,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부를 지어주다 낙방하였다. 수주 수현위라는 말단 관리로 폄적되었다.

857


순관으로 임명되었다.

863


당시 회남에 기거하였다. 취해서 밤에 돌아다니다가 순라군에게 따귀를 맞아 이가 부러지나 회남을 다스리던 영호도는 이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았고 오히려 순라군은 온정균의 행적을 사악하고 더러운 것으로 과장해 떠들었다. 온정균에 대한 구설은 수도까지 알려지게 되어 온정균은 스스로 장안에 가서 설욕을 해야만 했다.

865


국자조교에 임명되어 국자감시를 관장했다. 그러나 재상 등의 분노를 사서 결국 방성위로 폄관되었다.

866


이미 고령이기도 했었던 그는 우울함 속에 죽게 되었다.

작품


온정균의 작품


그가 창작했다고 전해지나 실물은 전해지지 않았다. ≪신당서(新唐書)≫ <예문지(藝文志)>에 따르면, 온정균 생시에 이미≪악란집(握蘭集)≫ 3권, ≪금전집(金荃集)≫ 10권, ≪시집(詩集)≫ 5권, ≪한남진고(漢南眞稿)≫ 10권이 있었고, 또한 단성식(段成式), 여지고(余知古) 등과 함께 엮은 시문합집(詩文合集)으로 ≪한상제금집(漢上題襟集)≫ 10권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모두 전하지 않는다.

[7] 시사 외에 온정균은 또한 소설 작가이자 학자이기도 했다. ≪신당서(新唐書)≫ <예문지(藝文志)>에 따르면, 온정균은 소설 ≪건손자(乾巽子)≫ 3권, ≪채다록(采茶錄)≫ 1권을 지었고 유서(類書)로 ≪학해(學海)≫ 10권을 편찬했다. 애석하게도 거의 전부가 망일되었고, ≪건손자≫의 부분적인 문구가 ≪태평광기(太平廣記)≫에 인용되어 있을 뿐이다.

[8]

온정균의 작품이 담긴 자료


그의 문집은 전해지지 않고, 후대 사람이 편집한 ≪온정균 시집(溫庭筠詩集)≫, ≪금전사(金荃詞)≫가 있다.

[9]

데이터


Data Table




Network Graph




Timeline


(추후 임베딩)

Digital Atlas


(추후 임베딩)


참고문헌


오프라인 자료


이지운. (2009). 온정균 사선. 서울: 지식을 만드는 지식.

온라인 리소스


(서술)


주석


  1. 온정균 사선 해설 부분을 재구성하였다.
  2. 온정균 사선 - 지식을만드는지식 시선집 | 온정균 저/이지운 역
  3. 온정균 사선 - 지식을만드는지식 시선집 | 온정균 저/이지운 역
  4. 온정균 사선 - 지식을만드는지식 시선집 | 온정균 저/이지운 역
  5. 온정균 사선 - 지식을만드는지식 시선집 | 온정균 저/이지운 역
  6. 온정균 사선 - 지식을만드는지식 시선집 | 온정균 저/이지운 역
  7. 온정균 사선 - 지식을만드는지식 시선집 | 온정균 저/이지운 역
  8. 온정균 사선 - 지식을만드는지식 시선집 | 온정균 저/이지운 역
  9. 온정균 사선 - 지식을만드는지식 시선집 | 온정균 저/이지운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