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FC Figure008
CNUDH
: 화간파의 비조
중어중문학과 김한솔
목차
Contents
개요
생애
탄생과 어린시절
본명은 기(岐), 자는 비경(飛卿)이다. 태원 기(祁) 지역(지금의 山西성 祁현)에서 태어났다. 당나라 초엽에 재상을 지낸 온언박의 후예지만, 그가 태어날 무렵에는 이미 가세가 몰락한 후였다.
어려서부터 거문고와 피리를 잘 다루었고, 영민하고 문재가 뛰어났으며 글을 잘 지었다.[3]
여러 번의 과거 낙방과 관직 생활
그는 온팔차, 온팔음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온정균이 과거시험장에서 8번 팔짱을 끼었다 풀자 팔운시가 완성되었다 하여 붙여진 것이다. 그는 이렇게 재주가 뛰어났지만, 과거시험에는 누차 낙방했다.
문종 개성 4년(839)에 마흔에 가까운 나이로 과거에 응시하기 시작했으나 급제하지 못했고, 성시에도 참가할 수 없었다.
선종 대중 9년(855)에 다시 과거에 응시했지만, 이번에는 다른 사람을 대신해 부를 지어주어 과거시험장을 어지럽혔기 때문에 낙방했고, 수주 수현위라는 말단 관리로 폄적되었다.
대중 11년(857)에 서상이 양양을 다스리고 있을 때 온정균을 순관으로 임명했는데, 이때 그의 나이 56세였다.
함통 6년(865)에 온정균은 국자조교에 임명되어 국자감시를 관장했다. 그는 문장으로 사람을 판단하겠다는 기준을 제시했는데, 이것이 권세가와 귀족의 불만을 샀다. 또한 그가 시정을 비판하고 부패한 자를 폭로한 시문을 지은 것이 재상 등의 분노를 사서 결국 방성위로 폄관되었다.[4]
우울한 죽음
함통 7년(866) 우울함 속에서 죽고 말았다.[5]
교류하던 사람들
서상이 양양을 다스리고 있을 때 온정균이 순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그는 단성식, 주요 등과 교유하며 수창했다.
양양에서 몇 년을 보내다 함통 2년(861) 서상이 궐로 들어가자 온정균도 양양을 떠나 강동으로 갔고 다음해 겨울 회남으로 돌아왔다. 이때 분명하진 않으나 귀족 자제인 배성, 영호호 등과 어울렸던 것 같다. [6]
연보
801(추정)
태원 기 지역에서 태어났다.
839
마흔에 가까운 나이에 과거에 응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급제하지는 못했다.
855
다시 과거에 응시했지만,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부를 지어주다 낙방하였다. 수주 수현위라는 말단 관리로 폄적되었다.
857
순관으로 임명되었다.
863
당시 회남에 기거하였다. 취해서 밤에 돌아다니다가 순라군에게 따귀를 맞아 이가 부러지나 회남을 다스리던 영호도는 이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았고 오히려 순라군은 온정균의 행적을 사악하고 더러운 것으로 과장해 떠들었다. 온정균에 대한 구설은 수도까지 알려지게 되어 온정균은 스스로 장안에 가서 설욕을 해야만 했다.
865
국자조교에 임명되어 국자감시를 관장했다. 그러나 재상 등의 분노를 사서 결국 방성위로 폄관되었다.
866
이미 고령이기도 했었던 그는 우울함 속에 죽게 되었다.
작품
데이터
Data Table
Network Graph
Timeline
(추후 임베딩)
Digital Atlas
(추후 임베딩)
참고문헌
오프라인 자료
이지운. (2009). 온정균 사선. 서울: 지식을 만드는 지식.
온라인 리소스
(서술)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