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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UDH
: 画圣
중어중문학과 황현성
목차
Contents
개요
왕유(王維, 701-761)는 중국 당(唐)의 시인이자 화가로서 자연을 소재로 한 서정시에 뛰어나 ‘시불(詩佛)’[1]이라고 불리며, 수묵(水墨) 산수화에도 뛰어나 남종문인화[2]의 창시자로 평가를 받는다. 자(字)는 마힐(摩詰)이고 분주(汾州, 지금의 山西省 汾陽) 출신이다. 상서우승(尙書右丞)의 벼슬을 역임하여 왕우승(王右丞)이라고도 불린다. 그가 태어난 해와 죽은 해는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에 각기 다르게 기술되어 있다. 《구당서[3](舊唐書)》에는 699년에 태어나 759년에 죽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신당서(新唐書)》에는 701년에 태어나 761년에 죽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생애
창작 그림 목록
특징적 항목2
(해당 항목의 정보 서술)
연보
699년~701년
출생[4]
개원 3년(715)
왕유는 고관들의 추천을 받아 집을 떠나 수도로 갔다. 그는 시를 잘 짓고, 서예와 그림에 능하고, 음악에 재능이 있어 도성에 오자마자 즉시 도성의 왕자와 귀족들의 총애를 받는 인물이 되었다.
개원 5년(717)
장안에 있었고 때로는 낙양에도 다녔다. 《九月九日忆山东兄弟》와 같은 시가 있다.
개원 7년(719)
진사로 급제하였고, 동생 진(縉)과 함께 준재(俊才)라는 명성을 얻고 그에게는 대악승(大楽丞) 관직이 주어졌다.
개원 8년(720)
작은 죄가 문제가 되어 제주사창참군(済州司倉参軍)으로 좌천당했다. 《집이기》에 따르면 황제만이 출 수 있는 춤인 「황사자」(黄師子)라는 춤을 그가 관리하던 악인이 불경하게 제멋대로 추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책임을 물은 것으로 전하고 있다.
개원 14년(726)
관직을 버리고 장안으로 돌아왔다. 이 무렵 장구령이나 맹호연(孟浩然)으로부터 시 재주에 대한 격찬을 받기도 했다.
개원 19년(731)
아내가 죽자 왕유는 망천(輞川)에 땅을 사서 별장을 짓고 은거하였다.
개원 22년(734)
우습유(右拾遺) 관직을 받았다.
개원 25년(737)
양주(涼州) 하서절도사(河西節度使) ・ 최희일(崔希逸)의 절도판관(節度判官)으로 임명되어 장안을 떠나 양주로 부임했고, 그곳에서 감찰어사(監察御史)로 승진하였다.
개원 28년(740)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써 장안으로 돌아왔으나 곧 다시 남방으로 파견되었다.
천보 9재(749)
왕유의 어머니 최씨가 세상을 떠나 궁궐을 떠나 천(辋川)에서 살았다 .
천보 11재(752)
조정에 복귀하였는데, 이 해에 이임보가 사망하고 새로 정권을 잡은 양국충(楊國忠)에게 중용되어 이부랑중(吏部郎中)이 되었다.
천보 12재(753)
일본의 견당사로 파견되어 당 조정의 관직에 종사하던 아베노 나카마로(阿倍仲麻呂)가 귀국하는데 송별하는 시를 지어 주기도 했다.
천보 14재(755)
급사중(給事中)이라는 요직이 되었다.
지덕(至徳) 원년(756)
촉 땅으로 몽진했던 현종 황제의 뒤를 따르려다 따르지 못하고 숨었고, 그만 안록산의 군에 잡히고 만다. 낙양(洛陽)으로 압송된 그는 병이라고 속였지만 강요에 못 이겨 안록산이 세운 대연(大燕) 정권의 급사중직을 떠맡게 되었다. 안녹산이 망하고 장안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관직을 박탈당했으나 만년에 상서우승(尙書右丞)에 임명되었다.
지덕 2년(757)
당군에 의해 낙양이 탈환되자 왕유는 진희열(陳希烈) 등과 함께 당군에 귀순하였다. 그러나 현종의 뒤를 이어 천자가 된 숙종(粛宗)은 왕유가 자의였든 타의였든 안록산의 조정에서 부역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물으려 들었고, 동생 왕진(王縉) 등의 구명과 앞서 왕유 자신이 뇌해청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지었던 시가 감안되어 태자중윤(太子中允)으로 강등당하는 선에서 목숨을 건졌다.
건원(乾元) 원년(758)
집현학사(集賢学士)로 승진하였다. 그 해에 다시 중서사인(中書舎人)에 이어 급사중(給事中)으로 누차 진급하였다. 이 무렵 두보나 가지(賈至)、잠삼(岑参)과 함께 시를 주고 받으며 살았다.
상원(上元) 2년(761)
상서우승(尚書右丞)이 되었다. 그 해에 기근이 들자 왕유는 자신의 직전(職田)에서 나는 곡식을 내놓아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서 베풀자고 요청하는 상소와 함께 자신의 은퇴를 청하면서 촉주자사(蜀州刺史)로 있던 왕진을 자신 대신 중앙으로 불러줄 것을 청하는 표문을 올렸다. 「책궁천제표」(責躬薦弟表)가 그것이다. 왕진은 이 표문으로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로 임명되어 중앙으로 복귀하였으나, 왕유는 그 해에 숨을 거두었다.
데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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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오프라인 자료
(서술)
온라인 리소스
개요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29512&cid=40942&categoryId=40004
강간설제도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6447649&cid=63854&categoryId=63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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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가회우도 https://old.shuge.org/ebook/jiang-gao-hui-yu-tu/
강간설의도 https://www.baike.com/wikiid/1160949835266350336?anchor=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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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음도 https://catalog.digitalarchives.tw/item/00/10/8d/ea.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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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간설의도 https://www.baike.com/wikiid/1160949835266350336?anchor=collection_list_title_7337858430898208768
설계도 https://baike.baidu.com/item/%E9%9B%AA%E6%BA%AA%E5%9B%BE/8345471?fromModule=lemma_inlink
망천도 https://baike.baidu.com/item/%E8%BE%8B%E5%B7%9D%E5%9B%BE/818215?fromModule=lemma_inlink
주석
- ↑ 시불(詩佛): 왕유(王維)는 시성(詩聖) 두보, 시선 (詩仙) 이백과 견주어 시불(詩佛)이라고 불린다. 이는 왕유가 출가하지 않은 선사로서, 자연을 노래하고 인생의 깊은 철리를 불교적 관점에서 한시로 읊었기 때문이다.https://blog.naver.com/chinajgkim/222174477736
- ↑ 남종문인화: 산수화의 2대 화풍 가운데 학문과 교양을 갖춘 문인들이 비직업적으로 수묵(水墨)과 담채(淡彩)를 써서 내면세계의 표현에 치중한 그림의 경향.https://ko.dict.naver.com/#/entry/koko/9d83cf12fc3e4ecb8b3e9da1703f8fb6
- ↑ 당서 : 《당서》는 당고조(唐高祖)의 건국(618)에서부터 애제(哀帝)의 망국(907)까지 21제(帝) 290년 동안의 당나라 역사의 기록이다. 처 음에는 단지 《당서》로 이룩하였지만, 송나라 때 내용을 고쳐 《신당서》로 편찬하였다. 그래서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로 나누어졌다.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080332&ref=y&cid=40942&categoryId=33395
- ↑ 네이버 지식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6447649&cid=63854&categoryId=6385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