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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UDH
: 화간파의 비조
중어중문학과 김한솔
목차
Contents
개요
온정균은 만당시기의 문인으로 어떤 평론가는 '화간파의 비조'라고 평할 정도로 온정균은 중국 문학사에서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온정균은 당나라 중엽에 이미 존재했던 사에 완약하고 염려한 풍격을 불어넣어 후에 사 창작에 있어 훌륭한 모델이 되었다.[1]
생애
탄생과 어린시절
본명은 기(岐), 자는 비경(飛卿)이다. 태원 기(祁) 지역(지금의 山西성 祁현)에서 태어났다. 당나라 초엽에 재상을 지낸 온언박의 후예지만, 그가 태어날 무렵에는 이미 가세가 몰락한 후였다.
어려서부터 거문고와 피리를 잘 다루었고, 영민하고 문재가 뛰어났으며 글을 잘 지었다.
여러 번의 과거 낙방과 관직 생활
그는 온팔차, 온팔음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온정균이 과거시험장에서 8번 팔짱을 끼었다 풀자 팔운시가 완성되었다 하여 붙여진 것이다. 그는 이렇게 재주가 뛰어났지만, 과거시험에는 누차 낙방했다.
문종 개성 4년(839)에 마흔에 가까운 나이로 과거에 응시하기 시작했으나 급제하지 못했고, 성시에도 참가할 수 없었다.
선종 대중 9년(855)에 다시 과거에 응시했지만, 이번에는 다른 사람을 대신해 부를 지어주어 과거시험장을 어지럽혔기 때문에 낙방했고, 수주 수현위라는 말단 관리로 폄적되었다.
대중 11년(857)에 서상이 양양을 다스리고 있을 때 온정균을 순관으로 임명했는데, 이때 그의 나이 56세였다.
함통 6년(865)에 온정균은 국자조교에 임명되어 국자감시를 관장했다. 그는 문장으로 사람을 판단하겠다는 기준을 제시했는데, 이것이 권세가와 귀족의 불만을 샀다. 또한 그가 시정을 비판하고 부패한 자를 폭로한 시문을 지은 것이 재상 등의 분노를 사서 결국 방성위로 폄관되었다.
우울한 죽음
함통 7년(866) 우울함 속에서 죽고 말았다.
교류하던 사람들
서상이 양양을 다스리고 있을 때 온정균이 순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그는 단성식, 주요 등과 교유하며 수창했다.
양양에서 몇 년을 보내다 함통 2년(861) 서상이 궐로 들어가자 온정균도 양양을 떠나 강동으로 갔고 다음해 겨울 회남으로 돌아왔다. 이때 분명하진 않으나 귀족 자제인 배성, 영호호 등과 어울렸던 것 같다.
연보
특정연도
(해당 연도의 정보 서술)
특정연도
(해당 연도의 정보 서술)
특정연도
(해당 연도의 정보 서술)
작품
데이터
Data Table
Network Graph
Timeline
(추후 임베딩)
Digital Atlas
(추후 임베딩)
참고문헌
오프라인 자료
이지운. (2009). 온정균 사선. 서울: 지식을 만드는 지식.
온라인 리소스
(서술)
주석
- ↑ 온정균 사선 해설 부분을 재구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