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FC(2026)Report01
CNUDH
: 무술변법(1898)을 중심으로
중어중문학과 김태현
목차
Contents
연구배경
1894년, 청나라는 일본과 벌인 전쟁인 청일전쟁에서 크게 졌다. 이듬해 맺은 시모노세키조약에 따라 청나라는 요동반도와 대만 등을 일본에 넘겨주고, 은 2억 냥이라는 큰돈을 물어 주어야 했다. 30년 넘게 서양의 무기와 기술을 들여왔는데도, 작은 섬나라로 여기던 일본에 진 것이다. 이 충격 속에서 기술만 배워서는 안 되고, 나라의 법과 제도까지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이렇게 법과 제도를 바꾸자는 개혁을 변법이라고 한다.[1]
변법을 앞장서 주장한 사람은 강유위였다. 그는 과거 시험을 보러 베이징에 모인 수험생 1,200여 명과 함께, 조약을 거부하고 나라를 개혁하자는 글을 황제에게 올렸다.[2] 그리고 1898년 6월 11일, 젊은 황제 광서제가 마침내 변법을 나라의 기본 방침으로 삼겠다고 선포했다. 그러나 개혁은 오래가지 못했다. 같은 해 9월 21일, 광서제의 이모인 서태후가 다시 나라 일을 직접 맡겠다고 선언했다. 광서제는 궁궐 안 호수에 있는 작은 섬 '영대'에 갇혔고, 개혁에 앞장선 여섯 사람은 처형되었다. 개혁이 103일 만에 끝났기 때문에 이 개혁을 백일유신이라고도 부른다.[3]
그렇다면 개혁은 왜 이렇게 빨리 무너졌을까? 이 물음에 대한 학자들의 생각은 하나로 모이지 않는다.
- 개혁파와 보수파의 대립: 오수열은 광서제를 따르는 '황제 편'과 서태후를 따르는 '태후 편'이 맞서 싸운 것을 큰 원인으로 본다. 또 개혁을 이끈 사람들이 청나라를 지키는 것을 전제로 삼은 탓에, 백성의 힘을 모으지 못한 한계도 함께 지적한다.[4]
- 둘로 나뉜 황제의 권력: 김형종은 광서제가 직접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한 뒤에도, 서태후가 황제가 처리한 일을 빠짐없이 보고받으며 실제 권력을 쥐고 있었다고 본다. 이름으로는 광서제가 황제였지만 실제 힘은 서태후에게 있는, 권력이 둘로 나뉜 구조였다는 것이다.[5]
- 정변을 부른 진짜 계기: 흔히 원세개가 개혁파의 계획을 서태후 쪽에 알린 것이 정변의 원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원세개가 계획을 알린 때와 정변이 일어난 때가 너무 가까워서, 이 설명을 의심하는 학자도 있다. 레이자성은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와 영국 선교사 티모시 리처드가 관련된 합방(나라를 합치자는) 계획이 서태후를 움직였다고 주장한다.[6]
이렇게 생각이 갈리는 까닭은 무술변법이 한두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황제와 태후, 황제를 돕는 젊은 관리와 나이 든 대신, 군대를 거느린 장군, 그리고 외국인까지 많은 사람이 얽혀 있었다. 위의 연구들은 저마다 다른 인물과 관계에 무게를 두고, 그 관계를 글로 풀어 설명한다. 그래서 누가 누구와 어떻게 이어져 있었는지, 그 전체 모습을 한눈에 비교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본 연구는 무술변법에 관련된 사람과 사건, 기관을 점으로, 그 사이의 관계를 선으로 정리하여 관계망 그림을 만든다. 누가 누구를 추천하고, 돕고, 배신하고, 벌했는지를 선으로 이어 보면, 글로만 읽을 때는 잘 보이지 않던 권력의 구조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연구목적
본 연구의 목적은 1894년 청일전쟁부터 1898년 무술정변까지, 무술변법에 관련된 사람과 사건을 관계망 그림으로 정리하고, 그 안에서 중요한 인물과 사건을 찾아 깊이 살펴보는 것이다. 이를 통해 무술변법이 '개혁파와 보수파의 싸움'이라는 한 줄로만 설명되는 사건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서로 추천하고, 돕고, 견제하고, 배신하며 만들어 낸 권력의 그물이었음을 밝히고자 한다.
연구는 다음 세 단계로 진행한다.
- 관계망 만들기: 무술변법과 관련된 인물, 사건, 기관, 문헌, 제도를 점으로 정한다. 인물에는 황제와 태후, 개혁을 이끈 관리, 원로대신, 군대를 거느린 장군, 외국인이 포함된다. 사건에는 조약, 상소, 개혁 선포, 관리의 파면, 정변 등이 포함된다. 그리고 이들 사이의 관계를 선으로 잇는다. 선은 자료에서 확인되는 관계만 인정하고, 어떤 자료에 근거했는지 함께 기록해 그림을 믿을 수 있게 만든다.
- 중요한 점 고르기: 완성된 그림에서 두 가지를 센다. 하나는 한 점에 선이 몇 개 모였는가이다. 선이 많이 모인 점은 여러 사람과 사건이 몰리는 '중심'이다. 다른 하나는 서로 다른 무리를 잇는 길목에 얼마나 자주 놓이는가이다. 이런 점은 무리와 무리 사이를 이어 주는 '다리'이다. 두 기준을 함께 쓰면, 관계가 많이 몰린 인물과 편과 편 사이를 오간 인물을 구별해서 볼 수 있다.
- 깊이 살펴보기: 고른 점을 자료로 자세히 살펴보고, 그 점이 왜 그 자리에 있었는지 풀이한다.
- 인물: 어떤 일을 했는지, 누구와 누구를 이어 주었는지, 개혁의 성공과 실패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 사건: 왜 일어났고 어떻게 흘러갔는지, 누가 관련되었는지, 권력의 균형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 중요한 인물과 사건이 서로 어떻게 얽혀 있는지
이 연구가 답하려는 물음은 다음과 같다.
- 무술변법을 둘러싼 관계망에서 가장 많은 관계가 몰린 인물과 사건은 무엇이며, 개혁의 흐름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가?
- 황제 편과 태후 편은 누구를 통해 이어지고, 또 누구 때문에 갈라졌는가? 예를 들어 광서제와 서태후 사이를 이어 주던 공친왕이 세상을 떠난 뒤,[7] 두 편을 오가던 원세개는 결국 태후 편을 택했다.[8] 관계망에서 이런 '다리' 역할을 한 인물은 누구였는가?
- 관계망 그림은 연구배경에서 살펴본 세 가지 해석, 곧 개혁파와 보수파의 대립, 둘로 나뉜 황제의 권력, 합방 계획을 각각 얼마나 뒷받침하는가?
정리하면, 이 연구는 관계를 정리해 중요한 인물과 사건을 찾고(관계망 분석), 그 인물과 사건을 자료로 풀이하는(깊이 살펴보기) 두 축으로 이루어진다. 이를 통해 시간 순서대로 사건을 늘어놓는 설명을 보완하고, 청나라 말기의 개혁을 사람과 사람의 연결이라는 눈으로 새롭게 읽는 틀을 제시하고자 한다.
연구정보
연구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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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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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 ↑ 오수열, 「청말(淸末) 변법유신운동의 전개와 성격」, 『한국동북아논총』 제54집, 2010, 137·141쪽.
- ↑ 「[동양의 근대를 만든 사람들] 캉유웨이: 무술변법으로 입헌군주정 꿈꾼 실패한 개혁가」, 『월간조선』, 월간조선 누리집.
- ↑ 김형종, 「近代中國의 皇帝權力: 光緖帝와 西太后」, 『역사학보』 제208집, 2010, 52·55~56쪽.
- ↑ 오수열, 「청말(淸末) 변법유신운동의 전개와 성격」, 『한국동북아논총』 제54집, 2010, 143·151쪽.
- ↑ 김형종, 「近代中國의 皇帝權力: 光緖帝와 西太后」, 『역사학보』 제208집, 2010, 47·50쪽.
- ↑ 레이자성, 「失落的眞相: 晚淸戊戌變法時期的'合邦'論與戊戌政變的關係」, 『중국사연구』 제61집, 2009, 178~179쪽.
- ↑ 오수열, 「청말(淸末) 변법유신운동의 전개와 성격」, 『한국동북아논총』 제54집, 2010, 149쪽.
- ↑ 「[동양의 근대를 만든 사람들] 캉유웨이: 무술변법으로 입헌군주정 꿈꾼 실패한 개혁가」, 『월간조선』, 월간조선 누리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