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HFC Figure003

CNUDH

HHS21CNU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0월 28일 (월) 13:43 판 (생애)

중국의역사와인물(강의) 페이지로 가기



왕유(王維)

: 인물에 관한 압축적 표현

중어중문학과 황현성





목차

Contents


개요 생애 연보 데이터 참고문헌 주석



개요


여기에 자유롭게 서술.



생애

1) 출생 왕유(王維, 699년 ~ 759년)는 중국 성당(盛唐)의 시인·화가로서 자는 마힐(摩詰)이다. 왕유의 아버지는 분주사마(汾州司馬)[1]를 지내고 하동(河東)으로 이주한 왕처렴(王処廉)이다. 어머니 최씨(崔氏)는 북종선(北宗禪) 제2조(祖) 보적(普寂)을 스승으로 삼기도 했던 신실한 불교 신자였고 왕유도 이러한 어머니의 영향으로 자라났다. 왕유의 자인 마힐(摩詰)도 《유마경》(維摩經)의 주인공인 유마힐거사(維摩詰居士)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2) 관직 개원 7년(719년) 왕유는 진사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인 개원 8년(720년) 작은 죄가 문제가 되어 제주사창참군(済州司倉参軍)으로 좌천당했다. 개원 14년(726년) 무렵 왕유는 관직을 버리고 장안으로 돌아왔다. 개원 19년(731년) 무렵 아내가 죽자 왕유는 망천(輞川)[2]에 땅을 사서 별장을 짓고 은거하였다. 그러나 장구령의 발탁으로 개원 22년(734년) 왕유는 우습유(右拾遺) 관직을 받았다. 개원 24년(736년) 장구령이 귀족 파벌의 이임보(李林甫)와의 정쟁에서 패해 실각하고, 왕유 자신도 개원 25년(737년) 양주(涼州) 하서절도사(河西節度使) ・ 최희일(崔希逸)의 절도판관(節度判官)으로 임명되어 장안을 떠나 양주로 부임했고, 그곳에서 감찰어사(監察御史)로 승진하였다. 개원 28년(740년)에는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써 장안으로 돌아왔으나 곧 다시 남방으로 파견되었다. 천보 14재(755년)에는 급사중(給事中)이라는 요직이 되었다.

3) 사망 왕유는 승려로써 출가하고자 하였으나 숙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이 무렵 두보(杜甫)에게 격려의 시를 보냈다. 건원(乾元) 원년(758년) 집현학사(集賢学士)로 승진하였다. 그 해에 다시 중서사인(中書舎人)에 이어 급사중(給事中)으로 누차 진급하였다. 이 무렵 두보나 가지(賈至)、잠삼(岑参)과 함께 시를 주고 받으며 살았다. 상원(上元) 2년(762년) 상서우승(尚書右丞)이 되었다. 그 해에 기근이 들자 왕유는 자신의 직전(職田)에서 나는 곡식을 내놓아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서 베풀자고 요청하는 상소와 함께 자신의 은퇴를 청하면서 촉주자사(蜀州刺史)로 있던 왕진을 자신 대신 중앙으로 불러줄 것을 청하는 표문을 올렸다.「책궁천제표」(責躬薦弟表)가 그것이다. 왕진은 이 표문으로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로 임명되어 중앙으로 복귀하였으나, 왕유는 그 해에 숨을 거두었다. 임종 무렵 왕유는 봉상(鳳翔)에 있던 동생 진이나 다른 벗들에게 이별을 고하는 편지를 쓴 다음, 붓을 내려 놓고 숨이 끊어졌다고 한다.


특징적 항목1


(해당 항목의 정보 서술)

특징적 항목2


(해당 항목의 정보 서술)



연보


특정연도


(해당 연도의 정보 서술)

특정연도


(해당 연도의 정보 서술)

특정연도


(해당 연도의 정보 서술)

데이터


Data Table




Network Graph




Timeline


(추후 임베딩)

Digital Atlas


(추후 임베딩)


참고문헌


오프라인 자료


(서술)

온라인 리소스


(서술)


주석


  1. 분주는 지금의 중국 산시 성(山西省) 분양 시(汾陽市)이다.
  2. 장안 동남쪽 남전현(藍田県)에 있는, 남전산(藍田山)과 요산(嶢山)의 사이를 흐르며 황하로 흘러드는 강의 이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