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FC(2025)Report09
CNUDH
만청(晚清) 재상 李鴻章에 대하여
중어중문학과 왕즈옌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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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배경
이홍장(1823년 2월 15일 ~ 1901년 11월 7일),자는 소천(少荃)이며, 안후이성 허페이시 출신이다. 청말 시기[1]의 정치가, 외교관, 군사 지휘관이었다.
원래 증국번의 막료로 활동하였으며, 태평천국 운동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청조의 고위 관료로 발탁되었다.이후 강소순무, 직예총독, 북양대신 등 요직을 역임하였고, ‘양무파’[2]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이었다. 또한 그는 청 정부가 추진한 중체서용(中體西用)개혁 사상의 주요 실천자이기도 하다.
청말 시기, 중국은 내우외환이 겹쳐 열강의 침략과 사회 혼란에 직면하였다. 이에 청 정부는 자강을 도모하기 위해 일련의 개혁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이홍장은 가장 대표적인 정치 인물 중 한 명으로 부상하였다.국가를 현대화하는 데 격렬한 노력들을 이루고, 몇몇의 주요 반란들을 끝냈으며 서방의 권력과 함께 청나라의 관계에서 지도적인 인물이 되었다.
연구목적
이홍장이 관여한 주요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그의 역할과 영향력을 분석하고자 한다.
구체적으로는 양무운동(洋務運動), 북양함대(北洋艦隊)의 창설, 청일전쟁(淸日戰爭),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 체결, 신축조약(辛丑條約) 체결 등 다섯 가지 사건을 중심으로, 이홍장이 각 사건에서 어떠한 결정을 내리고 어떤 행동을 취했는지를 고찰한다.
이를 통해 당시 청 정부의 개혁 추진, 군사력 강화, 외교 전략 수립에 있어 이홍장이 차지한 위상과 그의 판단이 청나라의 정치·군사·외교에 미친 긍정적 혹은 부정적인 영향을 종합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연구정보
연구내용
양무운동
이홍장은 양무운동의 발기인 중 한 명으로, 증국번, 좌종당과 함께 ‘양무 삼거두(洋務三巨頭)’로 불린다. 그는 강남 지역에서 강남제조총국 등 여러 근대 기업을 설립하였고, 철도·전신·병기 공장 등 사업을 적극 추진하였다. 그의 핵심 주장은 “대외적으로는 화친을 도모하고, 대내적으로는 자강을 실현하자(但求外敦和好, 內要自強)”는 것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는 중국의 근대 산업 및 군사 기술의 초보적 발전을 촉진하였고, 청나라에 최초의 근대적 기업과 군대를 구축하는 데 기여하였다.
북양함대(北洋艦隊)의 창설
청 정부는 이홍장의 주도로 중국 최초의 근대화 해군인 북양수군을 창설하였다. 이홍장은 해군 건설을 위한 자금 조달, 함대 구매, 인력 양성을 주도하였고, 독일과 영국에서 군함을 도입했으며 북양해군학당을 설립하여 근대 중국 해군 제도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북양수군의 창설은 청말 군사 근대화의 중요한 성과 중 하나로, 양무운동의 ‘자강(自强)’ 사상이 실질적으로 구현된 사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관리 부실과 재정 지원 부족으로 인해 북양수군은 갑오전쟁에서 패배하였고, 이는 청나라 군사 체제의 구조적 한계를 드러냈다.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 체결
청일전쟁에서 패배한 후, 이미 면직된 상태였던 이홍장은 청 정부의 명령으로 일본에 파견되어 협상에 나서게 되었다. 결국 1895년 4월 17일, 그는 일본 정부 대표 이토 히로부미와 함께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굴욕적인 조약의 체결로 인해 청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은 극에 달하였으며, 중국의 반식민지화는 한층 더 심화되었다. 이홍장은 이에 대해 큰 비판을 받았지만, 한편으로는 극단적인 열세 속에서도 국가 이익을 최대한 지키기 위해 노력한 인물로 평가되기도 한다.
참고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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