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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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의종의 迎奉佛骨<ref>  의종 재위 마지막 해 몸이 나날이 나빠지는 것을 느낀 그는 부처님의 사리를 궁으로 모시고 장수를 기원했다. 군신상간: '폐하, 절대 안됩니다, 당시 헌종 황제가 부처님의 사리를 궁으로 모시다가 곧 병으로 죽었으니 이 행동은 분명치 않습니다.'라고 반대했지만, 그러나 의종은, "불골자, 천하의 성물은 짐이 볼 수 있으니 죽어도 한이 없다! "라고 하여 대신들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불골을 영접하는 사찰의 건설비가 비싼 것은 물론, 전 대오에 수만 명이 있었고, 장안성 백성들이 총출동하여, 온 국민이 열광에 휩싸여 있었다. 의종은 당초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라고 명했고, 당당한 이유는 백성과 사직을 위해 복을 빌기 위해서였지만, 실제로는 자신을 위한 것에 불과했고, 사실 이 칭찬은 그의 목적을 전혀 달성하지 못한 채 신하들의 말에 따라 헌종 이순의 뒤를 이어 수개월 후 의종은 병사했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 부처님의 사리를 궁으로 모시고 활동으로 조정은 끊임없이 백성을 착취하고 농민 봉기를 계속하여 번진을 할거하였으며, 이당 왕조는 남은 가지와 썩은 버드나무만 남게 되었고, 30여 년 후 당나라는 망했다.</ref>로 재정악화<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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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의종의 迎奉佛骨<ref>  의종 재위 마지막 해 몸이 나날이 나빠지는 것을 느낀 그는 부처님의 사리를 궁으로 모시고 장수를 기원했다. 군신상간: '폐하, 절대 안됩니다, 당시 헌종 황제가 부처님의 사리를 궁으로 모시다가 곧 병으로 죽었으니 이 행동은 분명치 않습니다.'라고 반대했지만, 그러나 의종은, "불골자, 천하의 성물은 짐이 볼 수 있으니 죽어도 한이 없다! "라고 하여 대신들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불골을 영접하는 사찰의 건설비가 비싼 것은 물론, 전 대오에 수만 명이 있었고, 장안성 백성들이 총출동하여, 온 국민이 열광에 휩싸여 있었다. 의종은 당초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라고 명했고, 당당한 이유는 백성과 사직을 위해 복을 빌기 위해서였지만, 실제로는 자신을 위한 것에 불과했고, 사실 이 칭찬은 그의 목적을 전혀 달성하지 못한 채 신하들의 말에 따라 헌종 이순의 뒤를 이어 수개월 후 의종은 병사했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 부처님의 사리를 궁으로 모시고 활동으로 조정은 끊임없이 백성을 착취하고 농민 봉기를 계속하여 번진을 할거하였으며, 이당 왕조는 남은 가지와 썩은 버드나무만 남게 되었고, 30여 년 후 당나라는 망했다.</ref>로 재정악화:불골 영접에는 막대한 비용과 인력이 소모되었으며, 온 나라가 이 행사를 위해 동원되었다. 백성과 나라를 위한 일이라 주장했지만, 사실상 자신을 위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 달리, 헌종의 전철을 밟아 불골 영접 후 몇 달 만에 병사했다. 이 과정에서 과도한 비용 지출과 백성 착취는 농민 봉기를 야기했고, 지방 세력의 분열을 심화시켰다. 결국 당나라는 30여 년 후 멸망하고 말았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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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의종이 사망, 사망 당시 41세
 
7월- 의종이 사망, 사망 당시 4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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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20일 (금) 14:09 판

중국의역사와인물(강의) 페이지로 가기



당(唐) 의종(懿宗)

:제멋대로 움직이는 '아기'황제

중어중문학과 호훤영





목차

Contents


개요 생애 연보 데이터 참고문헌 연구후기 주석



개요


정치를 모르는 사람이 황제가 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주는 역사적 인물로, 우리가 현실에서 투표할 때 얼마나 신중해야 하는지를 경고해 줍니다. 그리고 통치자를 잘못 선택하면 나라의 운명이 흔들릴 수 있다는 점을 항상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생애


생물


온라인:833년12월28일~873년8월15일
오프라인:832년~873년—《唐懿宗 唐僖宗皇帝传》[1]


대중13년(859)


즉위-8월

함통10년(869)


총신정치의 시작[2]

함통14년(873)


영불골 사건:873년 당 의종은 법문사에서 불골을 장안으로 모셔오는 대규모 행사를 벌였다. 의종은 불골을 맞이하기 위해 사치스러운 의식과 행렬을 준비하며, 백성들과 관료들은 이에 동참하여 극도의 낭비와 호화로움을 보였다. 의종은 불골 앞에서 절하며 감격했고, 일부 승려들은 고통스러운 의식을 치렀다. 황궁에서 불골은 사흘간 공양된 뒤 사찰로 옮겨졌으며, 관리들은 금과 비단을 바쳤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의종은 붕어하고 희종이 즉위하였다.[3]


사망




연보


대중13년(859년)


8월- 선종宣宗[4]이 사망함, 왕종실[5]은 선종의 장남인 郓왕 이온李温을 즉위시킴. 즉위 당시 27세
9월- 어머니 조소용晁昭容을 원소황태후元昭皇太后로 추존함
10월- 신묘(辛卯), 천하를 사면(赦天下)


함통원년(860)


1월-성무헌문효황제(聖武献文孝皇帝)는 우정릉(于貞陵)에 묻혔고 묘호는 선종
5월- 의종은 재상에게 의논하라고 명령함


함통3년(862)


1월- 군신상존칭은예문명성효덕황제睿文明圣孝德皇帝,천하를 사면함

함통6년(863)


1월- 의안황후懿安皇后를 헌종의 종실에 모심
7월- 황자 '侃' 영왕郢王으로 책봉[6], 황자 '俨'를 보왕普王으로 책봉[7]
12월- 태황태후 정씨 사망함


함통8년(867)


9월- 질병 치료 받음

함통10년(869)


10월, 방훈의 난 평정됨[8]

함통11년(870)


동창공주 사망[9]


함통14년(873)


3월- 의종의 迎奉佛骨[10]로 재정악화:불골 영접에는 막대한 비용과 인력이 소모되었으며, 온 나라가 이 행사를 위해 동원되었다. 백성과 나라를 위한 일이라 주장했지만, 사실상 자신을 위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 달리, 헌종의 전철을 밟아 불골 영접 후 몇 달 만에 병사했다. 이 과정에서 과도한 비용 지출과 백성 착취는 농민 봉기를 야기했고, 지방 세력의 분열을 심화시켰다. 결국 당나라는 30여 년 후 멸망하고 말았다.


7월- 의종이 사망, 사망 당시 41세


데이터


Data Table




Network Graph




Timeline




Digital Atlas





참고문헌


오프라인 자료


唐帝列传:唐懿宗 唐僖宗皇帝传-吉林文史出版社

온라인 리소스


당의종 위키백과
李漼baidu
왕종실baidu
令狐绹
白敏中
萧邺
夏侯孜
蒋伸
杜审权
毕諴
杜悰
杨收
曹确
高璩
萧寘
徐商
路岩
于琮
韦保衡
王铎
刘邺
赵隐
萧仿
崔彦昭








연구후기



데이터 편찬자의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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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우들의 코멘트


전태현 (😭🤪😭🤪😭🤪😭🤪👍🏻👍🏻👍🏻👍🏻 적절한 아이콘을 선택 or 추가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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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성 (😭🤪😭🤪😭🤪😭🤪👍🏻👍🏻👍🏻👍🏻 적절한 아이콘을 선택 or 추가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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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온라인과 오프라인 다름.
  2. 위보형(韦保衡)-동창공주卫国文懿公主의 부마
  3. 咸通十四年(公元873年)三月,唐懿宗决定派人到法门寺迎奉佛骨。这时,有人以宪宗迎佛骨不久晏驾的事,企图谏止。但懿宗却说:“朕生得见之,死亦无恨!”于是广造浮图、宝帐、香舆、幡花、幢盖,以事奉迎。从长安到法门寺三百里间,道路车马,昼夜不绝。四月八日,佛骨到达长安时,导以禁军兵仗,公私音乐,沸天浊地,绵延数十里,士民夹道为彩楼及无遮会,竞为侈糜;懿宗登安福楼,顶礼膜拜,流涕沾臆;又有僧人将艾点燃放在头上,谓之“炼顶”。艾火燃烧,痛不可忍,倒路号哭。皇宫道场设金花帐,温清床,龙麟之席,凤毛之褥,焚玉髓之香,荐琼膏之乳。佛骨舍利在宫中供养三天后,送至安国、崇化寺,宰相以下竞施金帛,不可胜数。这年七月,懿宗驾崩,僖宗即位。
    함통 14년(서기 873) 3월, 당 의종은 법문사에 사람을 보내 불골을 봉안하기로 했다. 이때 불골이 곧 안가한 것을 헌종이 맞으며 간언을 하려 했다. 그러나 의종은 "짐은 살아서 보고 죽어도 한이 없다! "그래서 부도, 보장, 향여, 번화, 당개를 널리 지어 영접하게 하였다. 장안에서 법문사까지 300리 길은 밤낮으로 차와 말이 끊이지 않는다. 4월 8일, 불골이 장안에 도착했을 때, 금군병장, 공사음악, 끓는 하늘과 땅이 수십 리나 탁하고 길게 이어져 있었다. 사민 협도는 채루와 무차회로 다투어 치미(侈美)가 되었다. 의종은 안복루에 올라 절을 하며 눈물을 훔쳤다. 또 어떤 스님은 머리 위에 쑥을 올려놓고 "연정"이라고 하였다. 쑥불이 타올라 고통을 참지 못하고 도로에 엎드려 울다. 황궁 도량에는 금화장, 온청상, 용린지석, 봉황털의 요, 옥수의 향을 태우고 경고의 젖을 추천한다. 불골사리는 궁중에서 3일 동안 공양한 후 안나라와 숭화사로 보내져 재상 이하가 무수히 많은 금과 비단을 쓰기 위해 경쟁하였다. 그해 7월, 의종이 승하하고 희종이 즉위했다.
  4. 의종의 아버지
  5. 환관, 당시의 좌군중위로써 쿠데타로 의종을 옹립해서 즉위시켰다.
  6. 이간(李侃)은 당 의종의 넷째 아들로 함통 6년(865)에 영왕(郢王)에 봉해졌다가 10년(869)에 위왕(威王)으로 봉해졌다.
  7. 이엄(李俨)은 당 의종의 다섯째 아들로 함통 3년(862년) 5월 8일 장안동에서 태어났다. 처음 보왕에 봉해졌고,당 의종이 돌아가시기 전에 환관 전령자(田令子) 등의 추대로 황태자가 되어 이儇로 개명하였다. 당 의종이 사망하고 당 희종으로 황위에 올랐다.
  8. 함통 9년(868년) 7월부터 10년 10월까지 구이저우(지금의 광시 구이린)에서 수비병이 일으킨 반당 농민 봉기이고 당 함통 4년(863년), 당 의종은 남조를 정벌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여 서, 사(徐、泗) 지역(지금의 장쑤 서주, 안후이 사현 지역)에서 2,000명을 모병하여 옹주로 이동하도록 명령하였고, 그 중 800명을 구이린에 파견하여 3년 기간이 만료되면 본적지로 돌아가기로 약속하였다. 서사관찰사 최언은 거듭 약속을 어겼고, 수비병은 구이린에서 6년 동안 수비했지만 고향으로 돌아갈 가망이 없었다. 수비병은 병역에 시달렸고, 군중들은 격분했으며, 공천된 곡물과 판관 방훈을 선두로 내세워 북으로 돌아갔다. 방훈은 수백 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구이린, 후난, 후베이, 안후이, 저장, 장쑤를 거쳐 쉬저우에 도착했습니다. 쉬저우에서는 농민 봉기의 깃발을 세웠다가 방훈이 안후이 쑤저우에서 전사하고 봉기는 실패했다.
  9. 위국문의공주(卫国文懿公主, 849년-870년), 이씨, 이름 미상, 농서성기(陇西成紀, 지금의 간쑤성 친안현) 사람이다. 당나라 때의 공주, 당 의종 이漼의 장녀, 어머니는 곽숙비이다. 공주는 대중 3년(849년)에 태어났는데, 총애를 받아 동창공주(同昌公主)로 책봉되었다. 함통 9년에 당시의 기거랑인 위보형(韦保衡)과 결혼하여 결혼식의 호화로운 수준은 당나라에서 유일무이한 경우이다. 함통 11년(870년), 공주는 22살에 돌아가셨고 당 의종은 슬픔에 겨워 자작만가를 부르고 통곡하여 위국공주(卫国公主)를 추증하고 시호를 문의(文懿)라 하여 소릉원에 안장하였다.
  10. 의종 재위 마지막 해 몸이 나날이 나빠지는 것을 느낀 그는 부처님의 사리를 궁으로 모시고 장수를 기원했다. 군신상간: '폐하, 절대 안됩니다, 당시 헌종 황제가 부처님의 사리를 궁으로 모시다가 곧 병으로 죽었으니 이 행동은 분명치 않습니다.'라고 반대했지만, 그러나 의종은, "불골자, 천하의 성물은 짐이 볼 수 있으니 죽어도 한이 없다! "라고 하여 대신들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불골을 영접하는 사찰의 건설비가 비싼 것은 물론, 전 대오에 수만 명이 있었고, 장안성 백성들이 총출동하여, 온 국민이 열광에 휩싸여 있었다. 의종은 당초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라고 명했고, 당당한 이유는 백성과 사직을 위해 복을 빌기 위해서였지만, 실제로는 자신을 위한 것에 불과했고, 사실 이 칭찬은 그의 목적을 전혀 달성하지 못한 채 신하들의 말에 따라 헌종 이순의 뒤를 이어 수개월 후 의종은 병사했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 부처님의 사리를 궁으로 모시고 활동으로 조정은 끊임없이 백성을 착취하고 농민 봉기를 계속하여 번진을 할거하였으며, 이당 왕조는 남은 가지와 썩은 버드나무만 남게 되었고, 30여 년 후 당나라는 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