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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변법을 앞장서 주장한 사람은 강유위였다. 그는 과거 시험을 보러 베이징에 모인 수험생 1,200여 명과 함께, 조약을 거부하고 나라를 개혁하자는 글을 황제에게 올렸다.<ref>「[동양의 근대를 만든 사람들] 캉유웨이: 무술변법으로 입헌군주정 꿈꾼 실패한 개혁가」, 『월간조선』, [https://monthly.chosun.com/news/articleView.html?idxno=9170 월간조선 누리집].</ref> 그리고 1898년 6월 11일, 젊은 황제 광서제가 마침내 변법을 나라의 기본 방침으로 삼겠다고 선포했다. 그러나 개혁은 오래가지 못했다. 같은 해 9월 21일, 광서제의 이모인 서태후가 다시 나라 일을 직접 맡겠다고 선언했다. 광서제는 궁궐 안 호수에 있는 작은 섬 '영대'에 갇혔고, 개혁에 앞장선 여섯 사람은 처형되었다. 개혁이 103일 만에 끝났기 때문에 이 개혁을 '''백일유신'''이라고도 부른다.<ref>김형종, 「近代中國의 皇帝權力: 光緖帝와 西太后」, 『역사학보』 제208집, 2010, 52·55~56쪽.</ref><br/><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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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둘로 나뉜 황제의 권력''': 김형종은 광서제가 직접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한 뒤에도, 서태후가 황제가 처리한 일을 빠짐없이 보고받으며 실제 권력을 쥐고 있었다고 본다. 이름으로는 광서제가 황제였지만 실제 힘은 서태후에게 있는, '''권력이 둘로 나뉜 구조'''였다는 것이다.<ref>김형종, 「近代中國의 皇帝權力: 光緖帝와 西太后」, 『역사학보』 제208집, 2010, 47·50쪽.</ref><br/><br/> | ||
| + | *'''정변을 부른 진짜 계기''': 흔히 원세개가 개혁파의 계획을 서태후 쪽에 알린 것이 정변의 원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원세개가 계획을 알린 때와 정변이 일어난 때가 너무 가까워서, 이 설명을 의심하는 학자도 있다. 레이자성은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와 영국 선교사 티모시 리처드가 관련된 '''합방(나라를 합치자는) 계획'''이 서태후를 움직였다고 주장한다.<ref>레이자성, 「失落的眞相: 晚淸戊戌變法時期的'合邦'論與戊戌政變的關係」, 『중국사연구』 제61집, 2009, 178~179쪽.</ref><br/><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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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렇게 생각이 갈리는 까닭은 무술변법이 한두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황제와 태후, 황제를 돕는 젊은 관리와 나이 든 대신, 군대를 거느린 장군, 그리고 외국인까지 많은 사람이 얽혀 있었다. 위의 연구들은 저마다 다른 인물과 관계에 무게를 두고, 그 관계를 글로 풀어 설명한다. 그래서 누가 누구와 어떻게 이어져 있었는지, 그 전체 모습을 한눈에 비교하기는 쉽지 않다.<br/><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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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그래서 본 연구는 무술변법에 관련된 사람과 사건, 기관을 '''점'''으로, 그 사이의 관계를 '''선'''으로 정리하여 '''관계망 그림'''을 만든다. 누가 누구를 추천하고, 돕고, 배신하고, 벌했는지를 선으로 이어 보면, 글로만 읽을 때는 잘 보이지 않던 '''권력의 구조'''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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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20일 (화) 16:59 판
: 무술변법(1898)을 중심으로
중어중문학과 김태현
목차
Contents
연구배경
1894년, 청나라는 일본과 벌인 전쟁인 청일전쟁에서 크게 졌다. 이듬해 맺은 시모노세키조약에 따라 청나라는 요동반도와 대만 등을 일본에 넘겨주고, 은 2억 냥이라는 큰돈을 물어 주어야 했다. 30년 넘게 서양의 무기와 기술을 들여왔는데도, 작은 섬나라로 여기던 일본에 진 것이다. 이 충격 속에서 기술만 배워서는 안 되고, 나라의 법과 제도까지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이렇게 법과 제도를 바꾸자는 개혁을 변법이라고 한다.[1]
변법을 앞장서 주장한 사람은 강유위였다. 그는 과거 시험을 보러 베이징에 모인 수험생 1,200여 명과 함께, 조약을 거부하고 나라를 개혁하자는 글을 황제에게 올렸다.[2] 그리고 1898년 6월 11일, 젊은 황제 광서제가 마침내 변법을 나라의 기본 방침으로 삼겠다고 선포했다. 그러나 개혁은 오래가지 못했다. 같은 해 9월 21일, 광서제의 이모인 서태후가 다시 나라 일을 직접 맡겠다고 선언했다. 광서제는 궁궐 안 호수에 있는 작은 섬 '영대'에 갇혔고, 개혁에 앞장선 여섯 사람은 처형되었다. 개혁이 103일 만에 끝났기 때문에 이 개혁을 백일유신이라고도 부른다.[3]
그렇다면 개혁은 왜 이렇게 빨리 무너졌을까? 이 물음에 대한 학자들의 생각은 하나로 모이지 않는다.
- 개혁파와 보수파의 대립: 오수열은 광서제를 따르는 '황제 편'과 서태후를 따르는 '태후 편'이 맞서 싸운 것을 큰 원인으로 본다. 또 개혁을 이끈 사람들이 청나라를 지키는 것을 전제로 삼은 탓에, 백성의 힘을 모으지 못한 한계도 함께 지적한다.[4]
- 둘로 나뉜 황제의 권력: 김형종은 광서제가 직접 나라를 다스리기 시작한 뒤에도, 서태후가 황제가 처리한 일을 빠짐없이 보고받으며 실제 권력을 쥐고 있었다고 본다. 이름으로는 광서제가 황제였지만 실제 힘은 서태후에게 있는, 권력이 둘로 나뉜 구조였다는 것이다.[5]
- 정변을 부른 진짜 계기: 흔히 원세개가 개혁파의 계획을 서태후 쪽에 알린 것이 정변의 원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원세개가 계획을 알린 때와 정변이 일어난 때가 너무 가까워서, 이 설명을 의심하는 학자도 있다. 레이자성은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와 영국 선교사 티모시 리처드가 관련된 합방(나라를 합치자는) 계획이 서태후를 움직였다고 주장한다.[6]
이렇게 생각이 갈리는 까닭은 무술변법이 한두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황제와 태후, 황제를 돕는 젊은 관리와 나이 든 대신, 군대를 거느린 장군, 그리고 외국인까지 많은 사람이 얽혀 있었다. 위의 연구들은 저마다 다른 인물과 관계에 무게를 두고, 그 관계를 글로 풀어 설명한다. 그래서 누가 누구와 어떻게 이어져 있었는지, 그 전체 모습을 한눈에 비교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본 연구는 무술변법에 관련된 사람과 사건, 기관을 점으로, 그 사이의 관계를 선으로 정리하여 관계망 그림을 만든다. 누가 누구를 추천하고, 돕고, 배신하고, 벌했는지를 선으로 이어 보면, 글로만 읽을 때는 잘 보이지 않던 권력의 구조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연구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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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정보
연구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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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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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 ↑ 오수열, 「청말(淸末) 변법유신운동의 전개와 성격」, 『한국동북아논총』 제54집, 2010, 137·141쪽.
- ↑ 「[동양의 근대를 만든 사람들] 캉유웨이: 무술변법으로 입헌군주정 꿈꾼 실패한 개혁가」, 『월간조선』, 월간조선 누리집.
- ↑ 김형종, 「近代中國의 皇帝權力: 光緖帝와 西太后」, 『역사학보』 제208집, 2010, 52·55~56쪽.
- ↑ 오수열, 「청말(淸末) 변법유신운동의 전개와 성격」, 『한국동북아논총』 제54집, 2010, 143·151쪽.
- ↑ 김형종, 「近代中國의 皇帝權力: 光緖帝와 西太后」, 『역사학보』 제208집, 2010, 47·50쪽.
- ↑ 레이자성, 「失落的眞相: 晚淸戊戌變法時期的'合邦'論與戊戌政變的關係」, 『중국사연구』 제61집, 2009, 178~17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