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FC(2025)Report07"의 두 판 사이의 차이
CNUDH
(→연구내용) |
(→연구내용) |
||
| 70번째 줄: | 70번째 줄: | ||
'''1. 임칙서'''<br/> | '''1. 임칙서'''<br/> | ||
임칙서는 도광로부터 명을 받아 광주에서 아편 단속을 총괄하였다. 당시 임칙서의 직책은 흠차대신이었다. 임칙서는 도광제에게 <금연육책>을 상소로 제시하고, 의료인 허가위와 협력하여 아편, 아편의 치료방법을 연구하는 등 아편 중독 문제 해결에 힘썼다. 허가위는 임칙서 아내의 병을 치료해주면서 임칙서와 알게 되었고, 그가 아편중독의 치료에 관한 책인 구미량방은 임칙서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br/><br/> | 임칙서는 도광로부터 명을 받아 광주에서 아편 단속을 총괄하였다. 당시 임칙서의 직책은 흠차대신이었다. 임칙서는 도광제에게 <금연육책>을 상소로 제시하고, 의료인 허가위와 협력하여 아편, 아편의 치료방법을 연구하는 등 아편 중독 문제 해결에 힘썼다. 허가위는 임칙서 아내의 병을 치료해주면서 임칙서와 알게 되었고, 그가 아편중독의 치료에 관한 책인 구미량방은 임칙서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br/><br/> | ||
| − | '''2. 임칙서의 금연활동'''<br/> | + | '''2. 아편엄금론과 아편이금론'''<br/> |
| + | 임칙서는 황작자의 아편엄금론을 지지했다.아편 엄금론은 아편을 철저히 금지하고 단속해야한다는 주장이다. 심지어 황작자는 아편과 관련된 자들을 사형에 처해야한다는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아편엄금론과 반대되는 입장인 아편이금론은 현실적인 이익을 위해서라도 아편을 일부허용하며 단속해야한다는 입장이다. 아편이금론을 주장한 사람으로는 허내제 등이 있다.<br/><br/> | ||
| + | '''3. 임칙서의 금연활동'''<br/> | ||
임칙서는 금연활동이라는 정책아래 여러 세부 활동을 추진하였다. 광주로 간 임칙서는 1939년 3월 18일에 13양행에게 아편 밀수 금지를 경고했다. 당시 청나라는 폐관 정책으로 인해 일부 허가를 받은 상인들만 외국 상인들과 거래를 할 수 있었는데, 허가를 받은 상인인 13양행이 아편을 밀수하는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안 임칙서가 경고를 한 것이다. 또한 임칙서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에게 편지를 보내서 청나라에 아편을 밀수하고 있는 영국 상인들을 막아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영국 정부와, 청나라에 아편을 밀수하는 영국 상인은 관련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한 임칙서의 실수였다는 평이 있기도 하다.<br/> | 임칙서는 금연활동이라는 정책아래 여러 세부 활동을 추진하였다. 광주로 간 임칙서는 1939년 3월 18일에 13양행에게 아편 밀수 금지를 경고했다. 당시 청나라는 폐관 정책으로 인해 일부 허가를 받은 상인들만 외국 상인들과 거래를 할 수 있었는데, 허가를 받은 상인인 13양행이 아편을 밀수하는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안 임칙서가 경고를 한 것이다. 또한 임칙서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에게 편지를 보내서 청나라에 아편을 밀수하고 있는 영국 상인들을 막아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영국 정부와, 청나라에 아편을 밀수하는 영국 상인은 관련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한 임칙서의 실수였다는 평이 있기도 하다.<br/> | ||
임칙서는 아편 근절을 위해 아편몰수정책을 이어서 시행하였다. 3알 안에 가지고 있는 모든 아편을 내놓고, 이후에도 아편을 청나라로 밀수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게 했다. 이에 영국 상무 감독인 찰스 엘리엇은 이 정책을 무마하려고 하였다. 또한 당시 최대의 아편 판매상이었던 덴트는 끝까지 임칙서의 몰수 정책에 반대하였다. 그러자 임칙서는 덴트가 가지고 있던 밀수선을 모두 압수하고 덴트를 체포하였다. 임칙서는 덴트 외에도 다른 외국인 상인들을 구금하며 강경하게 아편 몰수 정책을 시행하였다. 결국 찰스 엘리엇은 아편 약 2만 상자를 넘겨주었고, 임칙서는 호문에서 영국으로부터 몰수한 아편을 불태웠다.<br/><br/> | 임칙서는 아편 근절을 위해 아편몰수정책을 이어서 시행하였다. 3알 안에 가지고 있는 모든 아편을 내놓고, 이후에도 아편을 청나라로 밀수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게 했다. 이에 영국 상무 감독인 찰스 엘리엇은 이 정책을 무마하려고 하였다. 또한 당시 최대의 아편 판매상이었던 덴트는 끝까지 임칙서의 몰수 정책에 반대하였다. 그러자 임칙서는 덴트가 가지고 있던 밀수선을 모두 압수하고 덴트를 체포하였다. 임칙서는 덴트 외에도 다른 외국인 상인들을 구금하며 강경하게 아편 몰수 정책을 시행하였다. 결국 찰스 엘리엇은 아편 약 2만 상자를 넘겨주었고, 임칙서는 호문에서 영국으로부터 몰수한 아편을 불태웠다.<br/><br/> | ||
| − | ''' | + | '''4. 주요 사건과 아편전쟁과의 연관성'''<br/> |
| + | 임칙서가 시행 대부분의 정책들은 영국정부와 반대되는 행동일 수밖에 없었다. 13양행에게 아편 밀수 금지를 경고한 것, 몰수 정책을 시행한 것, 최종적으로 호문소연 사건은 아편전쟁 발발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또한 호문소연 다음달인 7월에 발생한 임유희 사건도 아편전쟁 발발의 직접적 원인이었다. 임유희라는 주민이 영국 수병에 의해 사망하자 임유희는 그 범인을 인도할 것을 찰스엘리엇에게 요청했다.이게 거부당하자 임칙서는 영국인에 대한 식량 지급을 금지하거나 영국 수군과의 군사적 마찰을 피하지 않았다. <br/> | ||
2025년 10월 19일 (일) 13:51 판
중어중문학과 조우빈
목차
Contents
연구배경
제1차 아편전쟁은 청나라와 영국 간의 무역 불균형 때문이었다. 영국이 청나라에서 막대한 양의 차와 비단 등을 수입하기 시작한 후부터 영국의 은 유출이 증가했고, 이런 무역 불균형을 해소하고자 영국은 청나라로 아편을 밀수했다. 그러나 막대한 양의 아편은 아편 중독자 급증의 원인이 되었고, 다양한 사회 문제가 발생했다.
청나라에서 당시 아편 문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는 그림이다. 귀족 집안의 남자가 아편에 중독되어서 어떻게 망해갔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아편 중독은 청나라 백성들의 삶을 파괴했고, 군인과 관리들의 아편 중독으로 인해서 청나라는 국정운영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도광제는 임칙서를 흠차대신으로 광주에 파견했다. 그는 아편금지정책을 펼치며 아편 단속을 주도했다. 일반적으로 임칙서는 호문에서 영국의 아편을 폐기한 청나라의 정치가로 잘 알려져있다. 하지만 그는 아편 밀수 단속 뿐만 아니라 청나라 백성들의 아편 중독을 치료하고 예방하는 정책에도 관심이 많았다.
연구목적
아편전쟁 관련 수업을 들을 때마다, 아편에 중독된 수많은 백성들의 제대로 치료를 받을 수는 있었을까 하는 안타까움과 궁금증이 있었다. 그래서 아편 중독으로 진료를 받은 사람들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던 중, 임칙서가 금연 예방과 중독 치료에 깊은 관심을 갖고 활동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연구는 임칙서, 그리고 아편전쟁 중 그가 내세웠던 아편금지 정책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임칙서의 활동을 영국과의 정치적 충돌 관점에서 보는 것 뿐만이 아니라 임칙서가 아편 중독의 예방과 치료라는 인간적인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였다는 점에 집중할 것이다.
연구정보
연구내용
1. 임칙서
임칙서는 도광로부터 명을 받아 광주에서 아편 단속을 총괄하였다. 당시 임칙서의 직책은 흠차대신이었다. 임칙서는 도광제에게 <금연육책>을 상소로 제시하고, 의료인 허가위와 협력하여 아편, 아편의 치료방법을 연구하는 등 아편 중독 문제 해결에 힘썼다. 허가위는 임칙서 아내의 병을 치료해주면서 임칙서와 알게 되었고, 그가 아편중독의 치료에 관한 책인 구미량방은 임칙서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2. 아편엄금론과 아편이금론
임칙서는 황작자의 아편엄금론을 지지했다.아편 엄금론은 아편을 철저히 금지하고 단속해야한다는 주장이다. 심지어 황작자는 아편과 관련된 자들을 사형에 처해야한다는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아편엄금론과 반대되는 입장인 아편이금론은 현실적인 이익을 위해서라도 아편을 일부허용하며 단속해야한다는 입장이다. 아편이금론을 주장한 사람으로는 허내제 등이 있다.
3. 임칙서의 금연활동
임칙서는 금연활동이라는 정책아래 여러 세부 활동을 추진하였다. 광주로 간 임칙서는 1939년 3월 18일에 13양행에게 아편 밀수 금지를 경고했다. 당시 청나라는 폐관 정책으로 인해 일부 허가를 받은 상인들만 외국 상인들과 거래를 할 수 있었는데, 허가를 받은 상인인 13양행이 아편을 밀수하는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안 임칙서가 경고를 한 것이다. 또한 임칙서는 영국 빅토리아 여왕에게 편지를 보내서 청나라에 아편을 밀수하고 있는 영국 상인들을 막아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영국 정부와, 청나라에 아편을 밀수하는 영국 상인은 관련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한 임칙서의 실수였다는 평이 있기도 하다.
임칙서는 아편 근절을 위해 아편몰수정책을 이어서 시행하였다. 3알 안에 가지고 있는 모든 아편을 내놓고, 이후에도 아편을 청나라로 밀수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게 했다. 이에 영국 상무 감독인 찰스 엘리엇은 이 정책을 무마하려고 하였다. 또한 당시 최대의 아편 판매상이었던 덴트는 끝까지 임칙서의 몰수 정책에 반대하였다. 그러자 임칙서는 덴트가 가지고 있던 밀수선을 모두 압수하고 덴트를 체포하였다. 임칙서는 덴트 외에도 다른 외국인 상인들을 구금하며 강경하게 아편 몰수 정책을 시행하였다. 결국 찰스 엘리엇은 아편 약 2만 상자를 넘겨주었고, 임칙서는 호문에서 영국으로부터 몰수한 아편을 불태웠다.
4. 주요 사건과 아편전쟁과의 연관성
임칙서가 시행 대부분의 정책들은 영국정부와 반대되는 행동일 수밖에 없었다. 13양행에게 아편 밀수 금지를 경고한 것, 몰수 정책을 시행한 것, 최종적으로 호문소연 사건은 아편전쟁 발발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또한 호문소연 다음달인 7월에 발생한 임유희 사건도 아편전쟁 발발의 직접적 원인이었다. 임유희라는 주민이 영국 수병에 의해 사망하자 임유희는 그 범인을 인도할 것을 찰스엘리엇에게 요청했다.이게 거부당하자 임칙서는 영국인에 대한 식량 지급을 금지하거나 영국 수군과의 군사적 마찰을 피하지 않았다.
참고자원
(여기에 내용을 서술해주세요)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