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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er><font color="#008000" size="9"><b>연구 제목</b></font></center><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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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er><font color="#008000" size="9"><b>'식민성(植民性)'과 '근대성(近代性)'의 교차로: 홍콩과 중국, 모순적 공존의 지평</b></font></center><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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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face="나눔바른고딕 UltraLight"><p style="text-align:right;"><font color="black" size="4">중어중문학과 <b>[[이재갑CNU19|이재갑]]</b></font></p>
 
<font face="나눔바른고딕 UltraLight"><p style="text-align:right;"><font color="black" size="4">중어중문학과 <b>[[이재갑CNU19|이재갑]]</b></font></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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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er><h2 class="subheader">'''Contents'''</h2></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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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Hangan.jpeg|400픽셀|韩干]]<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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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기억이 통조림에 들어 있다면, 영원히 유통기한이 없었으면 좋겠다. 만약 유통기한을 꼭 정해야 한다면, 만 년으로 해야겠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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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A%B0%84_%28%ED%99%94%EA%B0%80%29 한간](706~783<ref>初唐과 中唐에 걸쳐있음</ref>)은 중국 [https://ko.wikipedia.org/wiki/당나라 당나라] [https://ko.wikipedia.org/wiki/당_현종 현종] 시대를 살았던 '''화가'''이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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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장은 영국령 홍콩 시기의 끝자락이었던 1994년, 낭만의 시대에 개봉한 홍콩 영화 ‘중경삼림’의 한 대사이다. 이후 홍콩은 중국으로 반환되며 ‘일국양제(一國兩制)’ 체제 아래 50년간의 특별행정구 지위를 부여받았고, 그 결과 오늘날 세계에서 유일하게 ‘유통기한이 존재하는 도시’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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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은 아편전쟁의 결과로 영국 식민지를 거쳤고, 이후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 과정에서 전략적으로 활용된 영국과 중국의 합작으로 발명된 구조적 모순을 안고있는 도시이다. 동시에 신냉전 구도 속에서 대만과 함께 미-중 갈등의 핵심 무대이자, 중국 사회의 모순이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공간이기도 하다.  
한간은 원래 술집에서 고용살이를 했다. 어느 날 왕유, 왕진 형제의 술값을 받으러 갔다가 기다리는 사이 땅바닥에 사람과 말을 그린 것을 [https://ko.wikipedia.org/wiki/왕유 왕유]가 보게 되었다. 시인 왕유는 한간의 뛰어난 그림 실력에 놀랐고, 한간이 전문적으로 그림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십수년에 걸쳐 그에게 자금을 지원했다. 한간은 조패에게 그림을 배우다가 이후 현종에 의해 궁정으로 불려가서 황명으로 진굉에게 그림을 배워 말을 그리기 시작했다. 독자적인 화법을 사용하는 것을 본 현종은 그에게 “그대는 조패와 진굉의 제자인데, 어찌 그들의 그림을 닮지 않았는가?”라고 물었다. 현종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ins>“조패와 진굉은 당연히 저의 스승들이시나, 제겐 40만 분의 스승들이 더 계십니다. 폐하의 내구마<ref>궁궐 안의 마굿간에 속한 말, 임금의 하사품으로도 자주 쓰인다.</ref> 40만 마리가 모두 저의 스승입니다.”</ins> 이로 인해 현종은 그에게 남다른 재주가 있음을 인정했다. 한간은 궁정에서 현종이나 여러 왕들이 소유하고 있던 명마를 맡아 그리면서 ‘고금독보古今独歩<ref>고금을 통틀어도 비교할 만한 사람이 없을 만큼 뛰어남.</ref>’라는 평을 받았다. 또한 그는 말을 그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물화나 안마화(鞍馬画)도 그렸다. 중 말을 그리는 화법으로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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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 흥분과 고요. 즉, 모든 대비되는 특색들이 공존하는 도시,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남은 유통기한을 보내고있는 홍콩이다."'''''<br/>
이러한 한간의 생애를 보고 그가 어떤 방식으로 그림을 그렸으며, 또 어떤 작품들을 남겨 현재 '''중국 당나라의 리얼리즘 화가'''로서 호평을 받는 것인지 알고자 한간의 그림들에 대해 조사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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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러한 ‘모순의 도시’ 홍콩을 형성시킨 근원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189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의 홍콩은 어떤 사회,경제적 과정을 통해 발전했으며, 속에서 중국인들의 삶은 어떠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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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민족주의적 역사관은 사회의 발전을 견인하는가,아니면 자폐적 종족주의를 정당화하는가?”'''''<br/>마지막으로, 이러한 무거운 질문에 대한 사유의 시간을 가져보고자 한다. 홍콩은 영국의 식민지 경험을, 한국과 대만은 일본의 식민 지배를 통해 근대적 제도와 사회적 인프라를 수용하였다. 이제 감정적 평가를 넘어, 역사를 건조한 흐름의 눈으로 바라보는 연습을 주류사회가 고민해야할 시기가 왔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홍콩시민들이 식민지 경험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이를 오늘날 한국 사회의 인식과 대비함으로써 무엇이 진정한 역사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지를 모색해보고자 한다.</b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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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간의 그림들을 인터넷에 검색해보면, 한간의 수많은 그림들 중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547309&cid=46719&categoryId=46781 조야백도]照夜白圖》와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551000&cid=46702&categoryId=46740 목마도]牧馬圖》가 가장 많이 검색된다. 그러나 이마저도 그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없었다'''. 한간에 대해 더 조사하던 중 한간이 그린 인물화에 대한 내용도 일부 발견했다. 그러나 한간이 그린 그림들을 한번에 볼 수 있는 책과 웹사이트를 포함한 미디어는 어느 곳에도 '''없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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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본 연구는 189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영국령 홍콩의 사회,경제적 발전 과정을 살펴보고, 그 속에서 중국인들의 삶과 역할을 분석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특히 홍콩이 식민지적 근대화 과정에서 상업, 노동, 지식인 활동을 통해 어떻게 제국적 질서에 적응하거나 저항했는지를 탐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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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의 유명한 시인이자 화가인 왕유에 대해 조사하다보면 한간에 대한 정보도 간간히 보인다. 왕유가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림을 공부하도록 후원했다는 사실이 명확히 있는데 정작 한간을 검색해보면 나오는 정보는 《조야백도照夜白圖》와 《목마도牧馬圖》에 대한 일부 정보들 뿐이다. 이를 통해서는 왕유가 그의 어떤 재능을 알아본 건지 '''파악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미디어에 흩어져있는 한간의 작품들을 <ins>'''한 곳'''</ins>에 모아 연구해 정리하고, 한간이 그린 그림들의 특징과 한간의 그림들로 알 수 있는 당나라의 시대상도 함께 연구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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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또한, 홍콩의 경험을 한국의 일본 식민지 경험과 비교함으로써, 동아시아 식민지 근대화의 공통적 특징과 차이를 조명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감정적 민족주의를 넘어, 역사를 구조적 흐름 속에서 성찰하는 시각을 제시하는 것을 최종 목표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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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color:#3CB371">연구정보</s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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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aike.baidu.com/l/N6L0CNsL 一分钟了解画家韩干]<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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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교통수단의 발달'''<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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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조야백도.jpeg|400픽셀]]<br/>
 
'''《조야백도照夜白圖》''', 750년경, 수묵화<br/>
 
한간이 그린 조야백은 현종황제가 탔던 명마 중 하나이다. 한간은 막 끌어온 사나운 준마를 굴레와 고삐로 조여놓은 모습을 생생하게 그렸다. 또한 조야백의 성난 눈과 입을 벌린 채 더운 김을 몰아내며 솟구치려는 듯 네 발로 땅을 쳐올리는 모습을 현실감있게 그렸다. 이에 더불어 조야백의 살아있는 생기와 근육들의 긴장감, 마치 들릴 듯한 울음까지도 그림으로 담았다.<br/>
 
《조야백도照夜白圖》를 보면 말의 꼬리가 없다. 이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데, 가장 설득력있는 주장은 한간이 일부러 꼬리를 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당나라는 혼란상황에 빠졌었다. 이에 관해 이백과 두보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시로 풍자를 남겨놓았다. 한간 역시 이와 같은 맥락으로 흥성하던 당이 쇠락하는 모습을 말의 꼬리를 생략해 성두쇠미(盛頭衰尾)로 그려놓았다는 것이다.<br/>
 
《조야백도照夜白圖》는 현재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위치해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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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목마도.jpeg|400픽셀]]<br/>
 
'''《목마도牧馬圖》''', 750년경, 비단에 설채<br/>
 
《목마도》는 준마의 비대한 웅장한 모습을 묘사했다. 흑백의 두 말이 그려져 있는데, 말을 타고 있는 사람은 두건을 쓴 채로 고삐를 잡고 천천히 걷고 있는 모습으로 그렸다. 《목마도》의 선은 가늘고 강건하게 나타내 말의 건장한 체형을 그려냈다. 또한 흑마의 몸에는 주지의 무늬와 비단 안장을 함께 그려 카리스마를 나타내며, 인물의 모습은 붓으로 조밀하게 그려내 구조가 치밀하고 생동감이 넘치게 그려냈다. 《목마도》는 원래 '명회집진(名绘集珍)'이라는 책 중 한 부분으로 왼쪽에는 송 휘종 조길(趙吉)의 '한간진적(韓干眞迹, 정해어필)'이라는 글씨가 있다.<br/>
 
<br/>
 
[[파일:신준도.jpeg]]<br/>
 
'''《신준도神骏图》''', 五代时期, 채색화<br/>
 
《신준도神骏图》은 동진 상청담의 대표적인 인물인 고승<ref>스님</ref>이 말을 사랑하는 이야기를 그린 것으로, 해당 그림 역시 생동감 있고 구성이 치밀하게 그려진 작품이다. 언덕의 석대 위에 걸터앉아 물살을 가르며 달려오는 준마를 바라보고 있는 스님을 그렸고, 준마는 머리를 풀어헤친 모습으로 손에는 막대 모양의 솔을 들고 물속에서 목욕을 하고 달려오는 듯한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그 옆에는 큰 띠를 두른 서역西域의 시중이 서있는 채 팔에 독수리를 세워둔 모습을 그려 평온하지 않은 분위기를 더했다.<br/>
 
《신준도神骏图》는 현재 랴오닝성 박물관에 위치해있다.<br/>
 
<br/>
 
[[파일:어인정마도.jpeg|400픽셀]]<br/>
 
'''《호인정마도胡人呈马图》''', 五代时期, 수묵화<br/>
 
[http://baike.baidu.com/l/cPlVTeol 《호인정마도胡人呈马图》에 대한 영상 圉人呈马图,唐代韩干作品]<br/>
 
《호인정마도胡人呈马图》는 마부가 말 고삐를 잡은 채 말 한 마리를 끌고 가는 것을 생동감있게 그린 작품이다. 준마의 몸과 그 내면을 생동감이 있음과 동시에 정확하고, 간결하며, 진실하게 그려냈다. 전문가의 소견으로 마부는 양 볼의 수염이 크고 뚱뚱한 것을 보아 호인胡人이며, 말은 웅장하고 강인하게 그려진 것을 보아 서역西域의 품종이라고 한다. 또한 외형적으로는 흑백의 말이 건장하고, 풍채가 크며, 생동감 넘치지만, 선의 묘사는 섬세하고 매끄럽다.<br/>
 
《호인정마도胡人呈马图》는 현재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위치해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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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all>식민 당국은 빅토리아 항구 횡단 페리 및 홍콩섬 트램 등 주요 대중교통 시스템을 확립하여 인구 이동 및 상업 활동을 용이하게 하였다.</small>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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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all>1910년 중국 본토와의 연결을 위한 광저우-구룡 철도가 개통되었으며, 이는 홍콩이 남중국 무역의 중계 거점으로서 기능하는 데 핵심적 기반이 되었다.</small>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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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회적 인프라 건설(보건,교육을 중심으로)'''<br/></b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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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all>1894년 페스트 이후 공중 위생법이 제정되고 근대적인 하수 및 배수 시설이 구축되었으며, 이는 전염병 통제와 도시 보건 환경 개선을 위한 주요 동인이 되었다</small>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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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all>영국식 교육기관이 설립되어 영어 능통자를 포함한 중국인 중간 관리층이 양성되었으며, 이는 식민지 행정의 효율성 증대에 기여하였다.</small>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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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중국인, 영국인 차별'''<br/></b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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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all>1894년 페스트 유행 이후 공중 위생법이 제정되고 근대적인 하수 및 배수 시설이 구축되었으며, 이는 전염병 통제와 도시 보건 환경 개선을 위한 주요 동인이 되었다</small><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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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all>대중교통의 좌석 등급제와 빅토리아 피크 거주 제한 조례 등의 정책이 시행되어, 주거 및 공공 시설 접근에서 인종적 차별과 공간적 분리가 제도화되었다.</small><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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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all>경찰 조직 등 식민 통치 기구 내에서도 인종별 계층 구조가 확연하였으며, 중국인들은 일상적 차별과 불평등한 법 집행에 노출되었다.</small><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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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중국인들의 저항'''<br/></b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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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all>1922년 1월 13일부터 3월 8일까지 56일간, 영국령 홍콩에서 중국인 선원들을 중심으로 대규모 파업이 발생하였다.<br/> 이는 주로 임금 구조 내에 제도화된 인종차별적 불평등에 대한 저항으로, 당시 중국인 노동자들은 동일한 노동을 수행함에도 불구하고 영국인(백인) 노동자 임금의 약 20% 수준에 불과한 차별적 저임금을 강요받고 있었다.</small><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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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all>파업 결과 최소 15% 정도의 임금 인상의 성과를 거두고, 노동운동이 중국 본토로 확산됨. 중국 노동운동의 1차 고조기 시기에 진입하는 결과를 낳았다</sm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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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 사람은 살아야 한다.'''</big><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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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all>타계한 중국의 민주화 운동가 류샤오보는 “지금의 홍콩이 생기기까지 100년이 걸렸다. 그 크기를 감안하면, 중국이 오늘날의 홍콩처럼 되려면 300년간 (서구의) 식민지배를 받아야 할 것이다. 솔직히 300년도 부족하지 않은가 싶다. 서구화를 택하는 것은 인간이 되기를 택하는 것이다.”라는 발언으로 비판을 받았다.</small><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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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all>오늘날 한국과 중국의 발전과 번영에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역사적 사실은 식민지 시기에 근대적 제도와 사회적 자본이 도입되었다는 점이다..</small><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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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all>과연 자유무역과 세계화 시대인 오늘날,‘민족'이라는 개념은 실존하는가? 어쩌면 이러한 강박이 역사의 진보와 근대화를 막고 있는 것은 아닐까?</sm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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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float:center; background:#3CB371; width:100%; height:10px; text-align:right; padding:2px 2px 2px;"></div>
 
<div style="float:center; background:#3CB371; width:100%; height:10px; text-align:right; padding:2px 2px 2px;"></div>
 
<font face="나눔바른고딕 UltraLight">
 
<font face="나눔바른고딕 UltraL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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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align="right">{{button|[[HFC(2025)Report01#목차|상단으로 이동]]}}</div><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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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ass="sortable wikitable" style="text-align: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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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내용을 서술해주세요)
! 내용 || 분류 || URL
 
|-
 
| 한간 || 백과 ||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585865&cid=62066&categoryId=62066
 
|-
 
| 한간 || 백과 || https://ko.wikipedia.org/wiki/한간_(화가)
 
|-
 
| 한간 || 백과 || https://baike.baidu.com/item/韩干/6175356?fr=ge_ala
 
|-
 
| 한간 || 웹사이트 || https://blog.naver.com/isomis/220408349794
 
|-
 
| 한간 || 책 || 『한간의 요술 말』 https://www.gilbutkid.co.kr/renew/book/detail.php?pro_id=529
 
|-
 
| 한간 || 영상 || http://baike.baidu.com/l/N6L0CNsL
 
|-
 
| 조야백도 || 백과 ||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547309&cid=46719&categoryId=46781
 
|-
 
| 조야백도 || 기사 || https://www.thevi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26
 
|-
 
| 조야백도 || 웹사이트 || https://blog.naver.com/davidgcell/222616204862
 
|-
 
| 목마도 || 백과 ||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551000&cid=46702&categoryId=46740
 
|-
 
| 신준도 || 백과 || https://baike.baidu.com/item/神骏图/3393364?fromModule=lemma_inlink
 
|-
 
| 호인정마도 || 백과 || https://baike.baidu.com/item/圉人呈马图/22497725?fromModule=lemma_inlink
 
|-
 
| 호인정마도 || 영상 || http://baike.baidu.com/l/cPlVTeo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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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color:#3CB371">Footnote</s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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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an style="color:#3CB371">주석</span>'''==
 
<div style="float:center; background:#3CB371; width:100%; height:10px; text-align:right; padding:2px 2px 2px;"></div>
 
<div style="float:center; background:#3CB371; width:100%; height:10px; text-align:right; padding:2px 2px 2px;"></div>
 
<font face="나눔바른고딕 UltraLight">
 
<font face="나눔바른고딕 UltraLight">
<div align="right">{{button|[[HFC(2024)Report01#목차|상단으로 이동]]}}</div><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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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align="right">{{button|[[HFC(2025)Report01#목차|상단으로 이동]]}}</div><br/>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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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0월 20일 (월) 14:28 기준 최신판

중국의역사와인물(강의) 페이지로 가기



'식민성(植民性)'과 '근대성(近代性)'의 교차로: 홍콩과 중국, 모순적 공존의 지평

중어중문학과 이재갑





목차

Contents


연구배경 연구목적 연구내용 연구정보 참고자원



연구배경


"만약 기억이 통조림에 들어 있다면, 영원히 유통기한이 없었으면 좋겠다. 만약 유통기한을 꼭 정해야 한다면, 만 년으로 해야겠다."

이 문장은 영국령 홍콩 시기의 끝자락이었던 1994년, 낭만의 시대에 개봉한 홍콩 영화 ‘중경삼림’의 한 대사이다. 이후 홍콩은 중국으로 반환되며 ‘일국양제(一國兩制)’ 체제 아래 50년간의 특별행정구 지위를 부여받았고, 그 결과 오늘날 세계에서 유일하게 ‘유통기한이 존재하는 도시’로 남게 되었다. 홍콩은 아편전쟁의 결과로 영국 식민지를 거쳤고, 이후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 과정에서 전략적으로 활용된 영국과 중국의 합작으로 발명된 구조적 모순을 안고있는 도시이다. 동시에 신냉전 구도 속에서 대만과 함께 미-중 갈등의 핵심 무대이자, 중국 사회의 모순이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공간이기도 하다.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 흥분과 고요. 즉, 모든 대비되는 특색들이 공존하는 도시,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남은 유통기한을 보내고있는 홍콩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모순의 도시’ 홍콩을 형성시킨 근원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189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의 홍콩은 어떤 사회,경제적 과정을 통해 발전했으며, 그 속에서 중국인들의 삶은 어떠했는가?


“민족주의적 역사관은 사회의 발전을 견인하는가,아니면 자폐적 종족주의를 정당화하는가?”
마지막으로, 이러한 무거운 질문에 대한 사유의 시간을 가져보고자 한다. 홍콩은 영국의 식민지 경험을, 한국과 대만은 일본의 식민 지배를 통해 근대적 제도와 사회적 인프라를 수용하였다. 이제 감정적 평가를 넘어, 역사를 건조한 흐름의 눈으로 바라보는 연습을 주류사회가 고민해야할 시기가 왔다고 생각한다. 오늘날의 홍콩시민들이 식민지 경험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이를 오늘날 한국 사회의 인식과 대비함으로써 무엇이 진정한 역사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지를 모색해보고자 한다.



연구목적



본 연구는 189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영국령 홍콩의 사회,경제적 발전 과정을 살펴보고, 그 속에서 중국인들의 삶과 역할을 분석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특히 홍콩이 식민지적 근대화 과정에서 상업, 노동, 지식인 활동을 통해 어떻게 제국적 질서에 적응하거나 저항했는지를 탐구한다.


또한, 홍콩의 경험을 한국의 일본 식민지 경험과 비교함으로써, 동아시아 식민지 근대화의 공통적 특징과 차이를 조명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감정적 민족주의를 넘어, 역사를 구조적 흐름 속에서 성찰하는 시각을 제시하는 것을 최종 목표로 한다.



연구정보







연구내용


1.교통수단의 발달

식민 당국은 빅토리아 항구 횡단 페리 및 홍콩섬 트램 등 주요 대중교통 시스템을 확립하여 인구 이동 및 상업 활동을 용이하게 하였다.
1910년 중국 본토와의 연결을 위한 광저우-구룡 철도가 개통되었으며, 이는 홍콩이 남중국 무역의 중계 거점으로서 기능하는 데 핵심적 기반이 되었다.

2. 사회적 인프라 건설(보건,교육을 중심으로)
1894년 페스트 이후 공중 위생법이 제정되고 근대적인 하수 및 배수 시설이 구축되었으며, 이는 전염병 통제와 도시 보건 환경 개선을 위한 주요 동인이 되었다
영국식 교육기관이 설립되어 영어 능통자를 포함한 중국인 중간 관리층이 양성되었으며, 이는 식민지 행정의 효율성 증대에 기여하였다.

3. 중국인, 영국인 차별
1894년 페스트 유행 이후 공중 위생법이 제정되고 근대적인 하수 및 배수 시설이 구축되었으며, 이는 전염병 통제와 도시 보건 환경 개선을 위한 주요 동인이 되었다
대중교통의 좌석 등급제와 빅토리아 피크 거주 제한 조례 등의 정책이 시행되어, 주거 및 공공 시설 접근에서 인종적 차별과 공간적 분리가 제도화되었다.
경찰 조직 등 식민 통치 기구 내에서도 인종별 계층 구조가 확연하였으며, 중국인들은 일상적 차별과 불평등한 법 집행에 노출되었다.

4. 중국인들의 저항
1922년 1월 13일부터 3월 8일까지 56일간, 영국령 홍콩에서 중국인 선원들을 중심으로 대규모 파업이 발생하였다.
이는 주로 임금 구조 내에 제도화된 인종차별적 불평등에 대한 저항으로, 당시 중국인 노동자들은 동일한 노동을 수행함에도 불구하고 영국인(백인) 노동자 임금의 약 20% 수준에 불과한 차별적 저임금을 강요받고 있었다.

파업 결과 최소 15% 정도의 임금 인상의 성과를 거두고, 노동운동이 중국 본토로 확산됨. 중국 노동운동의 1차 고조기 시기에 진입하는 결과를 낳았다

5.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 사람은 살아야 한다.
타계한 중국의 민주화 운동가 류샤오보는 “지금의 홍콩이 생기기까지 100년이 걸렸다. 그 크기를 감안하면, 중국이 오늘날의 홍콩처럼 되려면 300년간 (서구의) 식민지배를 받아야 할 것이다. 솔직히 300년도 부족하지 않은가 싶다. 서구화를 택하는 것은 인간이 되기를 택하는 것이다.”라는 발언으로 비판을 받았다.

오늘날 한국과 중국의 발전과 번영에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역사적 사실은 식민지 시기에 근대적 제도와 사회적 자본이 도입되었다는 점이다..

과연 자유무역과 세계화 시대인 오늘날,‘민족'이라는 개념은 실존하는가? 어쩌면 이러한 강박이 역사의 진보와 근대화를 막고 있는 것은 아닐까?




참고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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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