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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정균의 작품이 담긴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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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원팅쥔의 사는 왕국유가 편집한 ≪금전사(金荃詞)≫에 70수, 임대춘의 회집 《당오대사(唐五代词)》에 70수 수록되어 있다.<ref>바이두, 温庭筠 중 主要作品, 周扬 等·中国大百科全书·中国文学(第Ⅱ卷)·北京:中国大百科全书出版社,1986 재인용</ref> 이외에도 여러 학자가 교정하고 주석을 달았지만, 모두 오래되었기에 2007년 류세카이가 이전까지의 여러 학자들의 자료를 보충, 정리하고 온정균의 시,사, 소설, 기타 다른 작품까지 정리하여 주석을 달았다.<ref>[https://baike.baidu.com/item/%E6%B8%A9%E5%BA%AD%E7%AD%A0%E8%AF%97%E9%9B%86?fromModule=lemma_search-box ≪온정균 시집(溫庭筠詩集)≫]</ref> 이를 저본으로 삼아 온정균의 사를 번역하여 ≪온정균 사선≫을 출판한 이지운은 "이 저본에서는 위작 논의가 있는 것과 시와 중복되어 실린 것을 제외한 59수가 실려 있다. 따라서 번역자는 이 저본을 따라 온정균의 사 59수를 번역했다."라고 말했으니 이에 근거해 온정균의 사는 대략 총 59수라고 볼 수 있다.<ref>온정균 사선 - 지식을만드는지식 시선집 | 온정균 저/이지운 역</ref>
 
현재 원팅쥔의 사는 왕국유가 편집한 ≪금전사(金荃詞)≫에 70수, 임대춘의 회집 《당오대사(唐五代词)》에 70수 수록되어 있다.<ref>바이두, 温庭筠 중 主要作品, 周扬 等·中国大百科全书·中国文学(第Ⅱ卷)·北京:中国大百科全书出版社,1986 재인용</ref> 이외에도 여러 학자가 교정하고 주석을 달았지만, 모두 오래되었기에 2007년 류세카이가 이전까지의 여러 학자들의 자료를 보충, 정리하고 온정균의 시,사, 소설, 기타 다른 작품까지 정리하여 주석을 달았다.<ref>[https://baike.baidu.com/item/%E6%B8%A9%E5%BA%AD%E7%AD%A0%E8%AF%97%E9%9B%86?fromModule=lemma_search-box ≪온정균 시집(溫庭筠詩集)≫]</ref> 이를 저본으로 삼아 온정균의 사를 번역하여 ≪온정균 사선≫을 출판한 이지운은 "이 저본에서는 위작 논의가 있는 것과 시와 중복되어 실린 것을 제외한 59수가 실려 있다. 따라서 번역자는 이 저본을 따라 온정균의 사 59수를 번역했다."라고 말했으니 이에 근거해 온정균의 사는 대략 총 59수라고 볼 수 있다.<ref>온정균 사선 - 지식을만드는지식 시선집 | 온정균 저/이지운 역</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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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0년경, 수묵화<ref>[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547309&cid=46719&categoryId=46781 『네이버지식백과』 조야백도 (照夜白圖) - 말뚝에 매여 있는 말 "조야백"]</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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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간이 그린 조야백은 현종황제가 탔던 명마 중 하나이다. 한간은 막 끌어온 사나운 준마를 굴레와 고삐로 조여놓은 모습을 생생하게 그렸다. 또한 조야백의 성난 눈과 입을 벌린 채 더운 김을 몰아내며 솟구치려는 듯 네 발로 땅을 쳐올리는 모습을 현실감있게 그렸다. 이에 더불어 조야백의 살아있는 생기와 근육들의 긴장감, 마치 들릴 듯한 울음까지도 그림으로 담았다.<ref>천장훙, 한간의 요술 말, 길벗어린이(2013)</ref><ref>[https://www.thevi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26 이빈섬, 말꼬리를 흐리다, 한간의 말그림 '조야백', 더뷰스, 2022.10.16]</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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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야백도照夜白圖》를 보면 말의 꼬리가 없다. 이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데, 가장 설득력있는 주장은 한간이 일부러 꼬리를 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당나라는 혼란상황에 빠졌었다. 이에 관해 이백과 두보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시로 풍자를 남겨놓았다. 한간 역시 이와 같은 맥락으로 흥성하던 당이 쇠락하는 모습을 말의 꼬리를 생략해 성두쇠미(盛頭衰尾)로 그려놓았다는 것이다.<ref>[https://www.thevi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26 이빈섬, 말꼬리를 흐리다, 한간의 말그림 '조야백', 더뷰스, 2022.10.16]</ref><ref>[https://blog.naver.com/davidgcell/222616204862 davidgcell, 꼬리없는 명마는 왜 유명해졌는가, (2022.01.08)]</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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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야백도照夜白圖》는 현재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위치해있다.<ref>[https://blog.naver.com/davidgcell/222616204862 davidgcell, 꼬리없는 명마는 왜 유명해졌는가, (2022.01.08)]</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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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18일 (월) 15:58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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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팅쥔(溫庭筠)

: 화간파의 비조

중어중문학과 김한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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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목차


개요 생애 연보 작품 데이터 참고문헌 주석



개요


온정균은 만당시기의 문인으로 어떤 평론가는 '화간파의 비조'라고 평할 정도로 온정균은 중국 문학사에서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온정균은 당나라 중엽에 이미 존재했던 사에 완약하고 염려한 풍격을 불어넣어 후에 사 창작에 있어 훌륭한 모델이 되었다.[2] 온정균은 시와 사에서 모두 뛰어나 시에 있어서는 이상은과 명성을 견주었고, 사에 있어서는 위장과 이름을 나란히 했다. 그의 시사는 대상의 천착에 뛰어났고, 색채미와 음률미가 있었다. 사는 여인의 규정을 담아 섬세하고 정교한 작품이 많다.[3]



생애


탄생과 어린시절


본명은 기(岐), 자는 비경(飛卿)이다. 태원 기(祁) 지역(지금의 山西성 祁현)에서 태어났다. 당나라 초엽에 재상을 지낸 온언박의 후예지만, 그가 태어날 무렵에는 이미 가세가 몰락한 후였다. 어려서부터 거문고와 피리를 잘 다루었고, 영민하고 문재가 뛰어났으며 글을 잘 지었다.[4]

여러 번의 과거 낙방과 관직 생활


그는 온팔차, 온팔음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온정균이 과거시험장에서 8번 팔짱을 끼었다 풀자 팔운시가 완성되었다 하여 붙여진 것이다. 그는 이렇게 재주가 뛰어났지만, 과거시험에는 누차 낙방했다. 문종 개성 4년(839)에 마흔에 가까운 나이로 과거에 응시하기 시작했으나 급제하지 못했고, 성시에도 참가할 수 없었다. 선종 대중 9년(855)에 다시 과거에 응시했지만, 이번에는 다른 사람을 대신해 부를 지어주어 과거시험장을 어지럽혔기 때문에 낙방했고, 수주 수현위라는 말단 관리로 폄적되었다. 대중 11년(857)에 서상이 양양을 다스리고 있을 때 온정균을 순관으로 임명했는데, 이때 그의 나이 56세였다. 함통 6년(865)에 온정균은 국자조교에 임명되어 국자감시를 관장했다. 그는 문장으로 사람을 판단하겠다는 기준을 제시했는데, 이것이 권세가와 귀족의 불만을 샀다. 또한 그가 시정을 비판하고 부패한 자를 폭로한 시문을 지은 것이 재상 등의 분노를 사서 결국 방성위로 폄관되었다.[5]

우울한 죽음


함통 7년(866) 우울함 속에서 죽고 말았다.[6]

교류하던 사람들


서상이 양양을 다스리고 있을 때 온정균이 순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그는 단성식, 주요 등과 교유하며 수창했다. 양양에서 몇 년을 보내다 함통 2년(861) 서상이 궐로 들어가자 온정균도 양양을 떠나 강동으로 갔고 다음해 겨울 회남으로 돌아왔다. 이때 분명하진 않으나 귀족 자제인 배성, 영호호 등과 어울렸던 것 같다. [7]



연보


801(추정)


태원 기 지역에서 태어났다.

839


마흔에 가까운 나이에 과거에 응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급제하지는 못했다.

855


다시 과거에 응시했지만,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부를 지어주다 낙방하였다. 수주 수현위라는 말단 관리로 폄적되었다.

857


순관으로 임명되었다.

863


당시 회남에 기거하였다. 취해서 밤에 돌아다니다가 순라군에게 따귀를 맞아 이가 부러지나 회남을 다스리던 영호도는 이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않았고 오히려 순라군은 온정균의 행적을 사악하고 더러운 것으로 과장해 떠들었다. 온정균에 대한 구설은 수도까지 알려지게 되어 온정균은 스스로 장안에 가서 설욕을 해야만 했다.

865


국자조교에 임명되어 국자감시를 관장했다. 그러나 재상 등의 분노를 사서 결국 방성위로 폄관되었다.

866


이미 고령이기도 했었던 그는 우울함 속에 죽게 되었다.

작품


온정균의 작품


온정균은 시, 사, 소설, 변문 등 다양한 장르의 문학 작품을 창작하였으며 이외에도 학술적인 저작을 남길 정도로 폭넓은 작품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그가 창작했다고 전해지나 대부분 이름만 남은 작품들이 많다. ≪신당서(新唐書)≫ <예문지(藝文志)>에 따르면, 온정균 생시에 이미≪악란집(握蘭集)≫ 3권, ≪금전집(金荃集)≫ 10권, ≪시집(詩集)≫ 5권, ≪한남진고(漢南眞稿)≫ 10권이 있었고, 또한 단성식(段成式), 여지고(余知古) 등과 함께 엮은 시문합집(詩文合集)으로 ≪한상제금집(漢上題襟集)≫ 10권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모두 전하지 않는다.[8] 시사 외에 온정균은 또한 소설 작가이자 학자이기도 했다. ≪신당서(新唐書)≫ <예문지(藝文志)>에 따르면, 온정균은 소설 ≪건손자(乾巽子)≫ 3권, ≪채다록(采茶錄)≫ 1권을 지었고 유서(類書)로 ≪학해(學海)≫ 10권을 편찬했다. 애석하게도 거의 전부가 망일되었고, ≪건손자≫의 부분적인 문구가 ≪태평광기(太平廣記)≫에 인용되어 있을 뿐이다.[9]

온정균의 작품이 담긴 자료


현재 원팅쥔의 사는 왕국유가 편집한 ≪금전사(金荃詞)≫에 70수, 임대춘의 회집 《당오대사(唐五代词)》에 70수 수록되어 있다.[10] 이외에도 여러 학자가 교정하고 주석을 달았지만, 모두 오래되었기에 2007년 류세카이가 이전까지의 여러 학자들의 자료를 보충, 정리하고 온정균의 시,사, 소설, 기타 다른 작품까지 정리하여 주석을 달았다.[11] 이를 저본으로 삼아 온정균의 사를 번역하여 ≪온정균 사선≫을 출판한 이지운은 "이 저본에서는 위작 논의가 있는 것과 시와 중복되어 실린 것을 제외한 59수가 실려 있다. 따라서 번역자는 이 저본을 따라 온정균의 사 59수를 번역했다."라고 말했으니 이에 근거해 온정균의 사는 대략 총 59수라고 볼 수 있다.[12]


온정균의 사





데이터


Data Table




Network Graph




Timeline


(추후 임베딩)

Digital Atlas


(추후 임베딩)


참고문헌


오프라인 자료


이지운. (2009). 온정균 사선. 서울: 지식을 만드는 지식.

온라인 리소스


(서술)


주석


  1. 건륭 8년(1743), 청나라 고관인 周绘이 각본하였다.《晚笑堂画传》에 수록됨. 바이두, 온정균
  2. 온정균 사선 해설 부분을 재구성하였다.
  3. 온정균 사선 - 지식을만드는지식 시선집 | 온정균 저/이지운 역
  4. 온정균 사선 - 지식을만드는지식 시선집 | 온정균 저/이지운 역
  5. 온정균 사선 - 지식을만드는지식 시선집 | 온정균 저/이지운 역
  6. 온정균 사선 - 지식을만드는지식 시선집 | 온정균 저/이지운 역
  7. 온정균 사선 - 지식을만드는지식 시선집 | 온정균 저/이지운 역
  8. 온정균 사선 - 지식을만드는지식 시선집 | 온정균 저/이지운 역
  9. 온정균 사선 - 지식을만드는지식 시선집 | 온정균 저/이지운 역
  10. 바이두, 温庭筠 중 主要作品, 周扬 等·中国大百科全书·中国文学(第Ⅱ卷)·北京:中国大百科全书出版社,1986 재인용
  11. ≪온정균 시집(溫庭筠詩集)≫
  12. 온정균 사선 - 지식을만드는지식 시선집 | 온정균 저/이지운 역
  13. 『네이버지식백과』 조야백도 (照夜白圖) - 말뚝에 매여 있는 말 "조야백"
  14. 천장훙, 한간의 요술 말, 길벗어린이(2013)
  15. 이빈섬, 말꼬리를 흐리다, 한간의 말그림 '조야백', 더뷰스, 2022.10.16
  16. 이빈섬, 말꼬리를 흐리다, 한간의 말그림 '조야백', 더뷰스, 2022.10.16
  17. davidgcell, 꼬리없는 명마는 왜 유명해졌는가, (2022.01.08)
  18. davidgcell, 꼬리없는 명마는 왜 유명해졌는가, (2022.01.08)




작품명 작품 설명
《조야백도照夜白圖》 조야백도.jpeg
  • 750년경, 수묵화[13]
    • 한간이 그린 조야백은 현종황제가 탔던 명마 중 하나이다. 한간은 막 끌어온 사나운 준마를 굴레와 고삐로 조여놓은 모습을 생생하게 그렸다. 또한 조야백의 성난 눈과 입을 벌린 채 더운 김을 몰아내며 솟구치려는 듯 네 발로 땅을 쳐올리는 모습을 현실감있게 그렸다. 이에 더불어 조야백의 살아있는 생기와 근육들의 긴장감, 마치 들릴 듯한 울음까지도 그림으로 담았다.[14][15]
    • 《조야백도照夜白圖》를 보면 말의 꼬리가 없다. 이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데, 가장 설득력있는 주장은 한간이 일부러 꼬리를 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당나라는 혼란상황에 빠졌었다. 이에 관해 이백과 두보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시로 풍자를 남겨놓았다. 한간 역시 이와 같은 맥락으로 흥성하던 당이 쇠락하는 모습을 말의 꼬리를 생략해 성두쇠미(盛頭衰尾)로 그려놓았다는 것이다.[16][17]
    • 《조야백도照夜白圖》는 현재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위치해있다.[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