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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B%8B%B9_%EC%9D%98%EC%A2%85'''당 의종'''(唐 懿宗, 833년 ~ 873년)]은 당나라의 18번째 황제로, 본명은 '''이최'''(李漼)이다. 그는 859년부터 873년까지 14년간 재위했으며, 당나라의 쇠퇴가 가속화되는 시기에 집권한 황제였다. 의종의 재위 기간 동안 국가는 정치적 혼란과 부패, 외세의 침입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그의 통치력 부족이 문제를 악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 [https://ko.wikipedia.org/wiki/%EB%8B%B9_%EC%9D%98%EC%A2%85'''당 의종'''(唐 懿宗, 833년 ~ 873년)]은 당나라의 18번째 황제로, 본명은 '''이최'''(李漼)이다. 그는 859년부터 873년까지 14년간 재위했으며, 당나라의 쇠퇴가 가속화되는 시기에 집권한 황제였다. 의종의 재위 기간 동안 국가는 정치적 혼란과 부패, 외세의 침입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그의 통치력 부족이 문제를 악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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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의종은 당나라 황제 [https://ko.wikipedia.org/wiki/%EB%8B%B9_%EC%84%A0%EC%A2%85'''선종'''(宣宗)]의 | + | 의종은 당나라 황제 [https://ko.wikipedia.org/wiki/%EB%8B%B9_%EC%84%A0%EC%A2%85'''선종'''(宣宗)]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초명은 온(溫)으로 운왕(鄆王)에 봉해졌다. 그에 대해서는 "그릇이 침착하고 중후했으며 생김새가 괴위했다(器度沈厚,形貌瑰偉)"고 전하는 와중에 "음률에 뛰어났는데 천종(天縱)과도 같았다(洞曉音律,猶如天縱)"고 전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정치보다는 종교와 오락에 더 깊은 관심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특히 그는 불교에 심취했으며, 재위 이후에도 불교 사원에 많은 기부를 하고 사찰 건설에 큰 관심을 보였다.<br/> |
| − | 선종의 장남이었지만 무능했기에 기왕 | + | 선종의 장남이었지만 무능했기에 기왕 이자(넷째 아들)가 후계자였지만 좌군중위 왕종실(환관)이 쿠데타를 옹립해서 즉위했다. |
=== 즉위와 초기 통치 === | === 즉위와 초기 통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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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고위 관리들은 권력을 세습하며 자신의 이익을 챙겼고, 백성들은 과도한 세금 부담에 시달렸다. 그 결과, 여러 지방에서 민란과 반란이 발생했다. 특히 874년에 시작된 | 당시 고위 관리들은 권력을 세습하며 자신의 이익을 챙겼고, 백성들은 과도한 세금 부담에 시달렸다. 그 결과, 여러 지방에서 민란과 반란이 발생했다. 특히 874년에 시작된 | ||
[https://ko.wikipedia.org/wiki/%ED%99%A9%EC%86%8C%EC%9D%98_%EB%82%9C '''황소의 난(黃巢之亂)''']은 의종 사후 당나라 멸망을 가속화시켰다. | [https://ko.wikipedia.org/wiki/%ED%99%A9%EC%86%8C%EC%9D%98_%EB%82%9C '''황소의 난(黃巢之亂)''']은 의종 사후 당나라 멸망을 가속화시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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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 후원과 사치 === | === 불교 후원과 사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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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종은 873년 41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그의 사망 이후 당나라의 쇠퇴는 가속화되었다. 의종의 통치는 부패와 혼란 속에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한 실패한 통치로 평가받는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사회적 불만과 경제적 어려움이 커졌고, 결국 '''황소의 난'''으로 이어져 당나라의 멸망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 의종은 873년 41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그의 사망 이후 당나라의 쇠퇴는 가속화되었다. 의종의 통치는 부패와 혼란 속에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한 실패한 통치로 평가받는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사회적 불만과 경제적 어려움이 커졌고, 결국 '''황소의 난'''으로 이어져 당나라의 멸망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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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부처의 진신사리이다.</blockquote> | ||
| − | + | ===사건 배경=== | |
| − | + | 불교는 황실과 결부되어 있었으며, 황제의 권위를 신성하게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도 하지만 의종은 자신이 갈수록 몸이 쇠약해져 '영불골'을 통해 장수를 기원하려는 의도에서 부처의 진신사리(佛骨)를 수도인 [https://ko.wikipedia.org/wiki/%EC%9E%A5%EC%95%88 장안]으로 모셔오는 의식을 기획했습니다. <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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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사건 전개=== | ||
| + | 의종은 咸通 8년(867년) 대규모 불교 의식을 계획하고, 부처의 사리를 수도 장안(오늘날의 시안)으로 모셔왔습니다. 이 행사는 막대한 국가 재정이 투입된 대규모 불교 행사로, 대신들이 반대했으나 의종이 말하기에: ”佛骨者,天下圣物,朕生得见之,死而无恨矣!”<br/> | ||
| + | 결국에 의종을 막지 못하고 수많은 인력이 동원되어 사리 환영 행사가 성대하게 치러졌으며, 전국적인 불교 신자의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br/> | ||
| + | ===사건의 영향=== | ||
| + | 이 행사는 불교 신도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었으나, 사회적 반발도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당나라 말기에는 재정이 악화되고 사회 불안이 고조되었으며, 이와 같은 대규모 불교 행사는 사치스러운 낭비로 여겨졌습니다. 특히 유교 관료들과 불교에 비판적이었던 지식인들은 의종의 정책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br/> | ||
| + | 그 결과 **한유(韓愈)**와 같은 유학자들은 황제가 지나치게 불교에 경도되는 것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며, 왕실의 행사를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이는 당시 유교와 불교 사이의 갈등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습니다. | ||
| − | + | ===사건 이후=== | |
| − | + | '영불골'은 결국 의종의 장수 소원을 달성하지 못하고 수개월 후 병사했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 불골을 영접하는 활동으로 조정은 끊임없이 백성을 착취하고 농민 봉기를 계속하여 번진을 할거하였으며, 나라의 재정을 악화되어 사회적으로 엄청난 혼란을 초래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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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논문== | ||
| + | 唐懿宗咸通政局研究-赵光义 | ||
| + | 唐咸通时代奢侈风气述论-贾宪保 | ||
2024년 10월 21일 (월) 14:12 기준 최신판
중어중문학과 호훤영
목차
Contents
연구배경
현재 우리나라의 정치 상황을 돌아보며 깊이 고민해본 결과,
만약 내가 통치자라면 어떻게 해야 나라를 잘 이끌 수 있을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당나라 황제들 중에서 가장 정치적으로 실패한 인물인 의종을 선택하게 되었는데,
그의 정치적 실책을 분석함으로써 올바른 국정 운영의 길을 배우고자 하는 뜻에서 이 인물을 선택하게 됐습니다.
연구목적
실패한 황제의 역사적 교훈을 바탕으로,
우리 국민들이 국가 정책에 대한 관심과 문제의식을 갖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는 단순한 비판을 넘어, 리더십의 본질과 중요성에 대한 깊은 인식을 확산시키고,
정책에 대한 대중의 이해를 심화시켜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습니다.
각 정당에서는 정책 제안을 담은 QR 코드를 제공하고 있으니,
필요한 경우 유익한 사회의 개혁정책 및 발전방향을 제시하여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데 더 많은 사람이 (특히 젊은이들) 기여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연구내용
당 의종의 생애
당 의종(唐 懿宗, 833년 ~ 873년)은 당나라의 18번째 황제로, 본명은 이최(李漼)이다. 그는 859년부터 873년까지 14년간 재위했으며, 당나라의 쇠퇴가 가속화되는 시기에 집권한 황제였다. 의종의 재위 기간 동안 국가는 정치적 혼란과 부패, 외세의 침입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그의 통치력 부족이 문제를 악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생애
의종은 당나라 황제 선종(宣宗)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초명은 온(溫)으로 운왕(鄆王)에 봉해졌다. 그에 대해서는 "그릇이 침착하고 중후했으며 생김새가 괴위했다(器度沈厚,形貌瑰偉)"고 전하는 와중에 "음률에 뛰어났는데 천종(天縱)과도 같았다(洞曉音律,猶如天縱)"고 전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정치보다는 종교와 오락에 더 깊은 관심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특히 그는 불교에 심취했으며, 재위 이후에도 불교 사원에 많은 기부를 하고 사찰 건설에 큰 관심을 보였다.
선종의 장남이었지만 무능했기에 기왕 이자(넷째 아들)가 후계자였지만 좌군중위 왕종실(환관)이 쿠데타를 옹립해서 즉위했다.
즉위와 초기 통치
859년, 아버지 선종이 사망하자 의종은 26세에 즉위했다. 즉위 초기에는 왕위 승계 과정에서 큰 정치적 혼란이 없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의종의 통치력 부족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는 정치를 대신들에게 많이 위임했으며, 특히 의종 재위 동안 21명의宰相(재상)이 임명되었으나, 의종이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음에 따라 재상들은 막대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재상들은 무능하거나 탐욕스러운 인물들이었다. 예를 들어, 두성(杜审权)은 재능이 부족한 인물로 '육각시'라는 별명이 붙었다. 한편, 루얀(路岩)은 부패와 비리를 저지르며, 권력을 사사로이 사용하여 더 큰 혼란을 초래했다.자신은 불교에 몰두하고 연회를 즐기는 생활에 빠졌다. 이로 인해 중앙 정부의 권위가 약화되고, 대신들의 부패가 심화되었다.
정치적 부패와 혼란
의종 치세 동안 당나라는 내외부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의종은 궁중 생활에 몰두하며 국정 운영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대신들과 환관들이 국정을 좌우하면서 부패가 만연했다. 이로 인해 지방 군벌들이 강력해지며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었다.
당시 고위 관리들은 권력을 세습하며 자신의 이익을 챙겼고, 백성들은 과도한 세금 부담에 시달렸다. 그 결과, 여러 지방에서 민란과 반란이 발생했다. 특히 874년에 시작된 황소의 난(黃巢之亂)은 의종 사후 당나라 멸망을 가속화시켰다.
불교 후원과 사치
의종은 불교에 심취하여 대규모 사찰을 건설하고 불교 사원에 많은 기부를 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치스러운 지출은 국가 재정을 악화시켰고, 백성들에게 세금 부담을 가중시켰다. 이는 사회적 불만을 더욱 증폭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한편 불경의 대량 수요로 인쇄술의 발달을 자극해 현존하는 세계 최초의 인쇄물 중 하나가 함통 9년(868)에 판각된 금강경 권자로, 오늘날 런던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현존하는 국내 최초의 인쇄물이자 불가(佛家)의 다라니경주(陀羅尼經咒)다. 법문사 지하궁에서 발견된 '진신보살 받들기'와 '은금화이륜십이환석전' 등도 함통 시대에 만들어진 정교한 칙령이다. 의종의 불교 신앙의 절정은 헌종에 이어 법문사 불골 영봉이라는 대규모 숭불행사가 열린 것이다.
사망과 평가
의종은 873년 41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그의 사망 이후 당나라의 쇠퇴는 가속화되었다. 의종의 통치는 부패와 혼란 속에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한 실패한 통치로 평가받는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사회적 불만과 경제적 어려움이 커졌고, 결국 황소의 난으로 이어져 당나라의 멸망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영불골 사건(迎佛骨 사건)
불골이 뭘까요?
->부처의 진신사리이다.
사건 배경
불교는 황실과 결부되어 있었으며, 황제의 권위를 신성하게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도 하지만 의종은 자신이 갈수록 몸이 쇠약해져 '영불골'을 통해 장수를 기원하려는 의도에서 부처의 진신사리(佛骨)를 수도인 장안으로 모셔오는 의식을 기획했습니다.
->당당한 이유는 백성과 나라를 위해서, 실제로는 자신을 위한 것에 불과했다.
사건 전개
의종은 咸通 8년(867년) 대규모 불교 의식을 계획하고, 부처의 사리를 수도 장안(오늘날의 시안)으로 모셔왔습니다. 이 행사는 막대한 국가 재정이 투입된 대규모 불교 행사로, 대신들이 반대했으나 의종이 말하기에: ”佛骨者,天下圣物,朕生得见之,死而无恨矣!”
결국에 의종을 막지 못하고 수많은 인력이 동원되어 사리 환영 행사가 성대하게 치러졌으며, 전국적인 불교 신자의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사건의 영향
이 행사는 불교 신도들 사이에서 큰 호응을 얻었으나, 사회적 반발도 동시에 일어났습니다. 당나라 말기에는 재정이 악화되고 사회 불안이 고조되었으며, 이와 같은 대규모 불교 행사는 사치스러운 낭비로 여겨졌습니다. 특히 유교 관료들과 불교에 비판적이었던 지식인들은 의종의 정책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그 결과 **한유(韓愈)**와 같은 유학자들은 황제가 지나치게 불교에 경도되는 것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며, 왕실의 행사를 강하게 반대했습니다. 이는 당시 유교와 불교 사이의 갈등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습니다.
사건 이후
'영불골'은 결국 의종의 장수 소원을 달성하지 못하고 수개월 후 병사했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 불골을 영접하는 활동으로 조정은 끊임없이 백성을 착취하고 농민 봉기를 계속하여 번진을 할거하였으며, 나라의 재정을 악화되어 사회적으로 엄청난 혼란을 초래했다.
참고자원
| 형태 | 출처 | 링크 |
|---|---|---|
| 온라인 | 秒懂百科 | [李漼](https://baike.baidu.com/item/%E6%9D%8E%E6%BC%BC/6433650?fr=ge_ala) |
| 나무위키 | [당의종](https://namu.wiki/w/%EC%9D%98%EC%A2%85(%EB%8B%B9)) | |
| 知网 | 唐咸通时代奢侈风气述论-贾宪保 | |
| 知网 | 唐懿宗咸通政局研究-赵光义 |
Footnote
논문
唐懿宗咸通政局研究-赵光义 唐咸通时代奢侈风气述论-贾宪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