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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전쟁은 흔히 "'''일본이 청을 이긴 전쟁'''"이라는 한 문장으로만 알려져 있다. 실제로는 1885년 톈진조약 <ref>톈진조약(1885): 갑신정변 이후 청과 일본이 맺은 조약. 양국 군대의 조선 철수와, 앞으로 파병할 때 사전에 알린다는 내용이 핵심이다.</ref>, 1894년 동학농민운동과 전주화약 <ref>전주화약: 동학농민군과 조선 정부가 전주에서 맺은 휴전 약속.</ref>, 청과 일본의 파병이 차례로 쌓이며 개전에 이르렀다. 전쟁이 시작된 뒤에는 풍도, 평양, 황해, 뤼순에서 전투가 이어졌고, 결말도 시모노세키 조약, 삼국간섭 <ref>삼국간섭: 러시아, 독일, 프랑스가 일본에 랴오둥반도를 청에 돌려주라고 권고한 사건. 이 데이터에서는 러시아만 노드로 두었다.</ref>, 요동환부조약 <ref>요동환부조약: 일본이 랴오둥반도를 청에 돌려주기로 한 조약. 청은 반환 대가를 일본에 지불했다.</ref>으로 여러 단계를 거쳤다. 이 흐름에는 이홍장, 이토 히로부미 등 여러 인물이 얽혀 있어서, 서술을 읽는 것만으로는 사건의 선후와 인과를 한눈에 파악하기 어렵다. 이에 데이터화하여 시각적으로 이해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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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전쟁은 흔히 "'''일본이 청을 이긴 전쟁'''"이라는 한 문장으로만 알려져 있다. 실제로는 1885년 톈진조약 <ref>톈진조약(1885): 갑신정변 이후 청과 일본이 맺은 조약. 양국 군대의 조선 철수와, 앞으로 파병할 때 사전에 알린다는 내용이 핵심이다.</ref>, 1894년 동학농민운동과 전주화약 <ref>전주화약: 동학농민군과 조선 정부가 전주에서 맺은 휴전 약속.</ref>, 청과 일본의 파병이 차례로 쌓이며 개전에 이르렀다. 전쟁이 시작된 뒤에는 풍도, 평양, 황해, 뤼순에서 전투가 이어졌고, 결말도 시모노세키 조약, 삼국간섭 <ref>삼국간섭: 러시아, 독일, 프랑스가 일본에 랴오둥반도를 청에 돌려주라고 권고한 사건. 이 데이터에서는 러시아만 노드로 두었다.</ref>, 요동환부조약 <ref>요동환부조약: 일본이 랴오둥반도를 청에 돌려주기로 한 조약. 청은 반환 대가를 일본에 지불했다.</ref>으로 여러 단계를 거쳤다. 이 흐름에는 이홍장, 이토 히로부미 등 여러 인물이 얽혀 있어서, 서술을 읽는 것만으로는 사건의 선후와 인과를 한눈에 파악하기 어렵다. 이에 데이터화하여 시각적으로 이해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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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g>1. 배경 (1884년~1894년)</b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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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g>'''1. 배경 (1884년~1894년)'''</b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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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갑신정변과 톈진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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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size="3"><span style="background:Lavender">1-1. 갑신정변과 톈진조약</span><br/>
 
  조선을 둘러싼 청과 일본의 대립은 1884년 12월 4일의 갑신정변에서 군사 충돌 직전까지 번졌다.정변은 일본의 지원을 기대한 개화파가 일으켰으나,
 
  조선을 둘러싼 청과 일본의 대립은 1884년 12월 4일의 갑신정변에서 군사 충돌 직전까지 번졌다.정변은 일본의 지원을 기대한 개화파가 일으켰으나,
 
  위안스카이가 이끈 청군이 개입해 사흘 만에 진압되었다. 이 충돌 이후 두 나라는 협상에 나섰고, 1885년 4월 18일 톈진에서 이토 히로부미와 이홍장이
 
  위안스카이가 이끈 청군이 개입해 사흘 만에 진압되었다. 이 충돌 이후 두 나라는 협상에 나섰고, 1885년 4월 18일 톈진에서 이토 히로부미와 이홍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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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동학농민운동과 전주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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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size="3"><span style="background:Lavender">1-2. 동학농민운동과 전주화약</span><br/>
 
1894년 초 고부에서 시작된 동학농민운동은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이 전라도 일대를 장악하면서 커졌다. 농민군이 전주까지 점령하자 조선 정부는
 
1894년 초 고부에서 시작된 동학농민운동은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이 전라도 일대를 장악하면서 커졌다. 농민군이 전주까지 점령하자 조선 정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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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분으로 내세우며 군대를 철수하지 않았다. 동학농민운동이라는 내부 사건이 청일 양국의 군사 대치로 바뀐 것이 이 단계의 핵심이다.
 
명분으로 내세우며 군대를 철수하지 않았다. 동학농민운동이라는 내부 사건이 청일 양국의 군사 대치로 바뀐 것이 이 단계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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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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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size="3"><span style="background:Lavender">1-3.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span><br/>
 
  전주화약 42일 뒤인 7월 23일, 일본군이 한성의 경복궁을 점령했다. 오시마 요시마사가 한밤에 출동 명령을 내리자 서울과 의주, 서울과 인천 사이의
 
  전주화약 42일 뒤인 7월 23일, 일본군이 한성의 경복궁을 점령했다. 오시마 요시마사가 한밤에 출동 명령을 내리자 서울과 의주, 서울과 인천 사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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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g>2. 전개(1894년 7월~1895년 2월)</b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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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g>'''2. 전개(1894년 7월~1895년 2월)'''</b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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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풍도 해전과 선전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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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size="3"><span style="background:Lavender">2-1. 풍도 해전과 선전포고</span><br/>
 
  7월 25일 아산만 앞 풍도 앞바다에서 일본 함대가 청 함선을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이 청 함대의 고승호를 격심시켰다.
 
  7월 25일 아산만 앞 풍도 앞바다에서 일본 함대가 청 함선을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이 청 함대의 고승호를 격심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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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에서 풍도해전은 경복궁 점령과 "bring about:초래하다" 관계로 이어진다. 경복궁 점령 이틀 뒤에 풍도해전이 일어났다는 시간 간격이 두 사건의 연결을 보여준다.)
 
(데이터에서 풍도해전은 경복궁 점령과 "bring about:초래하다" 관계로 이어진다. 경복궁 점령 이틀 뒤에 풍도해전이 일어났다는 시간 간격이 두 사건의 연결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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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평양 전투와 황해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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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size="3"><span style="background:Lavender">2-2. 평양 전투와 황해 해전</span><br/>
  
 
  9월 15일 평양 전투에서 일본군은 평양에 주둔한 청군을 격파했다. 청군은 압록강 북쪽으로 물러났고, 이로써 한반도에 청의 군사력은 사실상 남지 않았다.  
 
  9월 15일 평양 전투에서 일본군은 평양에 주둔한 청군을 격파했다. 청군은 압록강 북쪽으로 물러났고, 이로써 한반도에 청의 군사력은 사실상 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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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 뒤인 9월 17일에는 압록강 하구 앞 황해에서 황해 해전이 벌어졌다. 일본 연합함대는 이토 스케유키가, 청의 북양함대는 정여창이 지휘했다.
 
이틀 뒤인 9월 17일에는 압록강 하구 앞 황해에서 황해 해전이 벌어졌다. 일본 연합함대는 이토 스케유키가, 청의 북양함대는 정여창이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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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전투는 청일전쟁 최대의 해전이었고, 북양함대는 주력 함성 10척 가운데 5척을 잃었다. 살아남은 함선은 뤼순과 웨이하이로 물러났다. 이 단계 이후 전쟁은 한반도를 벗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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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전투는 청일전쟁 최대의 해전이었고, 북양함대는 주력 함성 10척 가운데 5척을 잃었다. 살아남은 함선은 뤼순과 웨이하이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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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계 이후 전쟁은 한반도를 벗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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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뤼순 점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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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size="3"><span style="background:Lavender">2-3. 뤼순 점령</span><br/>
  
 
  10월 말 일본 제 1군이 압록강을 건너 청의 영토로 돌아갔고, 제 2군은 랴오둥반도에 상륙해 뤼순으로 진격했다. 11월 21일 일본군은 뤼순을 점령했다.
 
  10월 말 일본 제 1군이 압록강을 건너 청의 영토로 돌아갔고, 제 2군은 랴오둥반도에 상륙해 뤼순으로 진격했다. 11월 21일 일본군은 뤼순을 점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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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g>3. 결말 (1895년 3월~11월)</b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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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g>'''3. 결말 (1895년 3월~11월)'''</b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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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시모노세키 회담과 이홍장 피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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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size="3"><span style="background:Lavender">3-1. 시모노세키 회담과 이홍장 피격</span><br/>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기울었고, 청은 이홍장을 혐상 대표로 보냈다. 이홍장은 3월 19일 시모노세키에 도착했고, 3월 20일 슌판로에서 회담이 시작되었다.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기울었고, 청은 이홍장을 혐상 대표로 보냈다. 이홍장은 3월 19일 시모노세키에 도착했고, 3월 20일 슌판로에서 회담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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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시모노세키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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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size="3"><span style="background:Lavender">3-2. '''시모노세키 조약'''</span><br/>
 
  4월 17일, 피격으로부터 24일 뒤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4월 17일, 피격으로부터 24일 뒤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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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삼국간섭과 요동환부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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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size="3"><span style="background:Lavender">3-3. 삼국간섭과 요동환부조약</span><br/>
 
  조약이 체결된 지 며칠 뒤인 4월 23일, 러시아·독일·프랑스가 일본에 랴오둥반도를 차지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조약이 체결된 지 며칠 뒤인 4월 23일, 러시아·독일·프랑스가 일본에 랴오둥반도를 차지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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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결과와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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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size="3"><span style="background:Lavender">3-4. 결과와 영향</span><br/>
 
  •청: 조약은 청 안에서 국가적 굴욕으로 받아들여졌고 왕조에 대한 지지를 약화시켰다.  
 
  •청: 조약은 청 안에서 국가적 굴욕으로 받아들여졌고 왕조에 대한 지지를 약화시켰다.  
 
  •조선: 조약상으로는 독립이 인정되었으나, 전쟁 내내 전장이었고 일본군이 궁궐까지 점령한 상태에서 맞은 독립이었다.
 
  •조선: 조약상으로는 독립이 인정되었으나, 전쟁 내내 전장이었고 일본군이 궁궐까지 점령한 상태에서 맞은 독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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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g>4. 인물·시간·공간·데이토로 본 종합</b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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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g>'''4. 인물·시간·공간·데이터로 본 종합'''</b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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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 이 전쟁의 인물은 역할에 따라 네 분류로 나눌 수 있다. 협상과 조약을 이끈 인물(이홍장, 이토 히로부미, 무쓰 무네미쓰, 이경방),
 
  -인물: 이 전쟁의 인물은 역할에 따라 네 분류로 나눌 수 있다. 협상과 조약을 이끈 인물(이홍장, 이토 히로부미, 무쓰 무네미쓰, 이경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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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상대편에도 이토 히로부미라는 같은 인물이 있었다.  
 
  그 상대편에도 이토 히로부미라는 같은 인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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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 전쟁이 일어난 기간 자체는 풍도해전(1894년 7월25일)부터 조약 체결(1895년 4월17일)까지 8개월 남짓으로 짧다. 이에 비해 원인은 갑신정변(1894년)부터 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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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 전쟁이 일어난 기간 자체는 풍도해전(1894년 7월25일)부터 조약 체결(1895년 4월17일)까지 8개월 남짓으로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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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비해 원인은 갑신정변(1894년)부터 쌓였다.  
  
 
사건 간격도 짧아서, 전주화약 42일 뒤에 경복궁 점령, 그 이틀 뒤에 풍도 해전이 일어났고, 평양 전투와 황해 해전도 이틀 간격이었다.
 
사건 간격도 짧아서, 전주화약 42일 뒤에 경복궁 점령, 그 이틀 뒤에 풍도 해전이 일어났고, 평양 전투와 황해 해전도 이틀 간격이었다.
  
 
  반면 요동환부조약은 삼국간섭으로부터 6개월 이상 지난 뒤였다. 이는 전쟁의 군사 단계는 빠르게, 외교적 마무리는 느리게 진행되었음을 보여준다.
 
  반면 요동환부조약은 삼국간섭으로부터 6개월 이상 지난 뒤였다. 이는 전쟁의 군사 단계는 빠르게, 외교적 마무리는 느리게 진행되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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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간: 발단은 조선 안(고부, 전주, 아산, 인천, 한성), 전개는 서해와 한반도 북부와 황해와 랴오둥반도(풍도, 평양, 황해 해양도, 뤼순),  
 
  -공간: 발단은 조선 안(고부, 전주, 아산, 인천, 한성), 전개는 서해와 한반도 북부와 황해와 랴오둥반도(풍도, 평양, 황해 해양도, 뤼순),  
  
 
결말은 일본 시모노세키와 랴오둥반도, 타이완이다. 전쟁터가 조선에서 청의 영토로, 이어서 협상 공간이 일본으로 옮겨가는 흐름이다.
 
결말은 일본 시모노세키와 랴오둥반도, 타이완이다. 전쟁터가 조선에서 청의 영토로, 이어서 협상 공간이 일본으로 옮겨가는 흐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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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이터: '''현재 데이터에서 연결이 가장 많은 노드는 청일전쟁(18)이고, 그 다음이 시모노세키 조약(10),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8)이다.  
 
  -데이터: '''현재 데이터에서 연결이 가장 많은 노드는 청일전쟁(18)이고, 그 다음이 시모노세키 조약(10),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8)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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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vention of Tientsin, 1885」, The World and Japan Database, worldjpn.net/documents/texts/pw/18850418.T1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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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톈진조약 원문(The World and Japan Datab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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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모노세키 조약 원문(The World and Japan Database), 브리태니커 백과, JACAR(일본 아시아역사자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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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청일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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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eaty of Peace (Treaty of Shimonoseki)」, The World and Japan Database, worldjpn.net/documents/texts/pw/18950417.T1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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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경향 「분통 터질 역사 소재, 여기 또 있소이다」, 한국일보 박일근 「중국인은 기억하는 아산 앞바다와 평양」, 경향신문 조운찬 「풍도에서의 하룻밤」
  
 
•JACAR(일본 아시아역사자료센터), 「17 Apr 1895 Peace treaty concluded between Japan and China」, jacar.go.jp/english/jacarbl-fsjwar-e/main/18950417/index.html
 
•JACAR(일본 아시아역사자료센터), 「17 Apr 1895 Peace treaty concluded between Japan and China」, jacar.go.jp/english/jacarbl-fsjwar-e/main/18950417/index.html

2026년 10월 21일 (수) 08:10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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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의 발단과 전개와 결말

: 인물·시간·공간·데이터를 중심으로

중어중문학과 이성민





청일전쟁

Contents


연구배경 연구목적 연구내용 연구정보 참고자원



연구배경


1894년 7월에 시작되어 1895년 4월에 끝난 청일전쟁은 동아시아 질서를 바꾼 전쟁이다. 수백 년간 이어진 중국 중심의 조공책봉체제 [1]가 무너졌고, 일본은 아시아의 새로운 강국으로 떠올랐다. 전쟁터는 조선에서 시작해 황해와 랴오둥반도로 번졌고, 결과는 조선, 청, 일본뿐 아니라 러시아까지 얽힌 국제 문제로 이어졌다.


그런데 이 전쟁은 흔히 "일본이 청을 이긴 전쟁"이라는 한 문장으로만 알려져 있다. 실제로는 1885년 톈진조약 [2], 1894년 동학농민운동과 전주화약 [3], 청과 일본의 파병이 차례로 쌓이며 개전에 이르렀다. 전쟁이 시작된 뒤에는 풍도, 평양, 황해, 뤼순에서 전투가 이어졌고, 결말도 시모노세키 조약, 삼국간섭 [4], 요동환부조약 [5]으로 여러 단계를 거쳤다. 이 흐름에는 이홍장, 이토 히로부미 등 여러 인물이 얽혀 있어서, 서술을 읽는 것만으로는 사건의 선후와 인과를 한눈에 파악하기 어렵다. 이에 데이터화하여 시각적으로 이해해 보고자 한다.



연구목적


이 연구는 청일전쟁을 발단, 전개, 결말 세 단계로 나누고, 각 단계의 사건을 인물, 시간, 공간의 세 축으로 정리해 네트워크 그래프 데이터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인물: 사건에 누가 어떤 역할로 참여했는지 정리한다. 조약을 체결한 인물(이홍장, 이토 히로부미, 무쓰 무네미쓰), 전투를 이끈 인물(이토 스케유키, 오시마 요시마사, 정여창), 피해를 입은 인물(고종, 이홍장)을 구분해서 본다.

시간: 사건의 날짜를 데이터로 붙여 사건의 순서와 인과 관계를 확인한다. 특히 1894년 6월 파병에서 7월 23일 경복궁 점령, 7월 25일 풍도 해전까지 한 달 남짓한 기간에 사건이 빠르게 이어지는 과정을 보려 한다.

공간: 사건이 일어난 장소를 지역 노드로 만들어, 전쟁터가 한성에서 평양, 황해, 뤼순을 거쳐 일본 시모노세키까지 옮겨 가는 흐름을 확인한다.

데이터: 위 세 축을 노드와 링크로 연결해서, 하나의 사건에 어떤 인물과 날짜와 장소가 묶여 있는지를 그래프로 보여 준다.


연구정보







연구내용


발단 (1884년 12월~1894년 7월)

청은 조선을 속방으로 보고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고,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내세우며 영향력을 넓히려 했다. 두 나라의 대립은 조선 안의 사건을 계기로 군사 충돌로 바뀌었다.


1. 배경 (1884년~1894년)


1-1. 갑신정변과 톈진조약

조선을 둘러싼 청과 일본의 대립은 1884년 12월 4일의 갑신정변에서 군사 충돌 직전까지 번졌다.정변은 일본의 지원을 기대한 개화파가 일으켰으나,
위안스카이가 이끈 청군이 개입해 사흘 만에 진압되었다. 이 충돌 이후 두 나라는 협상에 나섰고, 1885년 4월 18일 톈진에서 이토 히로부미와 이홍장이
톈진조약을 체결했다.


•톈진조약의 핵심

-양국은 4개월 안에 조선에 주둔한 군대를 철수하고, 청군은 마산포에서, 일본군은 인천에서 승선한다.
-양군은 조선에 군사 교관을 보내지 않는다.
- 앞으로 조선에 중대한 변란이 일어나 어느 한쪽이라도 파병해야 할 때는 상대에게 미리 서면으로 알리고, 사태가 수습되면 철수한다.

이 조항은 1894년 양국이 함께 파병하는 근거가 되었다.


1-2. 동학농민운동과 전주화약
1894년 초 고부에서 시작된 동학농민운동은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이 전라도 일대를 장악하면서 커졌다. 농민군이 전주까지 점령하자 조선 정부는

자력으로 진압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청의 위안스카이에게 원병을 요청했다. 일본은 이 요청을 파병의 기회로 삼아 6월 초 참모본부 안에 대본영을
설치하고, 공사관과 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오시마 요시마사 소장이 이끄는 혼성여단을 조선에 보냈다. 선발대는 6월9일 인천에 상륙했고, 6월 하순까지
8천여 명이 경성과 인천 사이에 집결했으며 청군 또한 아산 부근에 집결했다. 그런데 1894년 6월 11일 농민군과 조선 정부 사이에 전주화약이 맺어졌다.
농민군이 자진 해산하면서 외국군이 조선에 머물 명분이 사라졌고, 조정과 농민군은 청일 양국에 철군을 요청했다. 그러나 일본은 조선의 내정 개혁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군대를 철수하지 않았다. 동학농민운동이라는 내부 사건이 청일 양국의 군사 대치로 바뀐 것이 이 단계의 핵심이다.


1-3.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전주화약 42일 뒤인 7월 23일, 일본군이 한성의 경복궁을 점령했다. 오시마 요시마사가 한밤에 출동 명령을 내리자 서울과 의주, 서울과 인천 사이의
전신이 끊겼고, 새벽에 일본군 보병이 경복궁 서쪽 영추문에 도착해 조선군과 교전한 끝에 궁에 들어갔다. 궁 안으로 진입한 일본군은 고종과 왕비가
머무는 곳까지 수색해 들어갔다. 점령 뒤 조선 정부는 흥선대원군을 앞세운 친일 성격의 정부로 재편되었고, 이어서 갑오개혁이 시작되었다.
발단의 사건은 대부분 조선 안에서, 특히 한성에서 벌어졌다.  조선은 두 나라의 싸움터였지만 전쟁의 주체는 청과 일본이었다는 점이 이 단계의 특징이다.


2. 전개(1894년 7월~1895년 2월)


2-1. 풍도 해전과 선전포고

7월 25일 아산만 앞 풍도 앞바다에서 일본 함대가 청 함선을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이 청 함대의 고승호를 격심시켰다.
양국의 정식 선전포고는 8월1일에 있었으며 전투가 먼저 시작되고 선전포고가 뒤따랐다. 

(데이터에서 풍도해전은 경복궁 점령과 "bring about:초래하다" 관계로 이어진다. 경복궁 점령 이틀 뒤에 풍도해전이 일어났다는 시간 간격이 두 사건의 연결을 보여준다.)


2-2. 평양 전투와 황해 해전

9월 15일 평양 전투에서 일본군은 평양에 주둔한 청군을 격파했다. 청군은 압록강 북쪽으로 물러났고, 이로써 한반도에 청의 군사력은 사실상 남지 않았다. 

이틀 뒤인 9월 17일에는 압록강 하구 앞 황해에서 황해 해전이 벌어졌다. 일본 연합함대는 이토 스케유키가, 청의 북양함대는 정여창이 지휘했다.

이 전투는 청일전쟁 최대의 해전이었고, 북양함대는 주력 함성 10척 가운데 5척을 잃었다. 살아남은 함선은 뤼순과 웨이하이로 물러났다. 

이 단계 이후 전쟁은 한반도를 벗어난다.


2-3. 뤼순 점령

10월 말 일본 제 1군이 압록강을 건너 청의 영토로 돌아갔고, 제 2군은 랴오둥반도에 상륙해 뤼순으로 진격했다. 11월 21일 일본군은 뤼순을 점령했다.
이 과정에서 청의 민간인이 다수 희생된 뤼순 학살이 일어났다. 이후 북양함대의 남은 함선들은 웨이하이에서 일본의 육해군 합동 공격을 받아
최종적으로 무너졌고, 정여창도 이 때 사망했다.

(데이터에서는 황해 해전과 뤼순 점령을 "affect on"으로 연결했다. 제해권 확보가 랴오둥반도 상륙을 가능하게 했다는 해석)

이 단계의 공간은 풍도(바다), 평양, 황해 해양도 부근(바다), 뤼순이다. 서해안에서 한반도 북부로, 다시 황해야 랴오둥반도로 전장이 옮겨가는 방향이 뚜렷하다.


3. 결말 (1895년 3월~11월)


3-1. 시모노세키 회담과 이홍장 피격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기울었고, 청은 이홍장을 혐상 대표로 보냈다. 이홍장은 3월 19일 시모노세키에 도착했고, 3월 20일 슌판로에서 회담이 시작되었다.
일본 대표는 이토 히로부미와 무쓰 무네미쓰였다. 회담이 시작된 지 며칠 뒤인 3월 24일 이홍장은 길에서 고야마 도요타로의 총격을 받아 부상을 입었다.
이홍장은 치료를 위해 회담에서 잠시 빠졌고, 협상은 일시 중단되었다. 이후 다시 이어져 4월 17일에 끝났다.


3-2. 시모노세키 조약

4월 17일, 피격으로부터 24일 뒤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청은 조선의 완전한 독립과 자주를 이정한다.

-청은 랴오둥반도 남부, 타이완과 그 부속 도서, 펑후 제도를 일본에 할양한다.

-청은 일본에 배상금으로 2억 냥을 지불한다.

-청은 사시, 충칭, 쑤저우, 항저우를 일본에 개방한다.


조약 제 1조는 조선의 조공 의례를 완전히 멈추도록 명시하며 청과 조선의 조공 관계를 조약으로 끝냈다.


3-3. 삼국간섭과 요동환부조약

조약이 체결된 지 며칠 뒤인 4월 23일, 러시아·독일·프랑스가 일본에 랴오둥반도를 차지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이 권고는 군함을 일본 근해에 배치한 가운데 이루어졌다. 일본은 이를 받아들였고, 11월 8일 요동환부조약으로 랴오둥반도를 청에 돌려주었다.
대신 청은 3천만 냥을 추가로 지불했다. 삼국간섭은 일본 외교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후 일본은 유럽 열강이 다시 연합해 자국에 맞서는 일을
피하려고 외교를 조정했다. 또한 러시아는 이후 뤼순의 조치권을 얻어 랴오둥반도에서 일본을 대신하는 위치에 올랐다.


3-4. 결과와 영향

•청: 조약은 청 안에서 국가적 굴욕으로 받아들여졌고 왕조에 대한 지지를 약화시켰다. 
•조선: 조약상으로는 독립이 인정되었으나, 전쟁 내내 전장이었고 일본군이 궁궐까지 점령한 상태에서 맞은 독립이었다.
•일본: 배상금을 받고 타이완을 확보했으나, 삼국간섭으로 랴오둥반도는 돌려주어야 했다.


4. 인물·시간·공간·데이터로 본 종합


-인물: 이 전쟁의 인물은 역할에 따라 네 분류로 나눌 수 있다. 협상과 조약을 이끈 인물(이홍장, 이토 히로부미, 무쓰 무네미쓰, 이경방),
전투를 지휘한 인물(오시마 요시마사, 이토 스케유키, 정여창), 조선 내부의 인물(전봉준, 고종),
사건의 피해자이자 가해자였던 인물(이홍장과 고야마 도요타로)이다. 이홍장은 1885년 톈진조약과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에 모두 서명했고,
그 상대편에도 이토 히로부미라는 같은 인물이 있었다. 


-시간: 전쟁이 일어난 기간 자체는 풍도해전(1894년 7월25일)부터 조약 체결(1895년 4월17일)까지 8개월 남짓으로 짧다.
이에 비해 원인은 갑신정변(1894년)부터 쌓였다. 

사건 간격도 짧아서, 전주화약 42일 뒤에 경복궁 점령, 그 이틀 뒤에 풍도 해전이 일어났고, 평양 전투와 황해 해전도 이틀 간격이었다.

반면 요동환부조약은 삼국간섭으로부터 6개월 이상 지난 뒤였다. 이는 전쟁의 군사 단계는 빠르게, 외교적 마무리는 느리게 진행되었음을 보여준다.


-공간: 발단은 조선 안(고부, 전주, 아산, 인천, 한성), 전개는 서해와 한반도 북부와 황해와 랴오둥반도(풍도, 평양, 황해 해양도, 뤼순), 

결말은 일본 시모노세키와 랴오둥반도, 타이완이다. 전쟁터가 조선에서 청의 영토로, 이어서 협상 공간이 일본으로 옮겨가는 흐름이다.


-데이터: 현재 데이터에서 연결이 가장 많은 노드는 청일전쟁(18)이고, 그 다음이 시모노세키 조약(10),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8)이다. 

시모노세키 조약이 연결을 많이 가진 이유는 이 조약에 서명자, 장소, 날짜, 할양지, 이후의 삼국간섭이 한꺼번에 묶여있기 때문이다.

이는 이 조약이 결말에서 사건과 인물과 공간을 모으는 지점이라는 것을 그래프가 보여준다는 뜻이다. 일본이 청보다 연결이 많은 것은
데이터가 승리한 일본의 행위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한계이기도 하다. 





참고자원


•톈진조약 원문(The World and Japan Database)

•시모노세키 조약 원문(The World and Japan Database), 브리태니커 백과, JACAR(일본 아시아역사자료센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청일전쟁」

•주간경향 「분통 터질 역사 소재, 여기 또 있소이다」, 한국일보 박일근 「중국인은 기억하는 아산 앞바다와 평양」, 경향신문 조운찬 「풍도에서의 하룻밤」

•JACAR(일본 아시아역사자료센터), 「17 Apr 1895 Peace treaty concluded between Japan and China」, jacar.go.jp/english/jacarbl-fsjwar-e/main/18950417/index.html

•「청일전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ncykorea.aks.ac.kr/Article/E0056610

•박일근, 「중국인은 기억하는 아산 앞바다와 평양」, journalist.or.kr/ezview/article_main.html?no=34136 (2014.07.30)


주석


  1. ↑ 조공책봉체제: 중국 황제가 주변국 군주를 책봉하고 조공을 받는 동아시아의 전통적 국제 질서.
  2. ↑ 톈진조약(1885): 갑신정변 이후 청과 일본이 맺은 조약. 양국 군대의 조선 철수와, 앞으로 파병할 때 사전에 알린다는 내용이 핵심이다.
  3. ↑ 전주화약: 동학농민군과 조선 정부가 전주에서 맺은 휴전 약속.
  4. ↑ 삼국간섭: 러시아, 독일, 프랑스가 일본에 랴오둥반도를 청에 돌려주라고 권고한 사건. 이 데이터에서는 러시아만 노드로 두었다.
  5. ↑ 요동환부조약: 일본이 랴오둥반도를 청에 돌려주기로 한 조약. 청은 반환 대가를 일본에 지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