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산사건
한자 | 珍山事件 |
---|---|
지정일 | 1791 |
분류 | 시파 / 벽파 |
웹사이트 | https://namu.wiki/w/%EC%A7%84%EC%82%B0%20%EC%82%AC%EA%B1%B4 |
개요
진산사건 신해년(辛亥年)에 호남 진산군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진산사건(珍山事件)이라고도 하고 신해사옥(辛亥邪獄), 신해옥사(辛亥獄事), 호남옥사(湖南獄事)라고도 부른다. 전라도 진산군의 선비 윤지충, 권상연(윤지충의 외제)이 윤지충의 모친상을 당하여 신주를 불사르고 천주교식으로 제례(祭禮)를 지냈다는 소문이 중앙에 들어오자 조정에서는 진산군수 신사원(申史源)을 시켜 두 사람을 체포하여 심문하고 그들이 사회 도덕을 문란하게 하고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사상을 신봉하였다는 죄명을 씌워 사형에 처했다. 정조는 이 사건을 이 정도에서 끝내고 관대한 정책을 써서 가톨릭교의 교주로 지목받은 권일신을 유배시키는 것으로 그치고 더 이상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를 확대시키지 않았다.
내용
김범우의 집에서 열리던 예배가 발각되었다. 김범우가 관아에 끌려가자 그와 함께 예배를 드리던 권일신은 아들 상문과 윤하, 총억, 정섭 등과 함께 형조판서를 찾아가, 압수한 성상(聖像)을 돌려주고 자신들도 김범우와 같은 천주교인이므로 처벌해 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형조판서는 그들이 마음대로 처벌할 수 없는 양반임을 알고 회유하여 돌려보냈다.
베이징의 주교가 조선교회에 제사를 지내지 말 것을 요구하였다. 조선사회는 유교사회로서, 백성들로써는 지키기 힘든 요구를 해온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신자들은 이를 지키기 시작하였다.
조상을 모시던 신주를 모두 불태우더니, 제사를 거행하지 않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한편, 당시 주교로서 신자들을 통솔하던 권일신은 교황이 임명하지 않으면 주교가 될 수 없다는 베이징 주교의 말에 순종하여 평신도가 되어 포교에 힘썼다.
베이징 주교의 요구에 따라 진산의 선비 권상윤은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신주를 불태우고 같은 마을에 사는 윤지충도 신주는 태우지 못했지만 제례의식을 폐하였다.
이러한 소문은 주변의 선비들에게 번져나가고, 조정에까지 그 소식이 전달되었다. 이에 따라 이른바 ‘진산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두 사람에 대한 소문은 확대되어 윤지충이 어머니의 시신을 내버렸다고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이들의 처단에 대한 논란이 벌어지게 되었다. 주로 논쟁은 천주교를 묵인하자는 체제공과 탄압하자는 홍낙안을 중심으로 이루어 졌다.
정조는 천주교로 인해 조정이 혼란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아 미온책을 펼쳤다. 그리고 이들에게 사회도덕을 문란하게 하고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사상을 신봉했다는 죄명으로 사형에 처하였다. 이승훈은 서학서적을 발간했다는 탄핵을 받고 관직을 삭탈당하고 투옥되었다. 정조는 “이제 사학의 일을 모두 결말지었다”면서 진산사건을 서둘러 마무리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어머니의 시신을 내버렸다는 진산사건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조선시대 유배문화), 2005., 한국콘텐츠진흥원)
미디어 자료
- 조선 역사상 최초의 종교 탄압, 기독교 박해 사건 (조선왕조실록)
지식 관계망
중심요소
ID | Class | Label |
---|---|---|
조선_정조 | Actor | 조선_정조(正祖,_1752~1800) |
윤지충 | Actor | 윤지충(尹持忠,_1759-1791) |
권상연 | Actor | 권상연(權尙然,_1751-1791) |
신유박해 | Event | 신유박해(辛酉迫害) |
진산사건 | Event | 진산사건(珍山事件) |
치제문 | Record | 치제문(致祭文)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