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제2-김윤진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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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림외대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1년 4월 25일 (일) 11:15 판 (안동_임청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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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_임청각

임청각은 조선 전기의 문신인 이명(李洺)이 1515년에 지은 집이다.

临清阁是在1515年朝鲜前期的文臣李洺(没有生没年度)建造的房屋。

이명의 할아버지 이원(李原, 1368~1429)은 조선 초 태종이 왕자의 난을 평정하고 왕위에 오르는 데 협력하여 공신이 되었으며 세종 때 좌의정을 지냈다. 이러한 선조의 공훈을 인정받아 이명은 과거를 거치지 않고 관직에 나갔으며, 갑자사화 당시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이 즉위한 이후 풀려나 의흥(지금의 군위 지역)의 지방관을 지냈다. 벼슬하는 동안에는 어진 사람으로 이름이 높았고, 이후 고향인 안동으로 돌아가 임청각을 짓고 풍류를 즐겼다.

李洺的爷爷李原(1368-1429)在朝鲜初期太宗平定了王子之乱之后登基时,他曾经协助太宗就成为功臣,并他在世宗时期担任左议政。这些祖先的功勋得到认可,李洺不经过科举直接进入官场担任官职。他在甲子士祸时被流放,至1506年中宗即位后才能够被释放,并担任义兴(现在是庆尚北道军威郡地区)的地方官。 在任职时,他为人仁者驰名遐迩,此后回到故乡安东建造临清阁,享受风流。

임청각은 이명의 후손인 독립운동가 이상룡(李相龍, 1858~1932)의 생가로도 유명하다. 이상룡은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이듬해 임청각을 팔아 독립 자금을 마련하였다. 만주로 가서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평생 독립 투쟁을 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지내기도 했다.

临清阁也是李洺的后代、独立运动人士李相龙(1858-1932年)的故居。李相龙在1910年被日本剥夺国家主权后隔年,出售临清阁筹集了独立运动的资金,到满洲去建立了新兴武官学校。之后他将毕生精力奉献给了独立斗争,还担任过大韩民国临时政府的首任国务令。

임청각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살림집 가운데 가장 오래된 집이다. 안채와 중채, 사랑채, 행랑채, 사당, 별당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원래는 99칸의 대저택이었다고 하나, 1942년 일제가 불온한 조선 사람이 다수 출생한 집이라하여 임청각 마당을 가로질러 중앙선 철로를 놓는 바람에 규모가 줄어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웅장한 사대부 집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临清阁是韩国现有的住宅中最古老的房子。由堂屋、中屋、舍廊房、厢房、舍堂以及别堂等组成。 听说这栋住宅原来是99间的豪宅,但1942年日本帝国主义认为在这个住宅里多出生了抗日的朝鲜人士,所以横穿临清阁的院落铺设中央线铁路,结果临清阁的规模逐渐缩小了。但是我们仍然可以看到雄伟的士大夫住宅的面貌。

임청각은 중국 시인 도연명(陶淵明, 365~427)의 「귀거래사(歸去來辭)」 가운데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기도 하노라”는 구절에서 글자를 따온 것이다. 이웃한 도산서원에 머물던 이황(李滉, 1502~1570)이 현판의 글씨를 직접 썼다.

临清阁取自中国诗人陶渊明(365~427年)的《归去来辞》中“登东皋以舒啸,临清流而诗”的诗句。住在相邻的陶山书院的李滉(1502-1570年)亲自题写了匾额上的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