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부도사가 세 번이나 다녀간 마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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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태사(김선평, 장정, 권행) –> 안동 권씨 시조 –> 10世 때 분파(分派 ; 복야공파 / 부호장공파) –> 가일마을(가일 권씨) : 입향조 권항 – 처가인 문화류씨의 세거지에 정착함 | *삼태사(김선평, 장정, 권행) –> 안동 권씨 시조 –> 10世 때 분파(分派 ; 복야공파 / 부호장공파) –> 가일마을(가일 권씨) : 입향조 권항 – 처가인 문화류씨의 세거지에 정착함 | ||
*가족은 예천으로 떠나는 등 '7대 동안 금부도사가 세 번 찾아온 영남의 유일한 집'으로 알려져 있다. 갑자사화에 휘말린 권주,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21세 권전, 1728년 이인좌의 난 때 27세 권구에게 각각 금부도사가 찾아왔던 것. | *가족은 예천으로 떠나는 등 '7대 동안 금부도사가 세 번 찾아온 영남의 유일한 집'으로 알려져 있다. 갑자사화에 휘말린 권주,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21세 권전, 1728년 이인좌의 난 때 27세 권구에게 각각 금부도사가 찾아왔던 것. | ||
*가일마을은 세계문화유산 하회마을로 향하는 초입에 있으면서도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마을 입구에는 커다란 연못 가곡지가 자리 잡고 있고, 마을 뒤로는 정산(井山)이 학의 형상을 하고 마을을 품고 있다. | *가일마을은 세계문화유산 하회마을로 향하는 초입에 있으면서도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마을 입구에는 커다란 연못 가곡지가 자리 잡고 있고, 마을 뒤로는 정산(井山)이 학의 형상을 하고 마을을 품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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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용== | ||
+ | ===화산 권주와 기묘사화=== | ||
+ | 권주(權柱, 1457~1505)는 1481년 문과에 급제해 경상도 관찰사 등 여러 관직을 역임했으나, 연산군 10년(1504)에 일어난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했다.<br/> | ||
+ |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는 조선의 10개 임금 연산군(燕山君, 재위 1494∼1506)의 생모 윤씨의 폐비 과정에 연루된 이들이 죽임을 당한 사건이다. 권주는 1482년(성종 13) 당시 연산군 생모인 폐비 윤씨(尹氏)의 사사(賜死) 때에 승정원 주서로 사약을 들고 갔다는 이유로 파직되어 평해(平海 : 현 경상북도 울진군(蔚珍郡)로 귀양갔다가, 결국 이듬해에 사약을 받고 죽었다. 권주가 죽자 정부인 고성 이씨는 자결하였다.<br/> | ||
+ | 2년 후인 1506년 반정을 통해 중종이 왕위에 올랐고, 그 해 9월 신원되어 관직과 가산을 돌려받았으며, 11월에는 장례를 치르도록 허용되었다.<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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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주 관련 유적 | ||
+ | 신도비란 임금이나 벼슬이 높은 사람의 일생과 업적을 기록하여 세우는 비석으로, 대개 무덤 앞이나 무덤의 남동쪽에 세운다. 신도(神道)는 신(神)이 묘역에 이르는 길을 뜻한다. 화산 신도비는 숙종 37년(1711)에 세워졌다. 비문은 이현일(李玄逸, 1627~1704)이 지었고, 글씨는 이유(李濰, 1669~1742)가 썼다. 비석은 넓은 사각형 받침돌과 몸돌, 구름과 용으로 장식된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체 높이는 1.45m이다. 비석을 보호하고 있는 비각은 1981년에 지어졌다. (이미지 / 관련 링크) <br/> | ||
+ | 신도비 왼편에 있는 선원강당은 권주가 공부하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해 그의 후손들이 지었다. 언제 처음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고, 조선 헌종(憲宗) 9년(1843)에 다시 지어졌다고 전한다. 중앙에 대청을 두고 좌우를 온돌방으로 꾸민 강당과 ‘ㄴ’자형으로 지어진 대문채로 이루어져 있다.(이미지 / 관련 링크) <br/> | ||
+ | 마을 중앙에 자리한 ‘병곡고택’은 본래 권주가 살던 집이다. 두 차례의 사화로 가문의 가세가 기울면서 빈 집으로 남아 쇠락했던 것을 그의 후손 권구(權渠, 1672~1749)가 가일마을로 다시 입향한 아버지 권징을 따라 마을에 정착한 후 수리해 종택으로 삼아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미지 / 관련 링크) <br/> | ||
+ | 권주와 부인 고성이씨의 묘는 신도비와 선원강당 뒤편 언덕에 있다. 앞에 있는 것이 부인의 묘이고 뒤에 있는 것이 권주의 묘이다. (이곳은 2016년 경북도청 신청사를 건립할 당시 공원 조성계획에 의해 이장될 위기에 처했었다. 그러나 묘역 앞 신도비와 강당이 연계유적으로 가치가 있다는 의견에 따라 그대로 보전되었다.) (이미지 / 관련 링크) <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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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주의 네 아들 : 권질 ‧ 권전 ‧ 권굉=== | ||
+ | #맞아들 권질과 퇴계 이황 : 권질은 1504년 아버지 권주가 기묘사화에 연루되었을 때 고문을 받은 후 거제도로 유배되었다가 2년 후 중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 풀려났다. 그러나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에 다시 연루되어 예안현(禮安縣: 현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으로 유배되었다. <br/> 1538년 유배에서 풀려났으며 이듬해 고신(告身)을 되돌려 받았으나 1545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br/> 권질은 권질은 딸만 여럿 있었는데, 이 중 딸 한 명이 퇴계 이황의 둘째 부인이 됐다. 그는 예안으로 유배되었을 당시 퇴계 이황을 불러 자신의 딸을 맡아줄 것을 부탁하였다. 권질의 딸은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상태였지만 이황은 권씨를 부인으로 맞이했고, 죽은 이후 시묘살이까지 하며 부부의 예를 다했다. 권질은 이황에 대한 고마운 마음으로 사위가 자신을 위해 지은 ‘사락정’이라는 건물의 이름을 자신의 호로 삼기도 했다. (권질- 이황 /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761342.html)<br/> | ||
+ | #둘째 아들 권전과 기묘사화 | ||
+ | #막내아들 권굉이 이은 가문의 명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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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일마을로 돌아오다 : 병곡 권구와 수곡 권보=== | ||
+ | *가일마을을 떠난 권경행, 다시 돌아온 권징 | ||
+ | *[종가] 38.가일마을 안동 권씨, 경북일보, 2016.12.18.https://www.kyongbuk.co.kr/news/articleView.html?idxno=979709 -> 권주의 넷째 아들인 권굉(1494~?)이 가계를 계승했고 권굉 역시 차남인 권의남, 그의 아들인 권호연의 손자인 권경행으로 가계를 이어왔다. 권경행 대에 와서는 외가인 예천 용궁면 오룡리로 이주해 살다가 손자인 권징(1636~1698) 에 이르러 다시 가일 마을로 돌아왔다. / 권징의 아들인 병곡 권구(1672~1749)는 갈암 이현일(1627~1704)의 제자로 당시 안동의 대표적인 학자로 명성을 떨쳤다. 가일 안동 권씨 가문의 위상을 드높인 이가 권구였다. 1728년 ‘이인좌의 난’으로 고초를 겪은 이후에는 은거하며 후학 양성에만 몰두했다. 사후에 사헌부지평에 증직되었고 이조판서에 추증됐다.<br/> | ||
+ | *병곡 권구와 이인좌의 난 : 병곡 권구(屛谷 權渠, 1672~1749)는 서애 류성룡과 갈암 이현일의 학맥을 계승한 안동 지역의 대표적인 학자였다. 그는 가일마을로 다시 입향한 아버지 권징이 마을에 정착한 후 이곳에서 태어났다.<br/> | ||
+ | 1728년 이인좌의 난으로 누명을 쓴 후 고향에서 머무르며 학문탐구와 후진양성에 진력해 수많은 문인을 배출하기도 했다. 철종 10년에 사헌부지평으로 증직됐으며 사림에 의해 불천위로 모셔졌다.<br/> | ||
+ | *권구의 세 아들 : 권집과 권집, 권보 : 권보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에서 학문에 전념하면서 부모를 극진히 모셨다.<br/> | ||
+ | *마을 내 관련 유적 | ||
+ | 권구는 자신의 선조 권주(1457-1505)가 살던 집을 수리해 종택으로 삼았다. 종택이란 한 집안의 종가가 대를 이어 사는 살림집으로, 권구의 종택은 그의 호를 따 ‘병곡 종택’으로 불린다. 병곡 종택은 권구 이후 지금까지 양자(養子)를 들이지 않고 '종자종손'(宗子宗孫)으로 종택을 지켜온 보기 드문 집이며, ‘시습재’라는 현판이 걸린 사랑채로도 유명하다. ‘시습’은『논어』의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不亦說乎)’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2011년 대청을 중건하였다.<br/> | ||
+ | 종택에서 경북도청 신청사 방향으로 길을 따라 가다보면 노동서사와 노동재사가 나온다. 노동서사는 영조 46년(1770)에 권구의 덕을 기리며 지역 주민들이 세웠다. 사당이 없기 때문에 ‘서원’이 아닌 ‘서사’로 불린다고 한다(https://blog.daum.net/elegant0302/2181) 후에 후손이자 독립운동가인 권오설이 서사 건물에서 원흥의숙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br/> | ||
+ | 노동재사는 노동서사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의 숙식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되었다.(https://blog.daum.net/elegant0302/2181) 현 주인인 @@@이 매입한 후 개조해 @@@부터 독립책방인 ‘가일서가’로 운영하고 있다. | ||
+ | (노동서사, 두산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076639&cid=40942&categoryId=37713 / 노동서사, 숙박 관련 https://www.kozaza.com/rooms/1002934 / 가일서가 https://m.blog.naver.com/andongcity00/221671949116)<br/> | ||
+ | 병곡고택 동편에는 ‘수곡고택’이 있다. 이 집은 권보를 기리기 위해 후손 권조를 비롯한 안동권씨 후손들이 1792년에 지은 것이다. 집은 대문채, 사랑채, 안채, 별당,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랑채에는 화려한 팔작지붕이 아닌 소박한 양식의 맞배지붕을 두어서, 평생 검소하게 생활한 권보의 정신을 지키고자 하였다. 별당인 일지재는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을 위해 건립한 것이다. <br/> | ||
+ | 수곡고택은 독립운동 군자금을 모금했던 우암 권준희 선생과 그의 손자로 역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권오상 선생의 생가이기도 하다. / 1990년부터 3년에 걸쳐 별당과 안채 건물을 보수했다.(https://blog.daum.net/elegant0302/218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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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자료== | ||
+ | *[古宅은 살아있다] <14>안동 풍천면 안동 권씨 가일마을, 매일신문, 2012.4.4. http://news.imaeil.com/NewestAll/2012040407305011347 | ||
==관련 문화재== | ==관련 문화재== |
2021년 6월 7일 (월) 14:52 판
- 화산 권주(갑자사화), 사락정 권질 ‧ 권전(기묘사화) ‧ 권굉, 병곡 권구(이인좌의 난)와 수곡 권보.
목차
개요
- 삼태사(김선평, 장정, 권행) –> 안동 권씨 시조 –> 10世 때 분파(分派 ; 복야공파 / 부호장공파) –> 가일마을(가일 권씨) : 입향조 권항 – 처가인 문화류씨의 세거지에 정착함
- 가족은 예천으로 떠나는 등 '7대 동안 금부도사가 세 번 찾아온 영남의 유일한 집'으로 알려져 있다. 갑자사화에 휘말린 권주,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21세 권전, 1728년 이인좌의 난 때 27세 권구에게 각각 금부도사가 찾아왔던 것.
- 가일마을은 세계문화유산 하회마을로 향하는 초입에 있으면서도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마을 입구에는 커다란 연못 가곡지가 자리 잡고 있고, 마을 뒤로는 정산(井山)이 학의 형상을 하고 마을을 품고 있다.
내용
화산 권주와 기묘사화
권주(權柱, 1457~1505)는 1481년 문과에 급제해 경상도 관찰사 등 여러 관직을 역임했으나, 연산군 10년(1504)에 일어난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했다.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는 조선의 10개 임금 연산군(燕山君, 재위 1494∼1506)의 생모 윤씨의 폐비 과정에 연루된 이들이 죽임을 당한 사건이다. 권주는 1482년(성종 13) 당시 연산군 생모인 폐비 윤씨(尹氏)의 사사(賜死) 때에 승정원 주서로 사약을 들고 갔다는 이유로 파직되어 평해(平海 : 현 경상북도 울진군(蔚珍郡)로 귀양갔다가, 결국 이듬해에 사약을 받고 죽었다. 권주가 죽자 정부인 고성 이씨는 자결하였다.
2년 후인 1506년 반정을 통해 중종이 왕위에 올랐고, 그 해 9월 신원되어 관직과 가산을 돌려받았으며, 11월에는 장례를 치르도록 허용되었다.
- 권주 관련 유적
신도비란 임금이나 벼슬이 높은 사람의 일생과 업적을 기록하여 세우는 비석으로, 대개 무덤 앞이나 무덤의 남동쪽에 세운다. 신도(神道)는 신(神)이 묘역에 이르는 길을 뜻한다. 화산 신도비는 숙종 37년(1711)에 세워졌다. 비문은 이현일(李玄逸, 1627~1704)이 지었고, 글씨는 이유(李濰, 1669~1742)가 썼다. 비석은 넓은 사각형 받침돌과 몸돌, 구름과 용으로 장식된 머릿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체 높이는 1.45m이다. 비석을 보호하고 있는 비각은 1981년에 지어졌다. (이미지 / 관련 링크)
신도비 왼편에 있는 선원강당은 권주가 공부하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해 그의 후손들이 지었다. 언제 처음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고, 조선 헌종(憲宗) 9년(1843)에 다시 지어졌다고 전한다. 중앙에 대청을 두고 좌우를 온돌방으로 꾸민 강당과 ‘ㄴ’자형으로 지어진 대문채로 이루어져 있다.(이미지 / 관련 링크)
마을 중앙에 자리한 ‘병곡고택’은 본래 권주가 살던 집이다. 두 차례의 사화로 가문의 가세가 기울면서 빈 집으로 남아 쇠락했던 것을 그의 후손 권구(權渠, 1672~1749)가 가일마을로 다시 입향한 아버지 권징을 따라 마을에 정착한 후 수리해 종택으로 삼아 오늘날까지 이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미지 / 관련 링크)
권주와 부인 고성이씨의 묘는 신도비와 선원강당 뒤편 언덕에 있다. 앞에 있는 것이 부인의 묘이고 뒤에 있는 것이 권주의 묘이다. (이곳은 2016년 경북도청 신청사를 건립할 당시 공원 조성계획에 의해 이장될 위기에 처했었다. 그러나 묘역 앞 신도비와 강당이 연계유적으로 가치가 있다는 의견에 따라 그대로 보전되었다.) (이미지 / 관련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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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주의 네 아들 : 권질 ‧ 권전 ‧ 권굉
- 맞아들 권질과 퇴계 이황 : 권질은 1504년 아버지 권주가 기묘사화에 연루되었을 때 고문을 받은 후 거제도로 유배되었다가 2년 후 중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 풀려났다. 그러나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에 다시 연루되어 예안현(禮安縣: 현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으로 유배되었다.
1538년 유배에서 풀려났으며 이듬해 고신(告身)을 되돌려 받았으나 1545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권질은 권질은 딸만 여럿 있었는데, 이 중 딸 한 명이 퇴계 이황의 둘째 부인이 됐다. 그는 예안으로 유배되었을 당시 퇴계 이황을 불러 자신의 딸을 맡아줄 것을 부탁하였다. 권질의 딸은 정신이 온전하지 못한 상태였지만 이황은 권씨를 부인으로 맞이했고, 죽은 이후 시묘살이까지 하며 부부의 예를 다했다. 권질은 이황에 대한 고마운 마음으로 사위가 자신을 위해 지은 ‘사락정’이라는 건물의 이름을 자신의 호로 삼기도 했다. (권질- 이황 /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761342.html) - 둘째 아들 권전과 기묘사화
- 막내아들 권굉이 이은 가문의 명맥
가일마을로 돌아오다 : 병곡 권구와 수곡 권보
- 가일마을을 떠난 권경행, 다시 돌아온 권징
- [종가] 38.가일마을 안동 권씨, 경북일보, 2016.12.18.https://www.kyongbuk.co.kr/news/articleView.html?idxno=979709 -> 권주의 넷째 아들인 권굉(1494~?)이 가계를 계승했고 권굉 역시 차남인 권의남, 그의 아들인 권호연의 손자인 권경행으로 가계를 이어왔다. 권경행 대에 와서는 외가인 예천 용궁면 오룡리로 이주해 살다가 손자인 권징(1636~1698) 에 이르러 다시 가일 마을로 돌아왔다. / 권징의 아들인 병곡 권구(1672~1749)는 갈암 이현일(1627~1704)의 제자로 당시 안동의 대표적인 학자로 명성을 떨쳤다. 가일 안동 권씨 가문의 위상을 드높인 이가 권구였다. 1728년 ‘이인좌의 난’으로 고초를 겪은 이후에는 은거하며 후학 양성에만 몰두했다. 사후에 사헌부지평에 증직되었고 이조판서에 추증됐다.
- 병곡 권구와 이인좌의 난 : 병곡 권구(屛谷 權渠, 1672~1749)는 서애 류성룡과 갈암 이현일의 학맥을 계승한 안동 지역의 대표적인 학자였다. 그는 가일마을로 다시 입향한 아버지 권징이 마을에 정착한 후 이곳에서 태어났다.
1728년 이인좌의 난으로 누명을 쓴 후 고향에서 머무르며 학문탐구와 후진양성에 진력해 수많은 문인을 배출하기도 했다. 철종 10년에 사헌부지평으로 증직됐으며 사림에 의해 불천위로 모셔졌다.
- 권구의 세 아들 : 권집과 권집, 권보 : 권보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에서 학문에 전념하면서 부모를 극진히 모셨다.
- 마을 내 관련 유적
권구는 자신의 선조 권주(1457-1505)가 살던 집을 수리해 종택으로 삼았다. 종택이란 한 집안의 종가가 대를 이어 사는 살림집으로, 권구의 종택은 그의 호를 따 ‘병곡 종택’으로 불린다. 병곡 종택은 권구 이후 지금까지 양자(養子)를 들이지 않고 '종자종손'(宗子宗孫)으로 종택을 지켜온 보기 드문 집이며, ‘시습재’라는 현판이 걸린 사랑채로도 유명하다. ‘시습’은『논어』의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學而時習之不亦說乎)’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2011년 대청을 중건하였다.
종택에서 경북도청 신청사 방향으로 길을 따라 가다보면 노동서사와 노동재사가 나온다. 노동서사는 영조 46년(1770)에 권구의 덕을 기리며 지역 주민들이 세웠다. 사당이 없기 때문에 ‘서원’이 아닌 ‘서사’로 불린다고 한다(https://blog.daum.net/elegant0302/2181) 후에 후손이자 독립운동가인 권오설이 서사 건물에서 원흥의숙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노동재사는 노동서사에서 공부하던 유생들의 숙식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되었다.(https://blog.daum.net/elegant0302/2181) 현 주인인 @@@이 매입한 후 개조해 @@@부터 독립책방인 ‘가일서가’로 운영하고 있다.
(노동서사, 두산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076639&cid=40942&categoryId=37713 / 노동서사, 숙박 관련 https://www.kozaza.com/rooms/1002934 / 가일서가 https://m.blog.naver.com/andongcity00/221671949116)
병곡고택 동편에는 ‘수곡고택’이 있다. 이 집은 권보를 기리기 위해 후손 권조를 비롯한 안동권씨 후손들이 1792년에 지은 것이다. 집은 대문채, 사랑채, 안채, 별당,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랑채에는 화려한 팔작지붕이 아닌 소박한 양식의 맞배지붕을 두어서, 평생 검소하게 생활한 권보의 정신을 지키고자 하였다. 별당인 일지재는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을 위해 건립한 것이다.
수곡고택은 독립운동 군자금을 모금했던 우암 권준희 선생과 그의 손자로 역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권오상 선생의 생가이기도 하다. / 1990년부터 3년에 걸쳐 별당과 안채 건물을 보수했다.(https://blog.daum.net/elegant0302/2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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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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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 [古宅은 살아있다] <14>안동 풍천면 안동 권씨 가일마을, 매일신문, 2012.4.4. http://news.imaeil.com/NewestAll/2012040407305011347
관련 문화재
- 선원강당, 화산 신도비, 안동권씨 병곡종택 안동 수곡고택
- 연계 유적 : 권주 묘, [권주 종가 고문서(보물_제549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1_1&ccbaCpno=1123705490000] , [권주 종가 문적(보물_제1002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1_1&ccbaCpno=1123710020000 ] <페이지 링크 걸기>,
- 노동서사(원흥의숙), 노동재사(가일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