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 명옥대"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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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옥대(鳴玉臺)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이 후학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던 곳을 기념하기 위하여 조선 현종(顯宗) 6년(1665)에 사림(士林)들이 건립한 누각(樓閣)형태의 정자이다. 옛 이름은 ‘낙수대(落水臺)’ 였으나, 서진(西晉)의 육기(陸機) [http://dh.aks.ac.kr/~classics/wiki/index.php/%EC%95%88%EB%8F%99_%EB%AA%85%EC%98%A5%EB%8C%80 초은시(招隱詩)]에 나오는「솓구쳐 나는 샘이 명옥을 씻어 내리네[飛泉漱鳴玉]」라는 글귀에 따라 ‘명옥대’로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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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옥대(鳴玉臺)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이 후학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던 곳을 기념하기 위하여 조선 현종(顯宗) 6년(1665)에 사림(士林)들이 건립한 누각(樓閣)형태의 정자이다. 옛 이름은 ‘낙수대(落水臺)’ 였으나, 서진(西晉)의 육기(陸機) [https://blog.naver.com/rjm8001/2212284522300  초은시(招隱詩)]에 나오는「솓구쳐 나는 샘이 명옥을 씻어 내리네[飛泉漱鳴玉]」라는 글귀에 따라 ‘명옥대’로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자연석 초석 위에 원형 기둥을 세우고 누마루를 설치하였는데, 정면 2칸, 측면 2칸의 평면에 계자난간(鷄子欄干)을 두르고 있으며 4면 모두를 개방하여 주변경관을 감상하기 좋게 하였다. 1920년 경에 고쳐지었다고 하는데, 내진주(內陳柱)와 기둥 위에 남아 있는 흔적으로 보아서 원래 뒤쪽 2칸은 방으로 꾸며져 있던 것을 후대에 지금과 같은 누마루 형식으로 개조한 것으로 보인다. 맞은편 바위 표면에 ‘명옥대’라고 새겨놓은 글이 남아 있다.  
 
자연석 초석 위에 원형 기둥을 세우고 누마루를 설치하였는데, 정면 2칸, 측면 2칸의 평면에 계자난간(鷄子欄干)을 두르고 있으며 4면 모두를 개방하여 주변경관을 감상하기 좋게 하였다. 1920년 경에 고쳐지었다고 하는데, 내진주(內陳柱)와 기둥 위에 남아 있는 흔적으로 보아서 원래 뒤쪽 2칸은 방으로 꾸며져 있던 것을 후대에 지금과 같은 누마루 형식으로 개조한 것으로 보인다. 맞은편 바위 표면에 ‘명옥대’라고 새겨놓은 글이 남아 있다.  

2021년 6월 3일 (목) 13:52 판

명옥대(鳴玉臺)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이 후학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던 곳을 기념하기 위하여 조선 현종(顯宗) 6년(1665)에 사림(士林)들이 건립한 누각(樓閣)형태의 정자이다. 옛 이름은 ‘낙수대(落水臺)’ 였으나, 서진(西晉)의 육기(陸機) 초은시(招隱詩)에 나오는「솓구쳐 나는 샘이 명옥을 씻어 내리네[飛泉漱鳴玉]」라는 글귀에 따라 ‘명옥대’로 이름을 고쳤다고 한다.

자연석 초석 위에 원형 기둥을 세우고 누마루를 설치하였는데, 정면 2칸, 측면 2칸의 평면에 계자난간(鷄子欄干)을 두르고 있으며 4면 모두를 개방하여 주변경관을 감상하기 좋게 하였다. 1920년 경에 고쳐지었다고 하는데, 내진주(內陳柱)와 기둥 위에 남아 있는 흔적으로 보아서 원래 뒤쪽 2칸은 방으로 꾸며져 있던 것을 후대에 지금과 같은 누마루 형식으로 개조한 것으로 보인다. 맞은편 바위 표면에 ‘명옥대’라고 새겨놓은 글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