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문화유산 콘텐츠 편찬 계획(송수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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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단(試士壇)과 관련된 남인과 서학(천주교) | 시사단(試士壇)과 관련된 남인과 서학(천주교) | ||
조선후기 남인은 숙종대 갑술환국으로 인해 실각한 이후 붕당으로서의 영향력을 상실했고, 영조대 무신란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인해 중앙정계에서 실각하였다. 이후 중앙정계에서 남인이 다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정조 12년(1788)에 채제공이 우의정에 임명되면서부터였는데, 남인의 정승 임명은 갑술환국 이후 거의 80여 년 만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 조선후기 남인은 숙종대 갑술환국으로 인해 실각한 이후 붕당으로서의 영향력을 상실했고, 영조대 무신란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인해 중앙정계에서 실각하였다. 이후 중앙정계에서 남인이 다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정조 12년(1788)에 채제공이 우의정에 임명되면서부터였는데, 남인의 정승 임명은 갑술환국 이후 거의 80여 년 만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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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제공의 우의정 임명 후 노론, 소론과 함께 정계의 한 축을 이루게 된 남인은 정조 15년(1791)에 일어난 진산사건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전라도 진산에 살던 천주교인인 윤지충과 권상연이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상을 치루지 않고 신주를 불에 태워버린 사건이 일어나 두 사람이 사형에 처해졌는데, 정치적으로 파장이 커진 이유는 이들이 근기남인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는 점이다. | 채제공의 우의정 임명 후 노론, 소론과 함께 정계의 한 축을 이루게 된 남인은 정조 15년(1791)에 일어난 진산사건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전라도 진산에 살던 천주교인인 윤지충과 권상연이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상을 치루지 않고 신주를 불에 태워버린 사건이 일어나 두 사람이 사형에 처해졌는데, 정치적으로 파장이 커진 이유는 이들이 근기남인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는 점이다. | ||
당시 남인은 뿌리는 동일하지만 활동 지역과 기반을 중심으로 영남남인(영남)과 근기남인(경기)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근기남인들 중 성호 이익의 제자 일부는 천주교를 믿게 되었는데 이들은 사제 관계 뿐 아니라 혼인으로 얼키설키 연결되어 있어 천주교가 빠르게 전파되었다. 근기남인에서 주요한 인물이었던 이익의 제자인 권철신·권일신 형제와 이가환·정약용 등도 천주교를 믿었는데, 권일신이 지방 포교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전라도에 천주교가 전파되고 윤지충의 경우 정약용의 형 정약전의 포교로 인해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따라서 윤지충·권상연 둘의 문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근기남인 중 천주교에 우호적이었던 인물 전체로 비화될 수 있는 사건이었다. | 당시 남인은 뿌리는 동일하지만 활동 지역과 기반을 중심으로 영남남인(영남)과 근기남인(경기)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근기남인들 중 성호 이익의 제자 일부는 천주교를 믿게 되었는데 이들은 사제 관계 뿐 아니라 혼인으로 얼키설키 연결되어 있어 천주교가 빠르게 전파되었다. 근기남인에서 주요한 인물이었던 이익의 제자인 권철신·권일신 형제와 이가환·정약용 등도 천주교를 믿었는데, 권일신이 지방 포교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전라도에 천주교가 전파되고 윤지충의 경우 정약용의 형 정약전의 포교로 인해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따라서 윤지충·권상연 둘의 문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근기남인 중 천주교에 우호적이었던 인물 전체로 비화될 수 있는 사건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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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이 사건은 정조가 나서서 권일신만 유배 보내는 선에서 무마되었지만 정조가 근기남인의 수장인 채제공을 위해 사건을 확대시키지 않고 덮었다는 논란이 일어났고, 근기남인은 사학의 무리와 연루되어 있다는 의심을 받으면서 활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정조와 채제공은 사도세자 추숭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이 사건으로 근기남인이 추숭을 주도하기 어렵게 되면서 이를 도울 우군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채제공은 근기남인과 뿌리를 같이 하는 영남남인에게로 눈을 돌려, 진산사건 다음 해 봄인 정조 16년(1792) 3월에 정조의 측근 이만수를 보내 도산서원에서 퇴계 이황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도산서원 앞에서 영남남인을 대상으로 하는 도산별시를 치르고 합격자 명단인 『교남빈흥록』을 간행하게 된다. | 다행히 이 사건은 정조가 나서서 권일신만 유배 보내는 선에서 무마되었지만 정조가 근기남인의 수장인 채제공을 위해 사건을 확대시키지 않고 덮었다는 논란이 일어났고, 근기남인은 사학의 무리와 연루되어 있다는 의심을 받으면서 활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정조와 채제공은 사도세자 추숭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이 사건으로 근기남인이 추숭을 주도하기 어렵게 되면서 이를 도울 우군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채제공은 근기남인과 뿌리를 같이 하는 영남남인에게로 눈을 돌려, 진산사건 다음 해 봄인 정조 16년(1792) 3월에 정조의 측근 이만수를 보내 도산서원에서 퇴계 이황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도산서원 앞에서 영남남인을 대상으로 하는 도산별시를 치르고 합격자 명단인 『교남빈흥록』을 간행하게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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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통해 정조와 채제공의 우군으로 포섭된 영남남인은 그 해 여름 영남의 선비 만 명이 참여하는 ‘영남만인소’를 올려 사도세자가 억울하게 죽었음을 밝히고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숭할 것을 적극 주장함으로써 중앙정계의 여론은 온통 사도세자 추숭문제로 쏠리게 되었고 이후 정조가 죽을 때 까지 정계의 가장 큰 이슈로 부각되게 된다. 이는 정계의 프레임 전쟁에서 남인이 의제를 선점하고 주도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기존과 다른 큰 변화였지만 근기남인의 사학 혐의에 쏠린 사람들의 관심을 희석시키고 근기남인의 고립을 막았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 이를 통해 정조와 채제공의 우군으로 포섭된 영남남인은 그 해 여름 영남의 선비 만 명이 참여하는 ‘영남만인소’를 올려 사도세자가 억울하게 죽었음을 밝히고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숭할 것을 적극 주장함으로써 중앙정계의 여론은 온통 사도세자 추숭문제로 쏠리게 되었고 이후 정조가 죽을 때 까지 정계의 가장 큰 이슈로 부각되게 된다. 이는 정계의 프레임 전쟁에서 남인이 의제를 선점하고 주도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기존과 다른 큰 변화였지만 근기남인의 사학 혐의에 쏠린 사람들의 관심을 희석시키고 근기남인의 고립을 막았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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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치러진 도산별시를 기념하기 위해 정조 20년(1796)에 도산서원 앞 송림에 비석과 비각을 세우게 되었고, 이 비석의 비문을 채제공이 직접 짓게 되었다. 그러나 정조 사후 노론 벽파가 정권을 잡자 순조 1년(1801)에 천주교도에 대한 신유박해가 일어났고, 근기남인 중 천주교를 믿었던 권철신과 이가환은 사형에 처해지고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되어 『자산어보』를 짓고 문순득을 만나 『표해시말』을 쓰게 되었는데 최근에 영화 자산어보가 개봉하기도 하였다. 이때 채제공은 이미 죽은 뒤였으나 생전에 천주교를 비호했다는 이유로 사후에 관작을 박탈당하고 도산별시를 기념해 세웠던 비석과 비각도 파괴되었다가, 1823년에 채제공이 복권된 이후에야 비석과 비각이 다시 세워지게 되었다. 현재의 시사단은 안동댐이 건설되어 시험 장소였던 송림이 물에 잠기게 되면서 단을 쌓아 비석과 비각을 그대로 위로 옮겨 놓은 것이다. | 이 때 치러진 도산별시를 기념하기 위해 정조 20년(1796)에 도산서원 앞 송림에 비석과 비각을 세우게 되었고, 이 비석의 비문을 채제공이 직접 짓게 되었다. 그러나 정조 사후 노론 벽파가 정권을 잡자 순조 1년(1801)에 천주교도에 대한 신유박해가 일어났고, 근기남인 중 천주교를 믿었던 권철신과 이가환은 사형에 처해지고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되어 『자산어보』를 짓고 문순득을 만나 『표해시말』을 쓰게 되었는데 최근에 영화 자산어보가 개봉하기도 하였다. 이때 채제공은 이미 죽은 뒤였으나 생전에 천주교를 비호했다는 이유로 사후에 관작을 박탈당하고 도산별시를 기념해 세웠던 비석과 비각도 파괴되었다가, 1823년에 채제공이 복권된 이후에야 비석과 비각이 다시 세워지게 되었다. 현재의 시사단은 안동댐이 건설되어 시험 장소였던 송림이 물에 잠기게 되면서 단을 쌓아 비석과 비각을 그대로 위로 옮겨 놓은 것이다. | ||
2021년 5월 23일 (일) 22:04 판
주제
- 시사단과 관련된 남인과 서학(천주교)
국문
시사단(試士壇)과 관련된 남인과 서학(천주교) 조선후기 남인은 숙종대 갑술환국으로 인해 실각한 이후 붕당으로서의 영향력을 상실했고, 영조대 무신란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인해 중앙정계에서 실각하였다. 이후 중앙정계에서 남인이 다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정조 12년(1788)에 채제공이 우의정에 임명되면서부터였는데, 남인의 정승 임명은 갑술환국 이후 거의 80여 년 만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채제공의 우의정 임명 후 노론, 소론과 함께 정계의 한 축을 이루게 된 남인은 정조 15년(1791)에 일어난 진산사건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전라도 진산에 살던 천주교인인 윤지충과 권상연이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상을 치루지 않고 신주를 불에 태워버린 사건이 일어나 두 사람이 사형에 처해졌는데, 정치적으로 파장이 커진 이유는 이들이 근기남인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남인은 뿌리는 동일하지만 활동 지역과 기반을 중심으로 영남남인(영남)과 근기남인(경기)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근기남인들 중 성호 이익의 제자 일부는 천주교를 믿게 되었는데 이들은 사제 관계 뿐 아니라 혼인으로 얼키설키 연결되어 있어 천주교가 빠르게 전파되었다. 근기남인에서 주요한 인물이었던 이익의 제자인 권철신·권일신 형제와 이가환·정약용 등도 천주교를 믿었는데, 권일신이 지방 포교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전라도에 천주교가 전파되고 윤지충의 경우 정약용의 형 정약전의 포교로 인해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따라서 윤지충·권상연 둘의 문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근기남인 중 천주교에 우호적이었던 인물 전체로 비화될 수 있는 사건이었다.
다행히 이 사건은 정조가 나서서 권일신만 유배 보내는 선에서 무마되었지만 정조가 근기남인의 수장인 채제공을 위해 사건을 확대시키지 않고 덮었다는 논란이 일어났고, 근기남인은 사학의 무리와 연루되어 있다는 의심을 받으면서 활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정조와 채제공은 사도세자 추숭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이 사건으로 근기남인이 추숭을 주도하기 어렵게 되면서 이를 도울 우군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채제공은 근기남인과 뿌리를 같이 하는 영남남인에게로 눈을 돌려, 진산사건 다음 해 봄인 정조 16년(1792) 3월에 정조의 측근 이만수를 보내 도산서원에서 퇴계 이황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도산서원 앞에서 영남남인을 대상으로 하는 도산별시를 치르고 합격자 명단인 『교남빈흥록』을 간행하게 된다.
이를 통해 정조와 채제공의 우군으로 포섭된 영남남인은 그 해 여름 영남의 선비 만 명이 참여하는 ‘영남만인소’를 올려 사도세자가 억울하게 죽었음을 밝히고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숭할 것을 적극 주장함으로써 중앙정계의 여론은 온통 사도세자 추숭문제로 쏠리게 되었고 이후 정조가 죽을 때 까지 정계의 가장 큰 이슈로 부각되게 된다. 이는 정계의 프레임 전쟁에서 남인이 의제를 선점하고 주도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기존과 다른 큰 변화였지만 근기남인의 사학 혐의에 쏠린 사람들의 관심을 희석시키고 근기남인의 고립을 막았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이 때 치러진 도산별시를 기념하기 위해 정조 20년(1796)에 도산서원 앞 송림에 비석과 비각을 세우게 되었고, 이 비석의 비문을 채제공이 직접 짓게 되었다. 그러나 정조 사후 노론 벽파가 정권을 잡자 순조 1년(1801)에 천주교도에 대한 신유박해가 일어났고, 근기남인 중 천주교를 믿었던 권철신과 이가환은 사형에 처해지고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되어 『자산어보』를 짓고 문순득을 만나 『표해시말』을 쓰게 되었는데 최근에 영화 자산어보가 개봉하기도 하였다. 이때 채제공은 이미 죽은 뒤였으나 생전에 천주교를 비호했다는 이유로 사후에 관작을 박탈당하고 도산별시를 기념해 세웠던 비석과 비각도 파괴되었다가, 1823년에 채제공이 복권된 이후에야 비석과 비각이 다시 세워지게 되었다. 현재의 시사단은 안동댐이 건설되어 시험 장소였던 송림이 물에 잠기게 되면서 단을 쌓아 비석과 비각을 그대로 위로 옮겨 놓은 것이다.
영문
노드리스트
문화유산
ID | Class | Label |
---|---|---|
시사단 | Heritage | (경상북도유형문화재_제33호)_시사단 |
안동도산서원 | Heritage | (사적_제170호)_안동_도산서원 |
장소
ID | Class | Label |
---|---|---|
흑산도 | Place | 흑산도(黑山島) |
안동대학교 | Place | 안동대학교(安東大學校) |
도서
ID | Class | Label |
---|---|---|
교남빈흥록 | Record | 교남빈흥록(嶠南賓興錄) |
영남만인소 | Record |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 |
표해시말 | Record | 표해시말(漂海始末) |
자산어보 | Record | 자산어보(玆山魚譜) |
치제문 | Record | 치제문(致祭文) |
금등문서 | Record | 금등문서(金縢之詞) |
사건
ID | Class | Label |
---|---|---|
신유박해 | Event | 신유박해(辛酉迫害) |
도산별시 | Event | 도산별시(陶山別試) |
사도세자추숭 | Event | 사도세자추숭(思悼世子追崇) |
진산사건 | Event | 진산사건(珍山事件) |
인물
ID | Class | Label |
---|---|---|
이익 | Actor | 이익(李瀷,_1681~1764) |
이만수 | Actor | 이만수(李晩秀,_1752~1820) |
채제공 | Actor | 채제공(蔡濟恭,_1720~1799) |
조선_정조 | Actor | 조선_정조(正祖,_1752~1800) |
사도세자 | Actor | 사도세자(思悼世子,_1736-1762) |
김종수 | Actor | 김종수(金鍾秀,_1728~1799) |
권철신 | Actor | 권철신(權哲身,_1736-1801) |
이가환 | Actor | 이가환(李家煥,_1742-1801) |
윤지충 | Actor | 윤지충(尹持忠,_1759-1791) |
권상연 | Actor | 권상연(權尙然,_1751-1791) |
문순득 | Actor | 문순득(文順得,_1777-1847) |
정약전 | Actor | 정약전(丁若銓,_1758~1816) |
이벽 | Actor | 이벽(李蘗,_1754-1786) |
이언적 | Actor | 이언적(李彦迪,_1491-1553) |
퇴계 | Actor | 퇴계(退溪)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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