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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서성의 어머니 고성 이씨=== 이씨 부인은 청풍군수를 지낸 이고의 무남독녀다. 15세(5세?) 때 눈병을 앓고 시력을 잃었다고 한다. 딸을 너...)
 
(서성의 어머니 고성 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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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은 겁내지 마시오. 내가 비록 보잘것없는 위인이나, 어찌 그 조그마한 과실로 부인을 괄시하겠소. 잠깐 보아도 부인의 단정하고 현숙한 재덕은 용모의 아름다움에 못하지 않으니, 우리 집과 내게는 오히려 과분한 복택이 되거늘 내가 어찌 부인을 소홀하게 대우하겠소. 다만 내집의 방조 되시는 사가정(四佳亭) 선생의 하세(下世) 후로 한미하고 영체하며 형세가 극히 빈궁하여 호화롭게 생장한 부인에게 괴로움이 많을 것이니 이것이 부끄럽소.” 정창권(2011), 『역사 속 장애인은 어떻게 살았을까』, 글항아리, 382면.
 
“부인은 겁내지 마시오. 내가 비록 보잘것없는 위인이나, 어찌 그 조그마한 과실로 부인을 괄시하겠소. 잠깐 보아도 부인의 단정하고 현숙한 재덕은 용모의 아름다움에 못하지 않으니, 우리 집과 내게는 오히려 과분한 복택이 되거늘 내가 어찌 부인을 소홀하게 대우하겠소. 다만 내집의 방조 되시는 사가정(四佳亭) 선생의 하세(下世) 후로 한미하고 영체하며 형세가 극히 빈궁하여 호화롭게 생장한 부인에게 괴로움이 많을 것이니 이것이 부끄럽소.” 정창권(2011), 『역사 속 장애인은 어떻게 살았을까』, 글항아리, 382면.
  
그러나 이들의 결혼은 오래가지 못하였는데 5년만에 서해가 부인과 두 살 아들을 남기고 23살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던 것이다. 이씨 부인은 친정 부모도 시댁 부모도 이미 여의어서 기댈 곳이 없었다. 이씨는 홀몸으로 서성을 제대로 키우기 위해 서성의 작은 아버지 서엄이 사는 한양으로 이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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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들의 결혼 생활은 오래가지 못하였는데 5년만에 서해가 부인과 두 살 아들을 남기고 23살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던 것이다. 이씨 부인은 친정 부모도 시댁 부모도 이미 여의어서 기댈 곳이 없었다. 이씨는 홀몸으로 서성을 제대로 키우기 위해 서성의 작은 아버지 서엄이 사는 한양으로 이사했다.
  
 
서울에 올라온 이씨 부인은 약현(지금 서울 중림동 약현 성당 자리)에 자리를 잡고, 약식과 약과, 약주를 만들어 팔기도 하면서 서성을 교육시켰다. 약주와 약식, 약과의 명칭은 이씨 부인으로부터 유래했다고 한다. 특히 이씨 부인은 서성을 당시 대학자인 율곡 이이의 문하생으로 들어가게 하면서 서성의 정치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서성은 어머니의 바람대로 29세 때 문과에 급제해 공무원의 길로 들어섰다.  
 
서울에 올라온 이씨 부인은 약현(지금 서울 중림동 약현 성당 자리)에 자리를 잡고, 약식과 약과, 약주를 만들어 팔기도 하면서 서성을 교육시켰다. 약주와 약식, 약과의 명칭은 이씨 부인으로부터 유래했다고 한다. 특히 이씨 부인은 서성을 당시 대학자인 율곡 이이의 문하생으로 들어가게 하면서 서성의 정치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서성은 어머니의 바람대로 29세 때 문과에 급제해 공무원의 길로 들어섰다.  
  
 
조선시대에 앞을 보지 못하는 여성의 몸으로 혼자 자식을 키워낸 그 삶이 어땠는지는 지금의 우리로서는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삶의 역경을 이겨내고 훌륭하게 아들을 키운 위대한 어머니의 모습을 고성 이씨는 보여준다.
 
조선시대에 앞을 보지 못하는 여성의 몸으로 혼자 자식을 키워낸 그 삶이 어땠는지는 지금의 우리로서는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삶의 역경을 이겨내고 훌륭하게 아들을 키운 위대한 어머니의 모습을 고성 이씨는 보여준다.

2021년 4월 29일 (목) 10:38 판

서성의 어머니 고성 이씨

이씨 부인은 청풍군수를 지낸 이고의 무남독녀다. 15세(5세?) 때 눈병을 앓고 시력을 잃었다고 한다. 딸을 너무나 아꼈던 이고는 딸이 장님인 것을 속이고 퇴계 이황과 작당하여 서해와의 결혼을 추진하였다.

“내 딸은 하늘이 내리신 여자 중의 군자(女中君子)인데 불의의 병으로 저 지경이 된 것은 딸 아이의 죄가 아니요, 내 탓인데 내 어찌 편히 지낼 수 있겠는가. 이는 필시 하늘이 그 아이의 명예와 복록을 더욱 빛나게 하시려는 뜻에서 저같이 아름다운 재모와 품행에 한 가지 흠을 더하신 것이다. 어느 덕망 있는 집안에 들어가 가문을 창대히 하고 좋은 자손을 내어 이름을 크게 하려고 이같이 고맙게 만드신 것이 분명하다. 그런즉 저 아이의 혼처는 명문거족의 혁혁한 자손 중보다는 시골의 이름 없고 가난한 가문 출신이어도 훌륭한 덕행으로 장래가 촉망되며 부부가 힘을 합해 그 문호를 크게 중흥시킬만한 사람으로 골라 시집 보내어 이 복을 헛되게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정창권(2011), 『역사 속 장애인은 어떻게 살았을까』, 글항아리, 381면.

퇴계의 문하생이었던 서해는 첫날 밤을 치르면서 비로소 신부가 앞을 못본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복잡한 심경이었지만 결국 어진 마음으로 이씨를 받아들였다. 그때 신부가 신랑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첩이 전생에 죄가 있어 눈먼 몸이나 외람되게 낭군을 섬기고 싶어 혼인을 스스로 사양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어떠한 미움과 죄라도 달게 받겠사옵니다. 이를 속이신 부모님은 오직 이 한 몸을 불쌍히 여겨 옳지 않은 줄 아시면서도 이 일을 행하셨습니다. 낭군께서도 부모를 섬기는 마음으로 이를 헤아려 아실 것이옵니다. 모든 죄는 이 한 몸이 지겠사오니 첩의 부모를 탓하지 말아 주옵소서. 이 몸이 진작 죽지 못하고 살아 있는 것은 오직 사랑하심을 저버리고 불효의 죄를 짓지 아니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밤을 당하고 보니 진작 죽지 못한 것이 한이 될 뿐이옵니다. 다행히 낭군께서 첩의 죄를 용서하시고 비 들고 뜰 쓰는 소임을 맡겨 주신다면 이는 첩의 부모와 첩 세 사람을 살리시는 큰 은혜가 되겠지만 감히 어찌 이를 바라겠습니까?” 안춘근(2002), 『역사를 빛낸 한국의 여성』, 범우사, 168~169면.

이때 신랑은 신부에게 또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부인은 겁내지 마시오. 내가 비록 보잘것없는 위인이나, 어찌 그 조그마한 과실로 부인을 괄시하겠소. 잠깐 보아도 부인의 단정하고 현숙한 재덕은 용모의 아름다움에 못하지 않으니, 우리 집과 내게는 오히려 과분한 복택이 되거늘 내가 어찌 부인을 소홀하게 대우하겠소. 다만 내집의 방조 되시는 사가정(四佳亭) 선생의 하세(下世) 후로 한미하고 영체하며 형세가 극히 빈궁하여 호화롭게 생장한 부인에게 괴로움이 많을 것이니 이것이 부끄럽소.” 정창권(2011), 『역사 속 장애인은 어떻게 살았을까』, 글항아리, 382면.

그러나 이들의 결혼 생활은 오래가지 못하였는데 5년만에 서해가 부인과 두 살 아들을 남기고 23살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던 것이다. 이씨 부인은 친정 부모도 시댁 부모도 이미 여의어서 기댈 곳이 없었다. 이씨는 홀몸으로 서성을 제대로 키우기 위해 서성의 작은 아버지 서엄이 사는 한양으로 이사했다.

서울에 올라온 이씨 부인은 약현(지금 서울 중림동 약현 성당 자리)에 자리를 잡고, 약식과 약과, 약주를 만들어 팔기도 하면서 서성을 교육시켰다. 약주와 약식, 약과의 명칭은 이씨 부인으로부터 유래했다고 한다. 특히 이씨 부인은 서성을 당시 대학자인 율곡 이이의 문하생으로 들어가게 하면서 서성의 정치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서성은 어머니의 바람대로 29세 때 문과에 급제해 공무원의 길로 들어섰다.

조선시대에 앞을 보지 못하는 여성의 몸으로 혼자 자식을 키워낸 그 삶이 어땠는지는 지금의 우리로서는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삶의 역경을 이겨내고 훌륭하게 아들을 키운 위대한 어머니의 모습을 고성 이씨는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