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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호헌은 조선 전기의 문신인 서해(徐嶰,1537~1559)가 서재로 쓰던 별당이다.
 
#소호헌은 조선 전기의 문신인 서해(徐嶰,1537~1559)가 서재로 쓰던 별당이다.
#소호헌의 왼쪽 건물은 서해의 아들인 약봉 서성(藥峯 徐渻,1558~1631)의 태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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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호헌의 왼쪽 건물은 약봉태실로 서해의 아들인 약봉 서성(藥峯 徐渻,1558~1631)의 태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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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호헌은 드물게 남아있는 임진왜란 전에 지어진 민가로 조선 후기에 지어진 건물에서 볼 수 없는 장식 요소가 많기 때문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따라서 1968년 일찍이 보물로 지정되었다.
 
#소호헌은 드물게 남아있는 임진왜란 전에 지어진 민가로 조선 후기에 지어진 건물에서 볼 수 없는 장식 요소가 많기 때문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따라서 1968년 일찍이 보물로 지정되었다.
 
#고려시대에는 건물을 화려하게 지었으나 조선시대의 건축물은 성리학의 영향을 받아 비교적 실용적으로 지어졌다. 그러나 소호헌의 화려함을 고려하면 고려시대 건축의 특징이 조선 초기까지 이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건물을 화려하게 지었으나 조선시대의 건축물은 성리학의 영향을 받아 비교적 실용적으로 지어졌다. 그러나 소호헌의 화려함을 고려하면 고려시대 건축의 특징이 조선 초기까지 이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서성은 이이의 제자이나 부친은 이황의 제자인 점을 고려하였을 때, 부자가 서로 다른 학설을 지닌 성리학의 대가에게 사사받은 보기 드문 가문이다. 또한 안동은 퇴계학파의 본향인데, 소호헌과 서성의 태실인 약봉 태실이 있는 것으로 추측컨데 조선 후기의 탕평(蕩平)이 안동에서도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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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은 이이의 제자이나 부친은 이황의 제자인 점을 고려하였을 때, 부자가 서로 다른 학설을 지닌 성리학의 대가에게 사사받은 보기 드문 가문이다. 또한 안동은 퇴계학파의 본향인데, 소호헌과 약봉태실이 있는 것으로 추측컨데 조선 후기의 탕평(蕩平)이 안동에서도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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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4월 29일 (목) 02:41 판

안동 소호헌

관련 내용

정의

  1. 소호헌은 조선 전기의 문신인 서해(徐嶰,1537~1559)가 서재로 쓰던 별당이다.
  2. 소호헌의 왼쪽 건물은 약봉태실로 서해의 아들인 약봉 서성(藥峯 徐渻,1558~1631)의 태실이다.

인물

  1. 서해는 이황(李滉,1502~1570)의 제자이다.
  2. 원래 소호헌은 임청각을 지은 이명(李洺)이 다섯째 아들 이고(李股)가 분가할 때 지어준 집이었는데, 이고의 앞 못 보는 외동딸과 서해가 결혼하면서 이고가 서해에게 선물로 주었다.
  3. 서해는 학문이 높은 경지에 이르렀지만 23세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후 서해의 아내는 아들 서성을 데리고 서울 약현(지금의 중구 만리동)으로 떠나 약주와 약과[1]를 만들어 팔며 아들을 공부시켰고, 서성은 1586년 과거에 장원급제하였다.

건물

  1. 소호헌은 앞쪽에 넓은 대청이 있고, 대청 뒤로는 온돌방이 붙어 있다. 대청 오른쪽에는 누마루가 있다.
  2. 지붕 모서리를 장식한 기와에는 용과 봉황 문양이 있는데, 이는 궁궐 등에 사용되는 것으로 민가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문양이다.
  3. 지붕 안쪽의 지붕과 기둥을 연결하는 종보와 지붕 바로 아래 나무인 종도리 사이에 있는 대공을 보면, 파련대공(연꽃이나 불로초, 구름 등을 입체적으로 조각한 것)으로 했다. 이는 대공을 만드는 가장 고급스러운 방법으로 궁궐에서도 중요한 건물이나 사찰의 대웅전 등에서 사용한 것이다.
  4. 소슬합장(종도리 아래의 人자 형태의 것)을 하였는데, 이는 조선 초까지 많이 사용했으나 후대에 들어서 완전히 사라졌다. 건축연도가 정확히 밝혀진 조선시대 건물 중 소슬합장을 사용한 가장 늦게 건축된 것은 1473년(성종 4)에 지은 도갑사 해탈문이다. 따라서 소호헌은 소슬합장을 사용한 마지막 건물이다.

의의

  1. 소호헌은 드물게 남아있는 임진왜란 전에 지어진 민가로 조선 후기에 지어진 건물에서 볼 수 없는 장식 요소가 많기 때문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따라서 1968년 일찍이 보물로 지정되었다.
  2. 고려시대에는 건물을 화려하게 지었으나 조선시대의 건축물은 성리학의 영향을 받아 비교적 실용적으로 지어졌다. 그러나 소호헌의 화려함을 고려하면 고려시대 건축의 특징이 조선 초기까지 이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서성은 이이의 제자이나 부친은 이황의 제자인 점을 고려하였을 때, 부자가 서로 다른 학설을 지닌 성리학의 대가에게 사사받은 보기 드문 가문이다. 또한 안동은 퇴계학파의 본향인데, 소호헌과 약봉태실이 있는 것으로 추측컨데 조선 후기의 탕평(蕩平)이 안동에서도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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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임청각

관련 내용

정의

  1. 독립운동가 이상룡(李相龍,1858~1932)의 생가인 임청각은 조선 전기의 문신인 이명(李洺)이 1515년에 지은 집이다.
  2. ‘임청각’은 중국의 시인 도연명이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 중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기도 하노라.”는 구절에서 글자를 따왔으며, 현판은 퇴계 이황이 직접 썼다.


인물

  1. 이명의 할아버지 이원(李原,1368~1429)은 조선 초 태종이 왕자의 난을 평정하고 왕위에 오르는 데 협력하여 공신이 되었으며 세종 때 좌의정을 지냈다. 이러한 선조의 공훈을 인정받아 이명은 과거를 거치지 않고 관직에 나갔으며 벼슬하는 동안에는 어진 사람으로 명성이 높았고, 이후 고향인 안동으로 돌아가 임청각을 짓고 풍류를 즐겼다.
  2. 이명의 후손인 이상룡은 1910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이듬해 임청각을 팔아 독립 자금을 마련하였다. 만주로 가서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고 평생을 독립 투쟁에 힘썼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지내기도 했다.


건물

  1. 임청각은 용(用)자가 가로 누운 듯한 평면 구성이며 안채와 중채, 사랑채, 행랑채, 사당, 별당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임청각은 영남산 기슭의 비탈진 경사면을 이용하여 계단형으로 기단을 쌓아 건물을 배치하여 채광효과를 높였으며, 각 건물 사이에는 마당을 만들어 공간의 활용도를 높였다.
  2. 원래는 99칸의 대저택이었다고 하나, 1942년 일제가 불온한 조선 사람이 다수 출생한 집이라 하여 임청각 마당을 가로질러 중앙선 철로를 놓는 바람에 50여칸으로 줄어들었다. 현재 임청각의 의미와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2025년까지 임청각을 원형 복원하는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2]
  3. 별당인 군자정(君子亭)은 ‘丁’자 모양의 누각으로 된 별당 형식으로 된 건물로 정자 안에는 농암 이현보, 제봉 고경명, 백사 윤훤, 송강 조사수가 지은 시들이 걸려 있다.


의의

  1. 임청각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살림집 가운데 가장 오래된 집이다.
  2. 임청각은 3대에 걸쳐 11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독립운동의 산실이자 지도층의 솔선수범, 즉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진정한 실천을 보여주는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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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선생 묘

관련 내용

정의

  1. 조선 중기의 문신인 서성(徐渻, 1558~1631)과 부인 여산송씨의 합장묘이다.


인물

  1. 서성은 1586년 과거에 급제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선조(재위 1567~1608)를 의주까지 호종하며 큰 공을 세웠고, 이후 여러 고위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러던 중 1613년 광해군(재위 1608~1623) 때에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단양과 원주 등에서 11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다시 조정에 복귀하였고, 1624년 이괄의 난과 1627년 정묘호란 때 왕을 호종하여 호종공신이 되었다.


건물

  1. 무덤 앞에는 묘비,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있고, 그 앞의 좌우에는 망주석과 문인석이 각각 한 쌍씩 자리하였다.
  2. 묘역 앞쪽 아래에는 1646년에 세워진 신도비가 있다. 비문은 김상헌이 짓고, 오준과 김광현이 글씨를 썼다. 이 신도비와 무덤 뒤쪽의 둥근 담(곡장), 무덤 아래에서 무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돌(호석)은 1968년에 후손들이 신축 및 보수를 한 것이다.


의의

  1. 서성선생 묘는 조선 중기의 전형적인 무덤의 특징이 많이 드러나 있으며 무덤양식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2. 서성은 경상, 강원, 황해, 평안, 함경, 경기 등 6도 관찰사와 도승지, 대사헌, 형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서성의 후손은 서종태(1652~1719)ㆍ서명선(1728~1791)ㆍ서명응(1716~1787)을 비롯한 많은 정승 판서는 물론, 서호수(1736~1799)ㆍ서유구(1764~1845)와 같은 위대한 학자를 배출했다.
  3. 장지완(張之宛)의 〈규장전운간오(奎章全韻刊誤)〉에 의하면, 정조(正祖, 1752~1800)가 자신의 이름(李祘)을 ‘이산’이 아니라 ‘이성’으로 읽도록 한 이유가 바로 서성의 자손들에 뛰어난 인물이 많았기 때문[3]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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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서성의 호가 약봉이라 이를 땄다고도 하며, 약현에서 만들어서 지명을 본뜬 것이라고도 하며, 조정의 대신들에게도 소문이 나서 도승지가 임금에게 진상을 하자 임금이 약주라고 이름을 지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2. 21.04.20 철로 철거 및 문화재 시굴조사를 완료함(https://newsis.com/view/?id=NISX20210420_0001412726&cID=10810&pID=10800)
  3. 《안대회, 正祖 御諱의 改定:‘이산’과 ‘이성’ - 奎章全韻의 편찬과 관련하여, 한국문화52》